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261화 (261/335)

261화 백가제해 (8)

“아니 됩니다, 춘추 공. 오로지 여주의 명을 받드는 우리 군이 연남산의 통솔을 받아야 한다니요?”

“받지 않으면 어찌하시겠소? 낭당대감은 죽었고 김문영 장군은 지휘관을 지키지 못한 책임이 있으니 사기가 꺾인 신라 장병들을 대체 누가 지휘한단 말이오?”

“하, 하오나!”

말을 잇지 못하는 김문영은 김춘추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애초에 김유신 장군이 아닌 이상, 2만이 넘는 신라 정병을 통솔할 장수는 신라 내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김흠순 장군 정도가 적임자였으나 이성산성에서 고구려에 저항했다는 이유 하나로 서라벌에 소환되어 좌천되었다.

-백제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으니 이미 백제군과 세 차례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는 신라군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장인께서는 신라군에 대한 모든 전시 작전 통제권을 제게 주십시오.

연남산이 승리를 위해 그리 신라군의 지휘권을 요구했고 뾰족한 수가 없던 김춘추는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내가 연개소문과 사돈이라니.’

김춘추도 내심 이런 상황을 바라진 않았으나 어찌 됐건 연개소문 가문과 사돈을 맺었고 그 막내아들인 연남산은 자신의 사위가 되었다. 믿고 맡길 명분이 섰으며 백제를 멸한다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선 고구려의 도움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사비를 점령할 때까지, 아니 이 황산벌에서 백제군을 쓸어버리고 승전고를 울릴 때까지만이라도 부디 협조하시오. 떨어진 군의 사기부터 먼저 진작해야 하니, 한번 믿고 맡겨 봅시다.”

무엇보다 대망의 사비성 함락이 목전에 와 있었다. 김문영을 포함한 일부 무장이 불만을 품는다고 해도 김춘추는 사비성의 성문을 열 때까지는 연남산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었다.

김춘추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타소의 한을 풀어 줄 날이 머지않았다.

* * *

적장 김흠운을 베었다는 기쁨은 잠시, 서로 다른 색상의 삼한을 상징하는 기와 그 사이사이에 붉게 흩날리는 삼족오 깃발을 목도한 계백은 그토록 아니길 바랐던 고구려군과 황혼에 물드는 아득한 벌판 하나를 사이로 대치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주력 부대는 어라하가 예측한 북쪽이 아니라 동쪽의 탄현과 서해 수로였음이 눈앞에서 확인되는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 옛날 바다를 누비던 백제가 바다를 내주고, 수세에 대처하는 법을 잃은 대가는 이처럼 혹독했다.

‘내 명줄이 아무리 길어도 내일까지가 고작이구나.’

도비천성이 함락되고 고구려의 대병이 신라군의 진군로를 그대로 쫓아 무혈로 탄현을 넘었다는 소식에 계백은 진실로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다.

“고, 고구려가 황산벌까지 왔당께!”

“신라가 고구려에 속복한 게 소문이 아니고 참말이었어?”

“거, 참말이고말고. 새까맣게도 몰려왔구먼. 인당 5명씩 상대해도 못 미치지.”

이를 바라보는 백제군의 표정은 그런 계백의 심경을 반영이라도 하듯 신라군과의 일전에서 거둔 승리를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침울함에 빠졌다.

“무려 4만의 군사라 합니다. 신라 놈들까지 더한다면 아군의 10배가 넘을 것입니다! 계백 장군.”

인근 모촌리 토성의 병영을 맡은 부관 상영이 연남산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총 규모를 알리자 계백 주위에서 잇달아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신라 장수의 목을 베고 이제 겨우 해볼 만하겠다는 백제군의 사기가 그대로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5천 결사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군의 사기에 영향을 끼칠 변수를 더는 허락할 수 없던 계백이 좌우를 번갈아 노려보며 다그쳤다.

“아군의 4배가 넘는 신라군이 탄현을 넘었다고 들었을 때,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온 전장이다. 그 배가 넘는 고구려가 신라 군사와 합류했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각자 맡은 위치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국은에 보답하도록 하자.”

짧게 말을 마치고 막사를 나선 계백은 마찬가지로 사기가 떨어진 군사를 다독이기 위해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병영을 순시하며 묵묵히 독려했다.

“계백 장군께서 적장의 목을 베었당께!”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우리가 신라 놈들에게 승리했다!”

“계백 장군과 함께 싸우자! 이기자!”

계백이 지나가는 목책마다 백제군의 눈빛이 바뀌고, 함성이 터지며 떨어졌던 사기가 다시 충천하는 듯싶었으나, 전방을 가리키는 군졸의 한마디가 흐름을 끊었다.

“계백 장군! 저기 좌평께서……!”

