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대해의 발판 (6)
연회를 마친 뒤 김춘추가 백제 왕실에 대한 처우 문제를 따지기 위해 한창 사비궁과 백제 사찰을 견학하는 연개소문을 찾아왔다.
표정에서조차 드러나는 김춘추의 불편한 심기를 감지한 연개소문이 주위를 둘러보며 서두를 뗐다.
“검소한 중궁의 정문 하며, 섬세한 목조건축 하며, 사찰이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는 것은 백제를 대표하는 가람 배치 형식이라 하는구려. 뭐, 가람 배치야 고구려의 소수림태왕께서 창건하신 초문사(肖門寺)나 이불란사(伊弗蘭寺), 거기다 평양에 창건한 9개의 사찰이 먼저지만 그래도 사비의 평지형 가람 배치는 독특하외다.”
“사돈께 따져 물을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말씀하시구려.”
“의자왕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압송하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비를 점령한 것도 내 아들이요, 웅진에서 의자왕을 생포한 것도 내 아들이니, 그 아가 결정할 일이 아니겠는고.”
“저의 딸자식을 죽인 원수입니다. 의자와 그 아들들을 신국으로 압송하도록 해 주십시오! 제 딸아이의 한을 풀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그럴 수 없네.”
연개소문의 결연한 대답에 김춘추가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심 의자왕을 고타소의 무덤에 데리고 가 백제 왕자들의 숨통을 끊는 것을 보여 주고 원을 달래 주길 바랐다.
“의자가 폭정을 행했다고는 하나 일국의 군주외다. 이미 제 궁궐 안에서 충분한 수모를 주었거늘, 백제를 멸하고 노획품을 얻은 것에 만족할 수는 없겠는고.”
연개소문의 눈치를 살핀 김춘추가 한발 물러섰다.
“아, 아버지…….”
뒤에는 아들 법민이 눈치껏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흑치상지를 비롯하여 고구려에 투항한 백제 출신들이 김춘추와 그 아들 법민을 대연회 이후로 사납게 째려보는 광경이 자주 목격되기도 하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김춘추 부자가 물러가자 선도해가 다가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도성을 오래 비우시어 태왕 폐하께서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실 테니까요.”
“자네 덕분에 저 능구렁이 같은 김춘추가 내 아들 옆에서 허튼짓을 못 했다고 들었으이.”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후후.”
비소를 머금은 선도해는 비록 자신이 백제 정벌에서 군사적인 책략과 전술에는 보탬이 되지 못했으나 정략적인 면모를 한껏 발휘하여 김춘추를 견제하고 남산에게 도움이 된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아리수 유역과 잉벌노현 일대에서 선도해가 시행했던 이모작으로 수확한 곡식을 들고 보급을 수행한 일도 그에게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가 들어 곤함만 있을 뿐, 삼한일통에 보탬이 되었다는 보람은 있던 셈이다.
“내가 도성으로 올라가는 것이야 그렇다 치고 남산이랑 자네가 한동안 백제 땅에 머문다는 얘기는 무엇이야? 날 홀려 돌려보낼 참이야?”
“아직 고구려에 투항하지 않은 백잔의 잔당이 도처에 깔려 있사옵니다.”
“선도해 자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질 않나?”
“그야 그 일은 중리위두대형을 따르는 무리가 할 것입니다.”
“하면 자네는 왜 남겠다는 게야?”
“땅을 얻어 정복하는 것과 이를 경영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비옥한 마한 땅의 지세를 보자니 잉벌노현에서 시행했던 모내기에 안성맞춤인 기후의 토지가 제법 있는 것 같사옵니다.”
“자네가 내정을 다시 맡겠다고?”
“이번 전쟁으로 소모한 국고는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5년 전에 도성 내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것으로 번거로운 일은 은퇴했다고 보았거늘, 자네가 삼한 땅에서 내정에 힘쓰는 일을 다시 보다니.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구만.”
“저도 모내기로 이리 재미 볼 줄은 몰랐사옵니다. 백제의 기후는 남방이라 따뜻하고 관개 배수시설의 보수와 관리가 돼 있으니 몇 가지만 손보면 이기작이 가능하겠사옵니다. 후후.”
“안시의 그 촌뜨기와 동북부의 그 호랭이도 그렇고 남산이가 참 여러 사람을 바꿨구만.”
