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시대적 사명 (8)
사비에서 불과 3, 4백 리 길에 위치한 삼년산성은 다른 산성이 산 정상을 두르는 낮은 성세인 편과 비교할 때 성벽이 높고 하중도 막대하여 기초를 견고하게 4중 계단식으로 쌓은 불굴의 요새였다. 성벽의 동쪽과 서쪽 안쪽은 다진 흙으로, 바깥쪽은 돌로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 방법을,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內外夾築) 방법을 활용하였다.
당대 신라 축성 기술 전부가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심혈을 기울인 성곽 요새는 대백제 전선 최전방의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지난 백여 년간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군의 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 내며 오늘날까지 신라의 영토로 굳건히 남아 있었다.
신라는 180년간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이 성을 지키고자 성 밖에서 성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게 하도록 정문 성벽을 안쪽으로 휘어 짓게 하였고, 적병의 혼란을 유발하고자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어긋난 지점의 경사면으로 하여 분간하기 어렵게 성문을 형성해 두었다. 남북으로 각각 2개씩 배치된 치성에다 동문에까지 추가로 치성을 배치하여 사다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예 접근할 수 없게 현문식(縣門式)으로 지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3년간 체계적인 구조하에 노동하여 자비 마립간 13년에 완공한 삼년산성은 성을 쌓는 데 화강암이 무려 1천만 개가 사용되었다. 신라가 가야권을 온전히 장악하여 북방으로 진출했다는 증거이자, 장기간 한 국가 치세하에 안정화된 영토라는 공로로 산성 주변에는 수천 기의 무덤이 자리해 있으며, 성내에는 연못과 우물이 들어서 있고 온갖 가옥에 많은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산성에 고구려 군대가 들어오는 날이 다 있다니.”
“거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내가 숨넘어갈 때까진 이 성에 다른 나라의 깃발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아무리 고구려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고는 해도 이리 쉬이 정문을 열어 주어도 되는 거야?”
“여주와 국상께서 이러실 줄은 몰랐구만. 적병의 습격에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서문인데. 흠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맛살을 깊게 찌푸린 채 고구려군의 입성을 지켜보는 성 주민들의 불만과 불평은 당연했다.
한 성에서 외부의 침입에 단 한 번도 굴하지 않고 180년간 지켜 냈다는 성 주민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고구려에 요동성과 안시성이 있다면 신라에는 그 둘을 합친 성과도 같은 업적의 삼년산성이 있다고 믿는 그들이었다.
“우리야 뭐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 말고 별게 있겠어?”
“가뜩이나 연개소문의 군사가 아리수 일대와 중원 지방, 일선주까지 내려와서 이리 고구려와 동맹을 맺지 않으면 앞뒤로 꽁꽁 묶여 버려 서라벌이고 당나라에서 오는 품목이고 삼년산성에 들어올 곳이 없다는데, 뭐.”
“그렇다면 별수 없는 상황이긴 하구만.”
그나마 고구려군이 입성하기 전에 삼년산성 내 주민들에게 따로 이두문으로 적힌 벽보로 미리 설명해 둔 터에 김춘추는 몇몇 백성들의 반응을 보고 난 다음에야 식은땀을 닦아 낼 수 있었다.
‘이 철옹성에서 치와 함께 싸웠더라면 그리 허무하게 고구려에 투항할 일은 없었을 것을.’
반면 김춘추는 군졸 일곱이 나란히 위로 서야 겨우 닿을 대단히 높은 삼년산성의 성벽을 바라보며 서라벌에서 항복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을 대신 삼켜야 했다.
서라벌에서의 전투라 해 봐야 수백 년 전부터 집요한 왜인들의 침략이 있었으나 지증왕의 우산국 정벌로 백 년간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장기적인 평화를 되찾은 월성 성벽의 견고함은 예전만 못하였고, 북에서 수만의 군사가 내려오는 상황은 더더욱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신라군은 아예 서라벌로 들어오는 길목인 대야성과 압독주의 수비를 강화하며 백제의 공세에 대비했고, 북으로는 죽령, 칠중하, 북한산 등의 산세와 강, 협곡과 같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하지만 5년 전 서라벌 근해와 가야로 들이닥친 연남산의 상륙군은 이 모든 전략적 방비를 수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단 한 번의 상륙으로 신라가 5백 년 숙적으로 삼아 간신히 복속시킨 가야를 정복하고 서라벌마저 노릴 수 있다는 위험 가능성을 보여 주었던 것.
