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백가제해 (2)
“태워라! 한 점도 남김없이 모조리 무너뜨려라!”
선발대를 제외하고 2천에서 2천5백의 군사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탄현 고개 진입에 성공한 김흠운은 백제군이 설치한 방어용 목책과 망루를 마구잡이로 불 지르며 백제의 방어 체계를 빠짐없이 차례차례 파괴했다.
숯 고개 곳곳에 신라군의 깃발이 펄럭이기에 앞서, 선기군의 유인책에 휘말려 탄현에 배치된 백제군의 4, 5할이 도비천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미 괴멸당하였고, 나머지 백제 수비군도 신라군 보기(步騎) 4천을 이끈 선발대 김문영의 군세에 온통 집중하다가 잇달아 고개에 침투한 신라군의 공세에 무너졌다.
약 150년 전 동성왕 시절부터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꾸준히 망루와 목책을 설치하며 지켜 온 탄현이었으나, 선왕인 무왕과 현왕인 의자왕 대에 이르러 백제가 추풍령 전선을 사이에 두고 신라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계속되면서 정작 사비로 향하는 핵심 요충지인 탄현의 방비와 경계 태세는 약화되었다.
오히려 추풍령 전선 내 백제 성들의 원병이 넘어가는 통로 고개 역할을 주로 수행하면서 백제군 사이에 요충지 방어에 대한 개념이 무색해졌다.
“이랴! 이랴!”
달솔 상영이 탄현에 침투한 신라군의 동태를 살피고자 육중한 기병들을 몰고 힘겹게 고개를 올라왔으나 그들이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탄현 고개의 7할 이상에 불길이 치솟으며 주요 고지가 신라군의 수중에 넘어간 뒤였다.
“신라군이 대체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올라왔단 말이냐? 어서 막아랏!”
깜짝 놀란 상영이 급히 중무장한 군사들에 지시하며 신라군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신라군은 탄현의 백제군으로 하여금 도비천성으로 가지 못하도록 아예 내려오지 못하게 소극적인 진형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고개를 넘고자 전 군세를 이곳에 집중한 진용이었다. 탄현의 수비군이 이미 분쇄당하거나 도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영이 거느린 2천의 기병만으로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챙챙! 푸욱! 슈슉!
보기와 장창단, 쇠뇌 등 온갖 휘황찬란한 무기로 총공세를 펼치는 신라군의 위협에 주요 고지와 성보도 이미 신라군에 빼앗겼으며 푹푹 가라앉은 고개는 기병이 자유롭게 날뛸 말한 지형도 아니었다.
“화랑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싸우라!”
어린 시절 이름을 남기고 죽어 간 옛 화랑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줄곧 눈물을 흘렸던 김흠운은 그들처럼 싸우고 명예롭게 죽을 것이라 마음을 먹은 화랑 우두머리 출신이었다.
와아아아!
탄현 내 주요 고지를 장악한 신라군이 김흠운의 기세를 이어받아 분전하였고, 급한 경사에다 백제가 수비 목적으로 설치한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네 개의 발을 가진 마름쇠를 백제 군마가 밟고 쓰러지는 등 예기치 못하게 피해가 막심해지자 상영은 반나절도 채 격전을 벌이지 못하고 퇴각했다.
‘도비천성은 함정이다! 신라가 사비를 노리고 있다!’
군마 4백여 필을 잃고 수백의 사상자와 함께 탄현이 신라의 깃발로 뒤덮이는 모습을 뒤로한 상영은 서둘러 사비로 가서 이 소식을 알려야 했다.
“이제 사비만이 남았다!”
파죽지세로 탄현을 점거한 김흠운이 보검을 들며 그렇게 외쳤고, 진한 신라군의 함성 소리가 한동안 숯 고개를 떠나지 않았다.
* * *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의 남진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이 삼한 깊숙이 이르렀을 무렵, 지리적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천연 요새이자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맞부딪친 금돌성에서는 한바탕 도비천성과 주변 일대를 휩쓴 걸걸중상과 흑수돌이 전리품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접한 금돌성을 보급소로 삼아 도비천성 공략에 매진하고 있던 선기군이었다. 성의 포위야 일선주에서 추풍령 고개를 넘어 도비천성을 공략하는 검모잠 일행과 가야·신라 연합군 6천이 도맡고 있으며 삼한도행군 별동대가 다수의 병력이 있을 때 차바퀴가 굴러가듯 계속 교체해 가며 힘을 빼는 전법인 차륜전(車輪戰)으로 지원하고 있으니 선기군의 부담은 줄어들었다.
