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백가제해 (9)
이튿날 아침, 광채를 내뿜는 해가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나는 정신 무장을 위해 어느 부대보다도 가장 먼저 기상을 명한 신라군 앞에 당당히 섰다.
포로가 된 백제 좌평을 이용한 어제의 조치로 풀 죽은 신라 군졸들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여태 몽롱한 얼굴들을 보니 그 머릿속은 세 번의 패배로 인하여 패배주의적인 사고로 가득 차 있어 보였다.
“큼큼…….”
옆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김문영은 왜 신라 장수인 자기가 고구려의 사령관인 내 지시와 명령에 응해야 하는지 어젯밤부터 종일 못마땅한 눈초리로 서 있을 뿐이고.
“우리가 왜 고구려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건지…….”
“누군 알겠냐마는 아직 약관도 안 된 것 같은데…….”
“헉, 그 김흠운 장군보다도 어리단 말이야?”
다 들린다, 이 시래기들.
김문영의 태도에 영향을 받은 휘하 신라 군졸들이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볼 무렵이었다.
“가, 가져왔사옵니다!”
신라 군졸 2명이 내가 명한 대로 각자 칼 1자루와 갑주 1벌을 가져와 대령했다.
새벽에 김춘추에게 부탁하여 가져온 것들이었다. 주인 없는 장수의 보검은 내가 한 손에 거머쥐었고, 그 보검으로 신라군에게 보여 주듯 피로 얼룩진 김흠운의 갑주를 가리키며 외쳤다.
“신라군은 듣거라! 너희가 백제군에게 처참히 지고 패주하던 때에 김흠운 장군과 휘하 화랑들이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홀로 적진으로 달려가 칼을 휘둘렀느니. 너희가 한가롭게 풀이 죽어 있을 군번이냐?”
말을 마치고 주변을 보자 황산벌에 드리운 고요한 새벽 아침과 적막함 속에서, 2만의 시선이 일제히 피로 물든 갑주와 지금 내가 쥐고 있으며 이제는 말라붙은 붉은 얼룩진 보검으로 향해 있었다.
이 두 가지 없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간 왜 남의 나라 어린놈이 대장 행세를 하냐며 핀잔하는 신라 군관들이 나설지 모르지만 3번의 패배를 겪고 지휘관을 잃은 신라군이 끝까지 싸운 신라인의 갑주와 보검 앞에서는 공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시 후 신라군은 김흠운의 유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깊이 숙고하는 자들과 부끄러운 나머지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자들로 나뉘었다.
“가져왔사옵니다.”
“죽은 화랑들과 낭도들의 것입니다.”
그러나 곧 피로 얼룩진 화랑들의 복장과 병장기가 수레에 실려 이곳에 이르자 재차 모든 신라군의 시선이 집중됐고 나는 이를 이용하여 다시 한번 다그쳤다.
“김흠운 장군을 따르는 어린 화랑들과 낭도들이다! 신라의 장병들은 이를 보고도 부끄럽지도 않은가!”
관창과 반굴이라는 영웅적인 인물의 희생을 이용한 사기 회복. 그걸 김흠운과 그를 따르는 화랑들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을 뿐이지만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김흠운 장군의 뒤를 따르자!”
“화랑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즈아아아!”
아아, 효과가 나오기 이전에 앞서 나를 따르는 고구려의 말객 가운데 가장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가진 이들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었다.
미리 요청한 대로 신라군 사이에서 아주 잠시 신라군 군졸로 위장한 연근행과 흑수돌이 우레와 같이 목청을 힘껏 뽑아 올렸으니까.
그들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양방향에서 거대한 메아리를 불러일으켰다.
와아아아-!
벌판에 요동치는 환성. 논산 땅에서 울릴 군가에 관창이라는 화랑의 이름 대신 흠운의 이름이 울릴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신라군의 사기가 다시 채워진 것만큼은 분명한 함성이 아침 적막을 깨뜨렸다.
“누가 죽은 화랑들의 피로 싸우겠는가!”
이를 보다 확실시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최전방에 설 신라군 부대 가운데에서 자원자를 뽑아 죽은 화랑들의 칼과 복장을 입히며 끊임없이 독려했다.
“목숨을 버리자!”
“임전무퇴! 임전무퇴!”
“김흠운 장군과 화랑들과 같이 전장에서 영예롭게 죽자!”