고구려군의 포로가 된 좌평 충상이 얼굴을 비치면서 계백의 독려 효과가 곧 무력화되었다.

“근데 흑치 가문의 기가 왜 고구려 깃발이랑 같이 걸려 있는 거여?”

“좌, 좌평께서도 저기 계시는데?”

고위 백제인 포로뿐만 아니라 달솔의 아들 흑치상지, 좌평 임자와 같은 백제 출신들이 고구려 깃발 아래 속속 모습을 드러낸 여파로 계백의 각 병영에는 혼란함이 엄습했다.

와아아아!

한편 지휘관을 잃은 신라군은 연남산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건지 조금 전 패배를 거의 잊다시피 한 듯 백제 진영을 향해 목청껏 함성을 내지르며 북을 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계백이 동요하는 백제군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제법이로구나. 과연 전장을 많이 지휘한 장수다워.’

그 광경에 의도를 읽은 계백은 오히려 감탄했다. 가야에서 만난 연개소문의 그 모험심 가득한 막내아들이 어느덧 앳된 티를 벗고 진정한 장수로서의 면모로 자신의 앞에 섰다. 성충과 흥수가 연개소문의 뒤를 이을 고구려의 재상으로 점찍었으며 계백 역시 기대감과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요하와 삼한 땅을 횡단하는 연남산을 제법 오래 지켜보았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수군을 이끄는 놀라운 재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기마 전술과 진법 운용으로 당나라 명장 이적을 임유관에서 꺾었다. 이것이 그저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듯 같은 기마 전술을 활용하여 공산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노익장 김유신을 이겼다.

백제의 난적 김유신의 죽음은 곧 삼국의 균형이 깨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문인 관직이었던 계백은 성충과 흥수의 식견을 배웠다. 그리하여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 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이 깨지는 수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활을 거두어라. 내게 할 얘기가 있는 듯하니.”

계속해서 이곳으로 접근하는 연남산이 불과 150보, 100보 거리까지 다가오면서 목책에 선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겨누었으나 계백이 제지했다. 다른 무기나 병장기는 보이지 않고 오직 방패만을 든 군졸들만 열댓 명이 뒤를 쫓고 있을 따름이었다. 싸우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필경 연남산이 자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으리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층 성숙히 자랐으며 더 또렷하고 날렵한 눈빛을 한 연남산이 변성기에 들어선 굵은 목소리로 정중히 인사했다.

“장군께서 무탈하신 모습을 뵈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이게 몇 년 만에 뵙는 건지 세월이 참 빠릅니다.”

전장에서 한가롭게 인사나 주고받을 일이 아니기에 계백이 즉시 미간을 좁혔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려. 내 고구려가 백제의 등에 칼을 꽂을 것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황산강에서 그대의 피를 뿌렸을 것이오.”

연남산이 백제군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려 했으니, 역으로 돌려주어야겠다고 여긴 계백이었다. 대의명분만큼 백제군의 사기를 다시 끌어올리기 안성맞춤인 것이 없으니.

“그럼 그렇지. 고구려든 신라든 다 똑같은 놈들이여!”

“다 우리 백제 등에 칼 꽂을 생각만 하는 나라당께.”

계백의 의도대로 바로 뒤의 군사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와 신라가 같은 족속이라는 것만큼 군의 사기를 올릴 것이 없었다.

그때 기선 제압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연남산이 곧바로 화답했다.

“삼한도행군에 투항한 백제의 백성들을 비롯하여 두 좌평 충상과 임자가 이르길, 백제의 국정이 문란하고 백성의 원망이 끊이질 않으니 능히 삼한도행군으로 하여 백제 백성을 위로하고 죄지은 사람을 치라 청하였습니다. 은혜롭고 인자하신 태왕 폐하의 명을 받드는 제가 이들의 고충을 어찌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리겠습니까? 삼한도행군이 황산에 다다른 연유는 오직 백제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위선 떨지 마시구려. 그자들은 그저 백제의 반역자들일 뿐이오!”

성난 얼굴의 계백이 갑자기 역정을 냈고, 연남산 옆에 선 충상과 흑치상지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이보시오! 계백 장군. 내 이런 꼴로 말을 걸어 참으로 민망할 따름이나 아무리 생각해도 백제에는 더는 희망이 없소이다. 조정은 어라하와 황후의 눈치만 보아야 하고 황후의 사람이 아니면 인사 배정에는 늘 배제를 당하니, 정사암에서 늘 바른말만 하는 성충과 흥수와 같은 유능한 신하가 내쳐지는 게 아니겠소? 흠흠. 내가 굳이 여기서 더 더하지 않더라도 계백 장군이 가장 잘 아실 거라 믿소!”