선기군은 성 공략보다도 도비천성에서 피우는 봉수대 연기를 보고 올라올 백제군의 구원군을 중간에서 차단하고 섬멸하는 막중한 군사 작전을 함께 수행하고 있기에 온전히 성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선기군이 백제 군마 70여 필과 양곡 400석 말고도 예기치 못한 전리품을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내게 가져와 바쳤다. 도비천성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에서 몰래 빠져나가려는 백제인들을 잡아 왔습니다! 작은 막리지.”
“그중 하나가 제 스스로 백제의 태자라 하질 않습네까.”
선기군의 양 장인 걸걸중상과 흑수돌이 백제인 포로들을 가리키며 그리 말했다.
“먼저 노획품은 크게 활약한 니루 부대순으로, 삼기군의 규율대로 공에 따라 공정히 분배하고 포상하라.”
내 명에 흑수돌이 큰 공을 세운 니루순으로 군마와 양곡 1등급을 내주었고, 이내 걸걸중상이 백제인 포로 가운데에서 태자라고 자칭하는 이를 데려왔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잖아?’
먼지투성이 명광개를 입고 있으나 번쩍번쩍한 게 황칠이 분명했고 갑주의 주인인 백제인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게 지난날 백제에 갔을 때 이미 안면이 있던 백제 왕자였다. 안 본 사이에 한 뼘 정도 키가 더 자라 있었다.
새로 교체된 백제의 태자에게 하루속히 군공을 쌓고 귀족들의 신임을 얻게 하려는 은고의 의도가 다분히 드러났으나 설마 막 태자에 오른 부여효가 도비천성에 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기획한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남해와 대야성 일대에는 머물지 못하게 하였고, 북으로는 연개소문이 올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만들어 둔 터에 그나마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국경인 동쪽으로 보낸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그게 나한테 딱 걸린 셈인가.
‘김유신이 저세상 사람이라는 걸 이용했군.’
은고의 계산이라면 뻔할 뻔 자였다.
동쪽이라면 김유신 없는 신라군이 나타날 리는 만무하고 설사 나타난다 해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승리를 거두어 공까지 세울 계산을 염두에 둔 것이다.
“주, 중리대형! 나요! 나!”
“어허!”
“중리대형이라니, 누굴 지칭하여 말하는 거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백제의 태자를 향해 걸걸중상과 연근행이 우락부락한 체구로 앞을 가로막자 부여효가 눈치껏 조잘거렸다.
“나도 참, 이제는 중리대형이 아니라 중리위두대형이라고 해야지. 나도 백제의 왕자가 아니라 태자가 되었으니 말이오. 헤헤.”
이거 전혀 소용이 없는 건가.
나를 알아보며 천진난만하게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부여효는 전에 만났을 때와 비교해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순진한 모습이었다. 도무지 전장에 나올 그런 성정이 아닌데 어떻게 대야성 수복전에 참전하고 여기까지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거 참, 어찌 됐건 이런 자리에서 남산 공자를 다시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소! 그나저나 옥소 낭자가 안 보이는구려. 내 참 많이 좋아했는데.”
영락없이 권력의 정점에 서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모습. 부모의 과한 기대가 만든 표본 같은 인물이려나.
“성내에 머물렀다면 이리 포로가 될 일도 없을 터인데 어찌 무리하여 성 밖으로 나오셨소?”
내가 다른 제장들의 분위기에 힘입어 일부러 정색하며 물었다. 전장이란 아는 얼굴이라도 천진난만하게 대꾸하며 상대할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그야 성내에 비축한 곡식은 얼마 없고 군량이나 원군은 오지 않으니 성이 포위되어 영영 나오지 못할까 싶어 불안해 나온 거지요. 좁은 성에만 갇혀 있어 답답한 것도 있었고요. 헤헤.”
부여효는 여전히 태평하게도 이리 포로가 된 경위를 술술 불었다. 남해 쪽이야 해양 침투와 비라부가 이끄는 가야군의 개입으로 군사를 보낼 여유가 없고 탄현 고개나 인근 지역에서 넘어온 백제군은 선기군이 매복지에서 섬멸하여 오지 않으니 많이 불안했나 보다.
