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269화 (269/335)

269화 대해의 발판 (7)

의자왕은 처인 은고 부인과 아들인 부여효, 부여태, 부여연,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이하 신하 및 장수 89명과 그 가솔들, 백성 삼천삼백오십여 명과 함께 압송되어 연개소문을 따라 머나먼 북으로 험난한 여정을 치를 예정이다.

원래라면 뱃길을 통해 평양으로 보낼 예정이었으나 삼한을 평정한 뒤, 나 대신 의기양양해진 연개소문이 옛 백제 한성의 강산과 아리수 일대를 친히 의자왕과 그 신하들에게 안내하겠다며 육로로 택하여 별수 없었다.

‘한때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장기간 기마가 어렵다고 선도해로부터 몇 번 들었던 거 같은데 기우였나.’

중원으로부터 유래된 두창을 막고 위생과 영양에 신경 쓰면서 연개소문의 오랜 지병마저 크게 좋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복신과 지수신 같은 백제 부흥 세력들이 예산 임존성 이북과 탕정성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는 점이 걸려서 걸사비우의 홍기군과 신라군 3천을 더하여 옛 여주인 고리국까지 연개소문의 호위를 맡긴 참이다.

다만 백제 부흥 세력이 요충지를 버리고 덤빌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으니 홍기군에게 별도의 임무를 주긴 했다.

사비에서 고구려의 중원 지방까지 역참을 설치하여 삼한의 도로를 정비하라는 임무를 말이다.

“정말 고맙사옵니다! 중리위두대형.”

뒤늦게 내게 깍듯이 인사하며 미소를 머금은 부여효는 원래라면 장남 부여융과 함께 사비에 남기려 하였으나 당장 부여효가 백제 태자라는 지위가 있고 은고를 따르는 잔당들을 아직 수습하지 못한 상황에서 백제 땅에 남겨 두었다간 빌미가 될 우려가 있어 우선은 연개소문에게 맡겨 평양으로 올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어머니와 한시도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저도 같이 보내 주십시오! 중리위두대형. 그리만 해 주시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흐흑.

절대로 도비천성 때부터 포로 생활을 경험한 부여효가 딱하거나 불쌍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부여융이 하는 걸 보고 견제가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 다시 백제 땅으로 내려보내서 허수아비 노릇을 시킬 것이니.

“어라하! 어라하!”

한편 의자왕과 백제 왕실이 사비에서 완전히 시야에 사라졌음에도 해가 지도록 백강이 감싸는 북나성 방향을 향해 한참이나 울부짖는 백제인이 있었다.

“효심이 깊은 해동의 증자이신 분께서! 어렵사리 보위에 오르신 분께서! 성왕과 선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내치에 그리 공을 들이며 남부여의 중흥을 일으키시겠다 다짐하신 분께서! 어찌 그리 허망한 몰골로 이 땅을 떠나시나이까!”

목이 쉬도록 의자왕을 애타게 부르는 이는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온 흥수였다. 다행히 귀양지가 아직 평정하지 못한 고마지지현(전남 장흥군)이나 남해 부근이 아니라 흑치 가문의 세력권이 뻗친 고군산군도의 외딴섬이었기에 의자왕을 북으로 압송하는 일정에 맞추어 그를 데려올 수 있었다.

“내가 이리 망국의 신하가 되다니, 성충! 내 죽어 자네의 낯을 어찌 보겠는가! 어찌!”

일부러 흑치상지와 설인귀를 보내며 정중히 모셔오라고 하였으나 어라하의 명이 아니면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완강히 거부한 흥수였다. 그러나 의자왕의 배웅을 시켜 주겠다 하여 3번의 거절 끝에 어렵사리 사비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과연 계백, 성충과 더불어 백제 삼충사(三忠祠)라는 사당에 배양된 신하답게 임금에게 버림을 받았음에도 줄곧 한곳만 바라보는 일편단심이었다.

“나라를 잃어 슬프십니까?”

내가 흥수의 등을 보며 그리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인 흥수가 등을 돌리며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신하가 나라를 잃었으니 눈물을 좀 보여도 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짜증스러운 말투와 흥수가 흐느끼는 격양된 감정이 고스란히 표출되었다.

“예. 그렇지요. 그러니 오늘은 마음껏 우십시오. 이날은 31명의 어라하가 다스린 600년 사직의 한 나라가 무너지고, 1,000년을 이어 갈 삼족오가 높이 하늘로 비상할 새 시대이니까요.”

