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대해의 발판 (5)
강렬한 빛살이 비치는 강물이 첨벙였다.
번쩍이는 황칠갑주를 입은 연개소문이 튼실한 군마와 함께 강을 도하해 내게 다가왔다.
“장하구나, 참으로 장해!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더니 벌써 내 아들이 제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지킬 장부가 됐구나. 나는 오늘이 아주 자랑스럽다.”
이적의 수급을 베어 보냈을 때보다 더한 연개소문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좋은 소리에 꽤나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한다는 말이 영 허언은 아닌가 보다.
평양 내성 주작문에서 출정하여 마목현 문경새재를 넘어 신라의 항복을 받아 내고, 탄현을 거쳐 백제의 항복을 받기까지의 강행군.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행이었는데 마침내 그 갈무리가 이루어진 보답이었다.
그 끝이 백제의 마지막 군주인 의자왕이 최후의 항전을 결심했던 웅진에서 배신자 예식진의 손에 끌려 나와 연개소문과 김춘추에게 백제주를 따라 올리는 굴욕적인 광경이라는 거지만 어차피 통일 전쟁에서 한번은 치러야 할 역사였다.
이 고생과 망국의 치욕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폐주(廢主)는 술을 한 잔 더 따라 올리거라.”
한편 눈에 강한 독기를 품은 김춘추가 사비궁에서 기다리는 걸 마다하고 웅진성에서 거의 끌려 나오다시피 해 바닥에 꿇어 앉은 의자왕에게 몇 차례씩 술잔을 따르라 굴욕을 주었다.
‘의자왕이 불쌍하다고 여겨질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런 모습을 보니 좀 딱하군.’
그래 봤자 저런 군주를 위해 죽은 계백만 하지는 못하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는 했다.
“폐주(廢主)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술잔을 더 채우란 말이다!”
원래라면 지금쯤 죽은 장녀 고타소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의자왕에게 더한 굴욕을 주었을 터인데 그나마 옆에 연개소문과 선도해가 붙어 있어서 저 정도로 절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태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 비슷한 처지의 인물이 내 옆에 한 사람 더 있다는 걸 잠시 깜빡했다.
“태자가 살아 있습니까?”
나는 의자왕을 조종하던 한 중년 여인으로부터 그런 물음을 들었다. 사비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대부인 은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짙은 주름과 흙먼지로 가득한 복장에 시종조차 따르지 않은 처량한 모습이다. 보통 망국의 왕족이라도 그 아랫사람 몇몇은 충성을 다하길 마련인데 은고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나 홀로 예식진의 수하들에게 끌려 나왔다.
“사비궁에서 그 어미와 죄인이 된 아비를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대답하며 옆에 있는 옥소에게 그녀의 호송을 맡겼다. 명색이 백제 마지막 황후이니 적당히 예우를 해 주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은고는 백제 멸망의 원흉이지만 그 덕택에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부분도 컸다.
부여효를 백제의 다음 어라하로 삼고자 하는 은고의 야망을 이용하여 의자왕의 친위 정변을 부추기고 백제의 멸망을 앞당겼으니까.
은고에게 진귀한 상품들을 진상하는 백제 상인들을 포섭하여 천하대세가 당나라에 있지 않고 고구려에 있음을 흘린 적도 있으니 당나라 천자 대신 고구려 태왕으로부터 백제 새 태자 책봉서를 얻고자 안간힘을 쓰는 은고를 통제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은고가 아니었다면 삼한을 일통하기까지 본래 역사만큼의 시일이 더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나라를 상대로 북방과 요서라는 광활한 전선을 두고 10만 군사를 일으켜 삼국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결단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니.
대야성 전투의 1등 공신 윤충을 남만으로 귀양 보내고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이 비로소 삼한일통의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되었으니까.
“웅진은 옛 수도라더니 산세만 가득해 궁궐도 작고 그리 볼 것이 없구나. 사비성으로 가자. 내 죄인의 안내를 받아 남부여의 수도 구경을 좀 해야겠구나.”