신라의 형편에서 육지에서 양방향으로 몰아붙이는 고구려와 백제를 막으면서 해안가에 대한 방비와 서라벌에 대한 방비를 동시에 구축하기란 불가능했다.
목책, 망루, 봉수대 설치 등 서라벌과 해안가에 대한 방책 마련과 예산 및 인력 소모가 결과적으로 평소처럼 김유신에 대한 온전한 지원을 불가하게 하였고, 무혈로 마목현을 넘어오는 고구려군의 침입을 허용하면서 공산에서의 참패로 이어지고 말았다.
“저길 보십시오! 춘추 공. 고구려군의 계책에 속은 탄현의 백제군이옵니다!”
백제군 포로를 가리키는 독군(督軍) 김문영이었다.
신라가 자랑하는 요새에서 사열식과 함께 기를 한껏 펴며 침울해진 속국의 분위기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김춘추의 계획은 고구려 별동부대의 승전보와 함께 사라졌다.
도비천성에서 피어오른 봉화를 보고 탄현 일대 6개의 성에서 잇달아 내려오는 백제군을 연남산이 보낸 걸걸중상의 선기군이 섬멸한 것이다. 다른 지역이라면 몰라도 탄현 내 백제군의 숫자를 줄인 것은 전략적으로 그 의미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장되었긴 하나 백제의 전략가인 성충과 흥수가 한목소리로 말하는 요충지. 그곳에 배치된 군사 2천의 목을 베고 3백을 포로로 생포했다는 의미는 그 10배를 베고 사로잡아 왔다는 말과 같았다.
‘낭당대감(郎幢大監)이 우리 신라의 기세를 보여 주어야 할 터인데.’
김유신의 전사와 함께 무너진 신라의 기상은 오로지 전쟁만으로 회복할 수 있기에 김춘추는 장래 자신의 사위로 점찍은 인물이자 신라군을 맡긴 젊은 장수 김흠운에게 기대하고 있었다. 개인의 복수가 우선해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땅을 기반으로 가야를 회복하고 고구려의 영향하에서 탈피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김춘추였다.
* * *
“고구려가 탄현의 백제군을 유인하여 섬멸하였고, 후방인 저희 연합군의 공세에 도비천성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 신라군이 선봉에 서서 탄현을 넘고 사비로 진군하겠습니다.”
명예와 기개를 중시하는 낭당대감(郎幢大監) 김흠운(金歆運)은 군 사열식으로 삼년산성 신라군의 기세를 한껏 보여 주었던 자리에서 다시금 내게 선봉을 논했다. 옆자리에서 차를 홀짝이는 김춘추가 널찍한 귀를 움직였다. 군사 운용에 대해 일단 빠지겠다고 말한 김춘추였으나 어찌 됐건 이번 전쟁을 통해 서라벌 조정의 수모를 털고 떨어진 국격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따지고 보면 전쟁만큼 파괴적인 것도, 또 기사회생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이 기사회생하고 또 초토화된 한국이 베트남전을 통한 전쟁 특수로 군납이 증가하고 경제력을 끌어올리며 국가 위상을 세운 것과 같이 말이다.
현재 신라는 고구려의 복속을 자처하면서 물자 조달을 받는 실정이고, 가야 지역과 육지와 바다로 무역을 개시하면서 꽁꽁 묶여 있던 숨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한때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교류했던 신라이니, 점차 삼한 땅에 퍼지고 있는 고구려 화폐가 유통되는 것도 시간문제이고 조금 살 만해졌다 싶으면 언제든 군사를 육성하여 고구려의 빈틈을 노릴지 모를 일이다.
고구려 군사가 삼한 땅에 모두 주둔하고 난 뒤 그리 먼 훗날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일단 다시 돌아와서. 정황상으로는 도비천성을 함락하고 탄현을 넘는 편이 맞으나 연수영의 수군이 지금쯤이면 기벌포 연안에 들이닥쳤을 것이다.
‘슬슬 탄현을 넘기는 해야 되겠군.’
거침없는 고구려 수군의 진군에 괜스레 심적으로 부담감이 느껴졌다.
늦었다고 김유신에게 신라 장수 목 하나 내놓으라는 오만방자한 소정방같이는 안 굴어도, 지각했다고 횡포 한번은 크게 부릴 대고구려의 여장부가 아닌가.