삼국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마한 땅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백제에는 고구려와 신라와 다르게 나름 최신 관개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덕분에 자연스레 모내기를 실시하기 가장 최적의 환경 상태가 조성돼 있었다. 늘 재물을 불리는 것으로 재미를 보았던 선도해는 망나니 주인의 아들 덕분에 곡식을 배로 불려 곳간에 채우는 재미를 느꼈다.
“그보다 서토의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서토의 소식이라니?”
서토라는 말에 연개소문의 귀가 쫑긋 섰다.
“백강에 들어온 상인들이 말하길, 당나라 황제가 대명궁의 조회를 보름 가까이 파했다 합니다. 아무래도 이세민의 신변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게 아니겠습니까?”
* * *
웅진에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지 달포가 지났다. 연개소문을 따라 평양으로 압송될 백제인 3천여 명이 결정되었다.
대연회에서 당하에 앉아 당상에 앉은 승전국의 핵심 인물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따른 의자왕과 은고를 비롯하여 여기에는 그 기막힌 광경을 보고 통곡한 백제 군신들과 아래 가솔들이 포함돼 있었다.
의자왕에게 연민을 느끼는 군신들이라면 능히 부흥 운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연관된 이들을 모두 추려 선발하였다.
“고작 3천 가지고 되겠느냐? 사비에 남은 백제인이 5만에 육박하고 탕정군과 남해의 백제 세력이 우리의 항복 권유에 답하지 않고 있거늘 내 군사가 돌아가면 백제 땅의 치안이 유지되겠느냐 말이다.”
나름 고르고 골라 제법 많은 수를 추렸다고 생각했는데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실상 나라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연개소문이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만약의 사태를 두고 그리 말하는 것일 터다.
“삼한도행군 가운데 아버님의 중앙군 소속인 청룡부대와 말갈부대가 빠지고 나면 부상병을 제외하고 남은 군사는 삼기군 2만과 삼한군 4천 남짓 정도입니다.”
“사비야 그 병력만으로 통제가 가능하겠지. 하나 남은 백제 지역에 대한 수습은 어쩔 것이야?”
“제게는 신라군과 가야군이 있습니다.”
“김춘추가 백제가 멸하였으니 신라 군사를 물리겠다 하지 않겠느냐?”
연개소문의 우려는 이미 내가 염두에 둔 일이었다. 신라군 2만이 중앙군과 함께 일제히 빠지면 백제 지역에 대한 통제가 무척이나 어려워질 전망이다. 그렇다고 연개소문의 군사를 계속해서 삼한 지역에 묶어 두기에는 국력 소모와 도성의 방비라는 두 가지 측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세 가지 연유로 그 일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냐?”
“첫째 연유는 아직 도처에 무장한 백제군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시 상황에서 신라군에 대한 전시 작전 통제권은 제게 있으며 장인으로부터 약조를 받아 냈습니다. 둘째는 백제의 잔당들이 남아 있는 한 신라 역시 마음 편히 군을 물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백제왕을 모욕 준 장인과 처남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요. 셋째는 이성산성과 당항성을 비롯한 아리수 남쪽에 고립된 신라 영토에 대한 길목은 여전히 우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에 대한 안전과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서 신라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하구나! 거기까지 생각을 해 두다니. 하나 그래도 3천은 너무 적다.”
연개소문이 칭찬을 하다가 대뜸 압송할 백제인 명단표를 던지며 불만을 내비쳤다.
그 불만 이유를 대강 알 것도 같다. 노동력이 곧 자산이며 국력인 이 고대 시대에서 노동력으로 쓸 백제인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부하들에게 포상으로 줄 백제인과 노예로 부릴 머릿수겠지만, 이 고생 저 고생을 한 것에 비해 너무 적은 수라는 것. 그마저도 지배층이 대부분이라 노동력으로 부릴 인구는 1천도 안 될 것이다.
“3천을 추려 바다로 더 보내겠습니다.”
“그것도 너무 적다. 먼저 1만을 보내고 다음번에는 2만을 나누어 보내거라. 그리해야 네가 백제 땅을 다스리기에도 편할 것이니.”
연개소문의 닦달이 커졌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귀족들에게 보일 연개소문 개인의 체면을 위한 부분도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본래 역사의 소정방은 백제를 멸하고 백제인 1만 2천여 명을 추려 장안으로 압송했고, 고구려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고국원왕 당시, 수도인 환도성이 무너지고 태후와 왕비를 비롯한 5만이 포로가 되어 전연으로 끌려가 버렸으니, 정복 전쟁 이후 후환이 될 인구를 감축하는 것은 고대 시대의 거의 필연과도 같은 정책 방향이었다.