큰 싸움 없이 웅진성 점령을 마치고 짤막하게 성내를 둘러본 연개소문이 이번에는 의자왕을 앞세워 사비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대단하시외다. 중리위두대형, 그 먼 요서 땅에서 당군과 싸우더니 이제는 이 좁고 산으로 가득한 삼한 땅에서 또 한 건 해냈구려.”
“김유신과 계백을 꺾은 것이 우연이 아님을 소장들은 아옵니다.”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의외인 것은 그 뒤를 따르는 무리 중에 연타인을 비롯하여 고연수와 고혜진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었다. 한때 연개소문의 다음 혹은 그다음 가는 군부의 실세들이었다.
이세민이 요동에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양만춘과 요동 세력 다음으로 지방에서 독자적인 군부 세력을 구축하였다. 연개소문과 제대로 된 융합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보이는 군부의 인물들이 이제는 연개소문의 뒤를 따르며 그의 지시를 받고 있으니 고구려 군부에 대한 온전한 통솔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희 예씨 가문은 앞으로 고구려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흐흐.”
의자왕을 연개소문과 김춘추 앞에 꿇린 예식진이 상금을 기대하는 눈치로 살랑이며 내게 인사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고구려의 예식진 가문이 될 군부의 무리가 연개소문을 보좌하고 있으니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 낸 것만큼의 쾌거라 할 수 있겠다.
“지난 연회는 맛보기였고 오늘부터가 진짜 연회다!”
백강을 따라 사비로 돌아가는 길 9리 앞에 부소산성이 보이자 설인귀가 입맛을 다시며 그리 소리쳤다.
사비성을 함락하고 의자왕을 놓친 이유로 술 한잔 가볍게 삼기군과 회포만 푼 설인귀가 이번 연회에서 제대로 한을 풀 요량이다.
웅진성에서 의자왕과 은고를 생포한 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연회가 사비성에서 열릴 예정임을 아는 것 같았다.
이윽고 다시 사비성에 입성하자 연개소문이 올 것을 알고 한창 연회 준비에 빠진 사내가 있었다.
“대막리지 형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을 좀 챙겨 두었습니다. 흐흐.”
뜻밖에도 흑벌무가 연회 준비를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의자왕을 생포했다는 소식이 사비에 전해지자 연수영이 서해 수호를 핑계로 백강을 떠났기 때문이다.
말이야 요동만에서 당나라 배가 포착되어 급히 돌아갔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연개소문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여 떠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때 하옥했던 연수영의 어머니도 동부가로 모시어 내가 잘 챙겨 주기도 하고 양만춘과의 문제도 해결되며 큰 갈등이야 해소된 지 오래라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앙금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역사는 바꾸어도 도무지 인물 간의 관계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수영이가 떠났다고? 내게 말도 없이 말이냐?”
저 호랑이 같은 연개소문이 누구에게 사과 같은 걸 할 사람이겠는가.
“녀석, 내 간만에 지난 일을 좀 풀려고 했더니.”
아니, 약간이라도 사과할 마음은 있었나?
연개소문의 반응에 순간 일말의 기대감이 생겼지만 화려한 춤사위를 자랑하는 백제 무용수들이 등장해 춤을 추고 사비에서의 승리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잠시 뒷전이 돼 버렸다.
사비성에서 한참 풍악 소리가 울릴 때 연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폭력적인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내 누이를 죽인 원수의 자식들!”
찰싹찰싹! 김법민이 술을 주는 척 번갈아 가며 앞에 앉힌 부여효와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고 뺨따귀를 날렸다.
비담의 존재로 한동안 서라벌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던 김법민이 사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여왕이 보냈다는 명목으로 사비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이 연회에 참석하였다.
“네놈들의 아비 때문에 대야성에서 내 누이가 무참하게 죽었다. 오늘 너희 목숨은 나의 손에 달려 있느니!”
김법민은 복수 때문에 신라가 참전하였고 자신이 사비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자 이렇게까지 국력을 쏟아부은 것에 김춘추 부자의 입김이 얼마만큼이나 작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주, 중리위두대형……!”