“얍얍!”
“바로!”
큼지막한 천막 아래에서 숨을 한번 고른 나는 눈앞에서 김유신 체계를 익힌 신라군의 진법 훈련을 직접 감상했다.
‘형편이 어려운 신라가 백제 정벌에 2만이 넘는 군사를 징병했다는 것 자체가 백제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아직 직접적으로 김춘추와 따로 영토 협상을 하지는 않았으나 백강 이남은 신라가, 백강 이북은 고구려가 가져가는 식으로의 얘기를 얼핏 다른 고구려 제장들 앞에서 웃으며 흘렸던 김춘추였다. 후일의 협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탄현을 반드시 먼저 돌파하여 사비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을 신라였다.
김흠운 앞에서 일부러 고심하는 척 잠시 머뭇거린 내가 입을 열었다.
“지금쯤 제 고모님이신 태대사자께서 백강 하구에 이르러 백제 수군을 격파하고 계실 겁니다. 용맹한 신라군이 이에 사비로 마중 나갈 수 있다면 탄현과 백강 이남 천 리 마한 땅은 능히 신라의 힘으로 얻어 낸 게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김춘추가 기다렸다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고, 김흠운이 김춘추의 반응을 보고서 내게 말했다.
“고구려의 대총관께서 이리 물자를 지원해 주셨고, 후방의 성을 공략하고 계시니 사비까지 일사천리(一瀉千里)가 아니겠사옵니까? 오늘 밤에 출전하면 이틀 안에 사비에 당도할 것입니다.”
김흠운의 얼굴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이미 탄현 언덕에 배치된 처참한 백제군의 현황을 보고받았을 터다. 작은 성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가로질러 사비로 향하는 넓은 들판에 진입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을 터.
-옛날 월왕 구천(越王句踐)은 5,000명으로 오왕 부차(吳王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해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그리고 그곳에는 10배가 넘는 신라군을 맞이하여 4번을 싸워 이긴 불굴의 백제 장수가 신라군을 맞이하러 나올 것이다.
신라군은 삼한도행군의 도움 없이는 결코 황산벌을 넘어 사비로 진군하지 못할 것이다.
* * *
“사비에 배치된 전 병력을 기벌포 언덕으로 보내시고 탕정군과, 임존성, 두량윤성 등 북방의 군사들을 서둘러 사비로 소환하셔야 합니다, 어라하. 그들로 하여 타현을 지키게 하여야 합니다.”
조정좌평의 보고에 계백의 입이 빨라졌다. 당장이라도 기벌포 언덕을 사수하고 북쪽에 보낸 군사를 중앙으로 집중하여 탄현을 막고 지방의 5방과 연계하여 싸워야 했다.
“연개소문이 북에 있거늘, 고구려 수군은 미끼일 것이다.”
일순 당황한 의자왕이었으나 곧바로 그렇게 말하며 군주로서 초연함을 보였다.
“그렇사옵니다, 어라하. 고구려 수군을 맡은 이가 연개소문의 누이이온데, 호전적이기는 하나 어라하께서 두려워하실 인물은 아니라 보옵니다.”
대좌평 사타천복이 그리 말하며 안심시키자 의자왕이 어좌에서 일어서며 눈알을 부라렸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제 어린 자식들을 전장으로 보내는 것도 모자라 계집인 제 누이에게마저 군사를 맡긴단 말이냐? 연개소문이 짐을 우습게 보아도 한참이나 우습게 보았구나!”
의자왕이 이를 갈며 분노를 표했고, 의직과 계백이 사정했다.
“상황이 심상치가 않사옵니다. 고구려군이 육지에 상륙할 때를 노려 이를 먼저 공격하여야 합니다.”
“연개소문의 누이는 고구려 수군의 용명을 크게 떨친 인물입니다. 의직 장군을 보내시어 막으셔야 합니다, 어라하.”
의직과 계백에 대립해 서 있던 두 좌평 충상과 상영이 나섰다.
“고구려 수군이 이미 기벌포 연안에 이르렀사옵니다. 황후마마의 계책대로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소장이 듣기로 도비천성에 신라군이 급습하였다는 급보입니다, 어라하.”
도비천성 소식에 태자가 그곳에 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은고가 의자왕하게 황급히 제안했다.
“먼저 도비천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어라하. 태자가 그곳에 가 있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