그 아픔을 아는 광개토태왕은 같은 언어로 통하는 백제를 멸하는 것에 상당한 주저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광개토태왕은 백제 수도인 한성을 무너뜨리고도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았다. 그곳을 고구려가 온전히 점령할 때 한강에 거주하는 백제 백성 수만을 북으로 압송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강에 거주하는 백제인과 마한 땅에서 고구려를 노리는 백제군이 서로 내통하여 안과 밖으로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을 테니까. 전연의 공격으로 수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던 고구려의 아픔을 부여에 같이 뿌리를 두고 있는 백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연개소문은 기왕 일을 벌였으니 백제 땅을 원활히 통치하고 부흥 세력의 뿌리를 뽑고자 노동력으로 부릴 백제 백성 수만을 끌고 가자고 주장하는 것이고.
“아버님, 제가 한동안 백제에 남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뭐냐?”
“백제를 대해의 발판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백제를 대해의 발판으로?”
“그 옛날 백제의 어라하들은 이 땅을 발판으로 대륙을 도모하였습니다. 요서 백제와 대륙 백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바로 이곳입니다. 한데 백제의 유능한 인재와 백성들을 전부 북으로 보낸다면 이 비옥한 땅은 황폐해질 것입니다.”
“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고구려에 복속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내 듣기로 왜에는 부여풍을 비롯한 백제의 핏줄들이 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들이 이곳의 백제인들과 내통하여 일을 꾸민다면 무척이나 번거로워질 게야.”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연개소문은 이미 대외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당나라나 대륙 쪽에만 관심을 가진 줄만 알았더니, 내가 삼한일통을 언급했을 때부터 대륙 이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제가 남겠다는 겁니다. 의자왕은 5만의 사비 백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도주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대연회가 열리는 그날 사비의 모든 백성이 알게 되었으니 마한의 백성들이 백제에 대한 미련을 얼마나 가지고 있겠습니까?”
서동요가 서라벌에서 울려 퍼졌고, 요동요가 요동 땅에 울렸다면, 해동증자 의자왕을 비난하는 해동요가 오늘날 사비에 널리 퍼졌다.
“어라하께서 우릴 버리시다니, 그게 참말이었다냐?”
“에잇, 퉤! 그것도 모르고 괜히 울적했구먼.”
“아따, 어라하가 요부를 가까이 두고 사치와 향락에만 그리 빠졌으니 나라가 이리 망한 게지.”
학문과 도덕이 뛰어난 해동증자가 총기를 잃고 간사한 요부의 말을 들어 충신들을 해하고 궁궐과 백제 백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이야기를 짤막하게 노래로 만들어 사비와 웅진 일대에 고의적으로 퍼뜨렸다. 큰 전쟁으로 궁핍해진 아이들에게 육포와 마를 건네주는 것으로, 망국의 슬픔을 나누려는 백제 여론은 아주 손쉽게 뒤집혔다.
“아무리 그래도 신라는 너무하구먼.”
“치사하게 저 어비아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고구려를 꾀어 오다니.”
그 계획대로 압송당하는 의자왕과 은고를 손가락질하는 백제 백성이 늘기 시작했고, 그 틈 사이로 신라의 김춘추 부자가 백제 왕자들에게 수모를 주어 보복했다는 노래 구절 한 줄을 더 넣어 주는 것만으로 신라 세력에 대한 반감까지도 확실하게 세워졌다.
백제 민심을 확고히 고구려 쪽으로 묶어 두기 위한 꼼수를 부렸음을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남산이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구나.”
이윽고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포로들을 이끌고 사비성 북문으로 향하는 도중에 민심을 읽은 연개소문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백제가 그 옛적과 같이 대륙으로 가는 발판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의 인재와 노동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를 이해해 준 연개소문을 정중히 배웅하였고, 뒤에 함께 배웅한 부여융과 백제 태학사의 관료들이 저마다 눈치를 살피면서 내게 물었다.
“참말로 저희는 사비에 남아도 되는 것입니까?”
“구, 궁에서 계속 연구를 해도 되는 것입니까요?”
“비단이니, 모피니 저희가 뭘 잘했다고 이리 귀한 것을 주시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구먼요.”
고구려와 더불어 대륙으로 갈 백제의 인재들이 자신들이 갈리고 또 갈릴 것을 알기나 하는 건지 무척이나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주공, 흥수 어르신을 데려왔습니다.”
때마침 흑치상지가 성충의 둘도 없는 동무이자 귀양 간 백제의 내법좌평이었던 사내를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