“저는 흑치상지라 합니다. 말주변이 없어 송구합니다만, 소장은 오래전부터 장군의 활약상을 소식으로 접하며 깊이 흠모하였습니다. 삼한도행군대총관께서는 고구려가 출신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함만으로 누구든지 말객으로 중히 쓰며 가장 높은 지위를 내리는 나라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여씨나 사택씨가 아니라면 좌평이 되지 못하고 백제 땅에서 대대로 달솔이나 역임해야 할 제가 고구려의 말객이 된 까닭입니다!”

웅성웅성. 계백이 달변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던 작전은 곧 실패로 돌아갔다. 고구려 깃발 아래에 선 백제인들이 제 스스로 백제 실정을 꺼내자 군사들의 마음이 어지럽혀졌다.

“시끄럽다! 저들은 모두 나라를 배반한 역적들이니 그 음흉한 세 치 혀에 귀를 기울일 필요 없다. 궁수들은 무얼 하느냐? 어서 저 역적들을 쏴라!”

슈슈슝!

계백이 부랴부랴 궁수들에게 명하여 흑치상지와 충상을 사살하라 명하였으나 이미 연남산 뒤에서 대기 중인 강철 장방패를 든 5인의 군졸이 일사불란하게 벽처럼 층을 쌓으며 막았고, 계백이 하는 수 없이 화살을 아끼기 위해 궁수들을 물렸다.

방패 사이로 얼굴을 내민 연남산이 입을 열었다.

“장군을 설득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군요.”

“이만 돌아가시오! 나는 백제의 장수로서 백제의 깃발 아래 최후까지 함께할 것이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하면 내 가기 전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하시오.”

계백의 응답에 잠시 허공을 쳐다본 연남산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식솔들은 어찌 하셨습니까?”

* * *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그나마 바뀐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내 아내가 나를 책망하길,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뒈지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뒈지는 것이여” 하고 일갈하니 내 부끄러워 베지 못하였소.

그 결연한 계백이 황산벌을 떠나기 직전에 식솔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유신이 이끄는 10배도 아니고 이번에는 4배이니, 해볼 만하다는 계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남긴 서찰 덕분이었을까.

결과적으로 내가 신라군을 앞서 보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계백의 후손이 어쩌어찌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삼한을 일통할 매우 가까운 미래인 고구려의 중요한 인재가 될지 모를 계백의 후손들을 말이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백제의 그 어느 장수보다 주공의 손을 잡았으면 하는 인물이 계백 장군이셨는데, 이리되다니.”

본영으로 돌아가는 길에 흑치상지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 말에 눈길도 주지 않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행동과 다르게 실은 흑치상지와 같은 마음이나 때로는 말로 설득할 수 없는 상황이 있는 법임을 알기에. 자신의 신념과 지조를 목숨보다 더 아끼는 현대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인물들이 있으니 말이다.

“작은 막리지, 소장들에게 말도 없이 어딜 가셨습니까?”

“적의 화살이라도 맞으셨으면 어쩔 뻔하였습니까요?”

군영에 돌아오자 걸걸중상과 연근행이 옥소를 대신하여 왜 쓸데없이 백제 군영에 그리 가깝게 접근했냐며 타박하였다. 김춘추도 약간은 못 미더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기가 처진 신라군을 독려하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작전은 성공하였고 나는 무탈하니 너희는 돌아가 푹 쉬거라. 내일 해가 뜨면 총공세를 펼칠 것이다.”

내가 적당히 둘러대기 위해 그리 말했다.

사실 김유신이 당한 4번의 패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패배주의로 가득한 신라군의 정신 무장부터 제대로 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백제 포로들을 앞세워 일부러 더 소리를 지르고 북을 치라 이른 것이고.

여기서 3번을 지고 지휘관을 잃었으나 내가 도비천성에서 잡은 백제 지휘관 포로를 이곳까지 끌고 오면서 조금은 살아난 신라군이었다.

여기서 삼한도행군 역시 절반도 되지 않는 계백의 결사대에게 당한 신라군의 패전을 수시로 떠올리게 하며 방심하지 않게 하려 한 목적도 깔려 있었다.

“작은 막리지께서 신라군만을 통솔하시겠다고요?”

“왜? 2만이라는 숫자는 너무 부담이 되느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날 밤 편제 점검을 마친 나는 걸걸중상에게 선기군 8천을 기본으로 청룡부대 1만과 보급부대 3천까지 별도로 맡기면서 인계받은 신라군 통솔에 전념하고자 했다.

다시없을 기회에 대백제 정벌이라는 목적으로 징발된 신라 정병 2만을 통솔하여 삼한도행군에 편입시킨다면 신라의 군권을 단번에 손아귀에 쥐는 셈이었다.

그러니 계백이 있는 산직리 본영은 내가 지휘하는 신라군만으로 공략할 생각이며, 황산벌의 결사대가 모두 쓰러질 때 신라군을 온전히 내 수중에 넣게 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