그 때문에 화랑들이 여전히 살아서 함께 싸우고 있다고 믿는 신라군의 함성은 벌판에서 그칠 줄을 몰랐고, 그 소리에 잠을 깬 삼한도행군이 새로 짠 편제에 맞게 속속들이 대열을 갖추며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이제 벌판을 메운 군사들이 내 명만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전군 진군하라!”
나는 신라군을 필두로 전군을 일제히 진병하여 횡령산성, 모촌리산성, 산직리산성까지 황산의 백제군 세 군영을 동시에 공격하고자 했다.
4번을 패한 김유신의 5만 군사도 필경 같은 실패를 맛보았겠지만 김흠운이 이끄는 신라군은 계백이 진을 친 산직리 본영 하나에 집중하다가 당했다.
계백이 황산의 다른 산성이 연결된 깃대봉-국사봉-귀명봉 주위의 보루에 여기저기 소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신라군의 우회를 감지하는 방식의 반원형 진을 짠 백제군 별동대가 번개와 같이 사위에서 몰아치자, 계백의 본영부터 점령하려는 신라군의 전술이 무너졌던 것.
압도적인 신라군이 백제군에게 1번도 아니고 4번씩이나 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었다.
그러니 내가 통솔하는 신라군이 계백의 본영을 뚫기 위해 진군할 때, 반원형 진을 펼치며 혼란을 유발하려는 백제군 별동대와 배후에서 위협을 가할 백제 병영을 삼한도행군이 맡아 주어야 했다.
“황산을 돌파하라!”
“진격하라!”
“화랑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걸걸중상의 선기군과 청룡부대가 충상의 안내를 따라 전방 좌측 배후에 있는 횡령산성으로, 흑치상지의 삼한부대 9천과 연근행의 말갈부대 6천이 중앙인 모촌리산성에 그리고 내가 통솔하는 신라군 2만 정병이 전방 우측 계백 본영의 산직리산성으로 진군했다.
“연을 띄워라!”
나는 일부러 황산의 백제 다른 군영과 거의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도록 신호를 보냈다. 협력과 교란이 불가능해지는 동시다발적인 공격은 요동의 천리장성을 무너뜨리려 했던 이세민의 전술을 통해 지겹도록 학습한 방식이었다.
보급부대와 부상병, 온전히 기마전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투입할 조랑말 부대를 제외한 전병이 황산의 벌판을 뒤덮었다.
전장에서 수를 다 보여 주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순간이 있다지만, 황산에서 그나마 험지에 올라 버티고 있는 백제군을 뚫자면 한 방에 힘을 쏟아야 했다. 벌판이라는 넓은 전장을 두고 힘을 아낄 필요도 없었기에 나는 북과 깃발을 활용하여 거침없이 진격을 명했다.
두둥! 투둥!
전고 소리와 함께 힘찬 물살이 휩쓸듯 세 방면으로 수만의 군사가 나아갔다.
그 결정에 대한 결과는 내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선기군이 백제군을 무너뜨렸다!”
“청룡부대의 깃발이 올랐다!”
계백의 본영인 산직리산성과 그 본영에 인접한 모촌리산성에서 치러지고 있는 백제군의 강렬한 저항과 다르게 교전 1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기마전을 펼친 선기군이 방원형 진을 짠 백제군 별동대를 격파하였고 횡령산성에 가장 먼저 청룡부대의 깃발이 걸렸다.
멀리 걸걸중상이 파란색 연을 띄웠다. 계백이 설치한 세 군영 중 하나를 점령했다는 신호였다.
‘보루에 배치한 날쌘 별동대만이 성가셨을 뿐, 좌측의 군영이 세 군영 중 가장 허술했구나.’
그 연을 보며 그리 생각이 들었다.
계백이 한정된 병력으로 세 군영에 병사를 고르게 배치할 수 없으니 가장 거리가 떨어진 횡령산성의 방비가 보이는 것과 다르게 가장 떨어졌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횡령산성으로 진군한 걸걸중상에게 2만의 군사를 맡긴 성과일 것이고.
“창을 들어라! 적들을 우리의 뒤로 보내지 마라!”