그렇게 봉화가 피어올랐음에도 후방의 백제군 하나가 구원하러 오지 않으니 담이 작은 인물일수록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신라가 백제에 인접한 삼년산성을 장기간 사수하고 김유신이 금돌성을 쌓아 올렸던 것은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어.’
나는 백제를 치기에 앞서 신라의 항복을 받아 내어 두 요새를 활용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역사의 김춘추와 김유신이 괜히 이 두 성을 거쳐 백제를 멸한 게 아니었음을 몸소 느끼고 있다.
부여효를 생포한 것도 그렇고.
그런데 조금 전 부여효와의 대화로부터 알아낸 도비천성 내에 비축한 곡식이 없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인근 성들로부터 군사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만큼 군량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하는 건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백제 왕성에서 그리 멀지 않아 가까운 변경을 덜 신경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총관, 들으셨습니까? 우리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사비로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 200리 길 백제 요충지 점거 소식만을 오매불망 기다린 김춘추가 탄현에서 온 신라군의 승전보를 전해 왔다.
나도 슬슬 이 부여효를 앞세워 도비천성의 성문을 열어야겠다.
“백제 태자의 목숨으로 협상을 하시려는군요.”
누가 자라 속인 토끼 같은 눈치 아니랄까 봐 그런 내 의도를 간파한 선도해가 부채를 들며 살며시 도비천성 방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태, 태자께서 고구려 놈들에게 붙잡히셨다는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병관좌평. 흐흑.”
군졸의 침울한 대답에 은상의 낯빛은 삽시간에 보랏빛이 되었다.
“만에 하나 태자의 신변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다면 이 성의 보존과 상관없이 내 목숨은 없을 것이야. 황후께서 나를 살려 두시겠느냐?”
봉화를 피워 올린 지가 언젠데 해가 바뀌어도 원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성을 에워싸는 고구려군의 규모는 계속해서 불어나니 서둘러 도성으로 돌아가겠다는 태자의 막무가내에 은상은 하는 수 없이 없는 병사 3백을 떼 주어 뒷산 고개를 넘어가라 하였다.
그때 성 포위를 느슨하게 하고 있던 고구려 기마 부대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뒤를 쫓았으니 은상은 태자가 부디 포로가 되지 않길 바라고 단신으로나마 빠져나가길 기도하며 날밤을 지새웠으나 그만 흉보를 듣고 말았다.
“백제의 병관좌평은 어서 성문을 여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기 백제 태자의 목숨은 없을 것이며, 병관좌평은 태자를 지켜 내지 못한 중죄를 짓게 될 것이오.”
그런 은상의 심리를 간파한 선도해가 백제 태자를 끌고 와 도비천성을 요구했다.
“웃기지 마라, 네놈들의 말을 어찌 믿고……!”
선도해가 부채를 내렸고, 그 뒤에 있던 고구려의 대장기 아래 연남산이 대신 응답했다.
“내 아버님이신 대막리지의 이름을 걸고 맹서하겠소. 백제 태자의 목숨을 거두지 않겠다고. 깃발은 그대로 두고 뒷산으로 조용히 가시오, 우리 군사가 쫓지 않을 것이니. 해가 지기 전까지 결정하셔야 할 거요!”
이어 시간마저 정해지자 부여효가 애타게 은상을 찾았다.
“숙부!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숙부!”
경각에 달린 목숨은 절박했다. 한동안 계속 울리는 부여효의 음성에 은상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황산벌에서 달솔 상영과 떨어진 6천의 중장 기병이 돌고 돌아 동부 전선에 당도했다.
‘상영이 이 녀석, 아직도 따라오지 않고 언제 오려는 거야?’
도비천성이 4, 5리 밖으로 다가오자 좌평 충상은 내심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이 워낙 야심한 시각이었고 도비천성을 침범한 신라군의 규모를 알지 못하는 이상 해가 뜰 때까지 섣불리 성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척후병을 몇 차례 보내 봐도 도비천성 밖으로는 도무지 적군의 횃불을 볼 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자 충상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도비천성에 이르렀다. 때마침 성 위에서 낯익은 인물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자 전하! 황후께서 원군을 보내셨습니다!”
“어, 어서 성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장군.”
이윽고 성문이 열렸고, 충상은 성벽 위에서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부여효를 보며 안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