서기가 도입되기 이전에 세워진 삼국 중 가장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를 가진 고대국가의 멸망. 본래 역사보다 강산 한 번 바뀔 시기만큼 앞서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 안타까움과 흥수의 곡소리가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나 백제의 기술과 인재는 중국에 빼앗기지 않은 채 온전히 삼한에 전승될 것이다.

나는 오직 그것 하나만 바라보고 거병하여 600년 사직의 왕도인 이곳 사비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이 백제 사람인 저와 무엇이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이를 알 리가 없는 흥수는 조국을 멸한 나를 원수 바라보듯 분개하고 있는 것이고.

“엊그제 탐라에서 들여온 싱싱한 청피라오~ 달포 만에 들어온 것이라 기다리는 분들이 아주 많소이다!”

“이 귤피로 말하자면 먹거리뿐 아니라 최근 약재로도 자주 쓰이오! 소화에도 좋고, 가래나 식욕부진, 통증도 완화해 주니 아주 만병통치약이지!”

“북쪽에서 유행하는 조미료와 유구에서 재배한 따끈따끈한 흑당이 단돈 쌀 1두. 한 가마의 10분의 1이면 이만큼 드리외다. 아 참, 인삼이나 염색한 삼베도 받겠소!”

사비 저잣거리와 상가에서는 전쟁의 공포 속에 숨죽여 지내던 백제 백성들이 차츰 일상으로 돌아오며 물건을 팔기 시작하고 활기를 띨 무렵이었다.

그때 내가 그런 백제 백성들의 생활을 둘러보며 말했다.

“김유신 장군과 계백 장군이 제게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아는 이름이 나왔는지 나를 노려보는 흥수가 미간을 움직였다. 내가 그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수백 년간 칼을 들고 다툰 이 삼한 땅에서 더는 같은 말을 쓰는 우리 백성이 서로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입니다. 내법좌평께서는 이날 부모의 나라를 잃어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삼한의 백성들은 마침내 해방되었습니다.”

600년을 이어 온 삼국의 정립이 마침내 종말을 맞이했다. 이 좁은 땅에서 그 긴 시간 자웅을 겨루었던 숱한 싸움과 전쟁을 중국과 일본과 같은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고 온전히 삼국 안에서 해결해 냈다.

백제 입장에서야 응당 배신이라고 고구려를 원망할지는 모르나 이미 숱한 배신과 모략으로 저마다 세력을 넓히려던 삼국의 각축이었다. 아신왕과 성왕이 왜를 삼한에 끌어들이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배신하고 수나라와 당나라를 삼한에 끌어들였으니 나로서도 이 혼란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백제와의 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비로 부른 연유가 무엇입니까?”

무거운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흥수가 내게 연이어 그리 물었다.

“저 역시 각각 신라와 백제를 대표하는 장군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내법좌평께서 도와주십시오.”

나는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부탁했다. 한 나라를 끝장내고 그 땅을 새 나라에 맞게 경영하자면 인재를 다시 찾고 모으기까지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미래에서 온 나는 이 시기 백제 인재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오히려 당대 고구려의 대귀족으로서 미래에 기록조차 남지 않은 삼국의 인물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흥수는 성충과 더불어 백제 지역의 전반적인 사정을 훤히 꿰고 있으며 내정에 능했던 이 땅 제일의 신하였다. 그러니 부여융을 이용하고 흥수를 통한다면 아직 투항하지 않은 백제의 잔당들을 무혈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오히려 지금이 가장 공을 들여야 할 때지.’

서라벌을 투항시키고 의자왕과 은고를 평양으로 압송했다고 해서 삼한일통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는 굴복시켰을지언정, 그 마음을 얻지 못하면 끊임없는 혼란과 혼돈이 부흥 세력과 함께 도래할 것이다.

이를 아는 나는 다시 한번 굳은 의지로 입을 열었다.

“제게 물으시니 저도 묻겠습니다. 백제 백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백제 제일의 관리가 임금이 없는 백제 백성들을 그저 버려 두시렵니까?”

강한 외침에 흥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 *

탕! 탕!

연철로 주로 제작되는 찰갑의 찰편을 만드는 것보다, 철판을 대형화하여 담금질을 하고 철판을 열처리하여 치는 망치질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사비에서 보름 넘게 머물며 주로 오고 가는 백제 태학사와 공방은 고구려의 태학과 야철공방에 비해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세밀히 보지 않으면 그 차이를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흡사했다.