그 덕분에 부여효가 내게 연신 구원을 원하는 듯한 눈망울을 보이고 있다. 도비천성에서부터 고구려와 신라 가운데 누가 실세인지를 아는 눈치지만 일단은 잠시 손 놓고 있을 작정이다.
정확히는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판을 조금 더 키우려고 한다.
신라의 지배층에 의해 모욕을 당하는 백제 지배층의 모습으로 백제인들이 분개하는 것이 첫째요, 그다음으로 고구려에 귀부한 백제 출신들이 나서서 변호하는 모습으로 체면을 세우는 것.
그런 식으로 백제 세력을 흡수하겠다는 계산이 내 머릿속에서 세워졌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백제 왕자들에 대한 치욕적인 행위가 김법민의 행동과 입에서 한차례 더 벌어졌고, 내 눈치를 읽은 흑치상지가 나섰다.
“거기까지만 하시지요. 그래도 일국의 군주가 낳은 장자와 그 태자입니다. 이리 많은 사람 앞에서 그리 모욕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입 다물거라! 네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잠깐, 그러고 보니 흑치상지 너는 얼마 전까지 백제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 말에 숨을 못 쉴 만한 불편한 상황이 투항한 백제인들에까지 미쳤다.
김법민이 이글이글하게 눈을 뜨고 대표로 흑치상지를 삿대질까지 하자 내가 눈치껏 자리에서 기립했고 그 뒤를 따라 삼한도행군 소속 제장들이 하나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당황한 김춘추가 김법민을 불렀다.
“법민이 너, 경거망동하지 말고 이만 처소로 가거라. 너무 취했느니라.”
조금 전까지 백제 군신들 앞에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고 백제인들의 통곡 소리를 즐기던 김춘추가 그 아들을 자제시켰다.
같은 승자라고 다 같은 승자가 아닌 것을 아는 눈치였다.
“죄인은 들으시오.”
기다렸다는 듯 나는 연개소문과의 독대로 결정한 의자왕의 처우를 말하고자 했다.
“말씀하시오.”
내가 따라 준 술잔을 홀짝인 의자왕이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침통한 어조로 대답을 기다렸다.
“폐주는 밖으로는 고구려가 취한 가야를 탐내었고, 고구려에 충성을 맹서한 신라를 괴롭혔으며 왜를 가까이하여 바다를 어지럽히고 왜적이 내침할 구실을 주었다. 안으로는 요사스럽고 간사한 부인을 믿으니, 그 여자가 무도하여 마음대로 나라의 권력을 횡탈하고 어진 신하를 죽이니 형벌이 미치는 곳은 오직 충량에 있었다. 이에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화를 자초하였으니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기에 태왕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느니.”
나는 고개를 땅에 떨구며 묵묵히 듣는 의자왕을 향해 말을 이었다.
“죄인과 그 부인, 왕자 및 대신과 장수 87인을 평양으로 압송하여 태왕 폐하의 분부를 따르게 할 것이다.”
의자왕에 대한 처우 결정은 평양에서 진행할 예정이다. 평양이라면 연개소문이 나설 수도 있으나 자비랍시고 의자왕을 백제에 남겨 두었다간 후환의 불씨가 피어오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백제에 남겨 두는 핏줄은 좀 모자란 백제의 태자 부여효와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만으로 충분하다.
때마침 김법민에게 치욕을 당했던 두 인물은 신라에 대한 반감이 클 것이고, 부여융의 경우 호전적인 둘째 아들 부여태에 비해 온순한 성격이어서 사비성의 정문이 돌파되기도 전에 사택씨와 같은 대신들을 꼬드겨 항복을 먼저 제안했던 전례가 있었다.
그에 앞서서는 은고로부터 배척당하여 백제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 자리에서 쫓겨난 상황도 있고,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괜히 당나라가 그를 웅진도독부 도독으로 삼아 신라를 견제하고 백제 지역을 통치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백제 땅을 고구려의 이름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 삼한을 온전히 고구려로 통일하기 위한 중차대한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이 백제 땅에서 새로운 무기 개발과 함께 삼한을 통합할 내치를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