한편 최전방에서 진땀을 흘리는 계백이 끝까지 백제군을 독려하며 저항했다. 이미 군영 하나가 무너졌고, 선기군이 말을 몰고 원을 그리듯 삥 돌아 백제군의 배후를 칠 것을 알면서도 계백은 묵묵히 자리에 남아 백제군을 독려하며 칼과 창을 양손에서 놓지 않았다.
“계백 장군의 뒤를 따르자!”
“영예롭게 죽음을 맞이하자!”
그런 계백의 뒤를 따르는 백제군은 쓰러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부대! 다음 부대, 다음 부대 앞으로!”
장렬히 싸우는 백제군에 대항해 나는 신라군 부대의 차륜을 쉴 새 없이 고무하며 몰아쳤다. 새벽부터 고생한 보람 덕분에 다행히 신라군 부대 가운데 주저하는 부대가 없었다.
죽은 화랑들의 무장을 갖추길 스스로 자원한 정신 무장이 잘된 부대도 있었으며, 백제군의 대열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다음 부대 앞으로!”
앞 부대가 피로해하자 물렸고, 나는 다시 한번 외쳤다.
계백의 본영을 향해 2만의 신라군을 각 2천씩 10부대로 나누어 반 시간씩 차륜전을 돌렸고, 그 7번째 차륜이 진격할 때에야 비로소 백제군의 목책이 아스러지고 망루가 무너지며 대열이 흐트러졌고, 백제 본영 내에 하나둘 신라군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신라군의 힘만으로 뚫었다고 생각했으나 아쉽게도 착각이었다.
“작은 막리지!”
벌써 모촌리산성을 초토화한 뒤 기마로 한 바퀴 돌아 계백 본영의 후미를 친 걸걸중상이 나를 맞이하러 나왔기 때문이다.
능수능란하게 기마 궁술을 선보이는 선기군이 우회하며 참전하자 장렬했던 전투는 삽시간에 막을 내렸다.
“쏴라!”
걸걸중상의 명과 함께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세례와 포위 공세에 백제 기병들이 몸부림치며 고슴도치가 되기 바빴고, 그런 화살을 피하고자 백제 보병의 대열들은 엉키며 흐트러졌다.
“크…….”
다시 시선을 돌리자 어느덧 계백의 전신에는 수십 발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계백이 몸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결사하자 선기군의 화살 세례에 이어 신라 노수들이 집중적으로 사격을 개시한 뒤였다.
“백제의 장수 상영과 수하 수십이 투항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그때 연근행이 다가와 상영을 비롯한 백제 포로들을 끌고 왔다. 백제군의 대열이 모두 무너지자 항복한 모양이다.
“멈춰라.”
나는 힘줄이 끊어지고 팔을 올리지 못하는 계백을 보며 즉시 사격을 중지하라 명했다.
“아…….”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향해 뭔가를 말하려는 백제의 마지막 무신(武臣).
복식호흡 후에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간 나는 내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남은 계백의 유언을 들어 주었다.
* * *
“의직 장군이 분전역투의 각오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옵니다! 흐흑.”
기벌포 방어선이 무너지고 탄현이 돌파당한 나머지 좌불안석인 의자왕이 좀처럼 어좌에 앉지 못하고 승전보를 기다리던 때에 국변성의 절망적인 보고가 어전 내에 울렸다.
사색이 된 의자왕이 소리쳤다.
“계백은! 계백은 어찌 되었다더냐?”
이제 의자왕에게 남은 기댈 곳은 하나뿐이었다.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서 용사 5천과 함께 결사하여 2만의 신라군을 상대로 3번을 이기었으나…….”
“계백이 이겼단 말이냐?”
낯빛이 밝아진 의자왕이 그 소식에 국변성의 말을 끊었다.
“그것이… 연남산이 이끄는 고구려 대군이 이르러 총공세를 펼치자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옆에서 사타천복이 어두운 얼굴로 은고의 눈치를 보며 그리 아뢰자 의자왕이 힘이 풀린 듯 철퍼덕 어좌에 주저앉았다.
그때 은고가 고함쳤다.
“태자는! 태자의 생사는 대체 어찌 되었단 말이오?!”
그런 의자왕의 심기보다 은고는 태자의 생사가 먼저였다.
* * *
“빨리도 오는구나.”
연남산과 삼한도행군이 황산벌을 거쳐 꽃이 지는 큰 바위로 흘러 들어가는 백강에 이르자 연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