백제의 장인들은 이러한 공통점을 저마다 옛 부여의 시설과 야철공방에서 비롯된 조직이라고 부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행했구먼요.”

“갑주를 못으로 고정한다니, 대체 이를 어찌 생각하신 건지 참으로 신통합니다!”

내가 간만에 칼을 거두고 백제의 장인들과 고구려 태학에서 온 박사들과 한참 연구에 몰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경기 계통의 무장과 두툼한 찰갑을 병행해 숱한 전장을 거치며 깨달은 것 하나는 무장과 기동력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날아오는 화살을 완벽히 막아 내자면 소찰을 일렬로 늘여 놓아 다리를 감싸 하반신 갑옷까지 더하여 전신을 무장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간 유연성이 떨어지고 무거운 무게로 거동이 불편해지며, 전환을 할 때도 문제가 발생하니 전투 수행 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고구려는 특히나 다층 구조의 찰갑으로 화살 공격에 대한 방어력이 뛰어나지만, 철편 수천 개가 갑주 한 벌을 만드는데 필요할 만큼, 사용되는 부품 수가 너무 많고 몇 겹으로 겹쳐진 철편과 가죽으로 한차례 전투를 치르면 수리, 보수, 관리에 대한 문제가 대두된다.

종일 수성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공세를 펴고 전장을 계속해서 옮겨 가는 정복 전쟁에서 군사들이 입을 찰갑은 대륙을 도모하기에는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비록 광개토태왕은 이러한 찰갑을 바탕으로 북방과 삼한을 압도하였고 또 개량한 찰갑을 삼한뿐만 아니라 괘갑(挂甲)이라는 이름으로 바다 건너 왜에도 전래시키며 철기 문물을 보급해 주었으나, 실상 장인 정신이라는 고구려 찰갑의 경우 제조하는 비용과 시간, 인력 등 여러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차후 장점보다 단점이 뚜렷했다.

‘가장 큰 문제야 단연 무게지.’

무거운 찰갑을 입고서는 장기간 전투 수행이 불가능하다. 화살을 막고자, 그러니까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전투의 효용이 극도로 떨어지게 된다. 고구려가 후기부터 공성전 몇 번만 치르면 다시 전투를 치르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갑주 수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막대한 탓이다.

“소매는 팔꿈치에 닿을 정도로, 전체 기장은 무릎까지. 일체형 이외에도 상하 분리형으로 제작할 수 있도록. 겉감은 붉은색의 융에 명주를 댄 것으로 여기에 두정을 사정하고, 안쪽에는 얇은 철판(鐵板)을 배열해 놓아 보호 효과를 높이도록 하시오.”

오로지 기억에 의존한 두정갑을 종이에 그리며 장인들에게 제작을 요청했다.

1벌 제작에 철편 수천 개가 필요한 찰갑에 비해 수백여 개의 철편으로 훨씬 가볍고 방호력마저 고구려 찰갑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철두정갑의 개발.

나는 몽골 제국이 북방과 대륙을 호령하던 시기에 입던 갑주에 고구려의 모피와 가죽을 더하여 붉은 삼족오 군단을 창설할 것이다.

* * *

“고구려가 신라를 복속하고 백제를 멸하였다?”

“그렇다고 들었사옵니다! 황제 폐하.”

소정방이 읍하자 이세민이 눈을 치켜떴다.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동맹이 아니더냐? 신라를 복속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얼마 전이거늘, 고구려가 백제를 치다니!”

토욕혼의 강토 100여 리와 비단길 점포 몇 점을 떼 주는 것으로 토번과 간신히 협상을 완료한 이세민이 이제야 북방을 어지럽히는 돌궐로 그 시선을 향할 때 동쪽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황제 폐하, 절대로 무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어서 침전으로 드시옵소서!”

어의로부터 황제의 환후가 위중하여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간언을 거듭 들은 장손무기가 외쳤지만 도저히 휴식을 취하거나 눈을 감을 상황이 아닌 이세민은 온전히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세민이 꽉 쥔 두 손을 떨었다.

“천하가 이리 어지럽거늘, 짐이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있겠는가!”

만일 자신이 눈을 감으면 연개소문과 그 아들이 대해를 건너 장안으로 달려올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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