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시대적 사명 (3)
한껏 신라를 몰아붙인 의자왕 집권 초기, 백제는 10만 정병을 통솔하고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의자왕이 친정하여 낙동강 서편의 미후성 등 신라의 40여 개 성을 무너뜨린 뒤 백제의 위상은 크게 강화되어 근초고왕과 부왕인 무왕조차 해내지 못했던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 회복의 숙원을 이룩해 냈고 이는 곧바로 강력한 왕권 형성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에 의한 고구려·말갈 연합군의 침공까지 더해져 위기에 빠진 신라였으나 당나라의 외교 간섭으로 당항성에서 철군한 의자왕은 머지않아 김유신의 반격을 받으며 뺏고 빼앗기는 가야 쟁탈전을 벌였다.
한편 백제의 진격으로 인해 느닷없이 주인이 바뀐 가야 지역에 대한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역사적으로는 그 옛날 백제·가야·왜 연합으로 고구려와 대적하려 했으며, 이후에는 배신한 신라를 응징하려 하기도 하였던 가야였다. 그것이 실패하여 신라에 정복당했기에 가야는 옛 동맹인 백제에 종속하느냐, 그 이전 100년 통치의 신라를 따르냐의 중차대한 갈림길에 들어섰다.
그러므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위치한 가야 지역의 지배력은 오로지 민심에 달려 있었고, 결국에는 오랜 기간 가야 왕실을 포섭한 신라가 우위를 점했다. 가야계 김유신 가문이 장기간 몸소 전장에 임하면서 백제와 싸운 것 역시 가야 민심을 신라에 붙잡아 두기 충분했다. 가야인 장정의 징병과 물자 징발이 신라를 중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자왕의 대대적인 침공에 가야 지역을 백제가 장악했다고 한들, 가야의 민심을 얻은 김유신의 역습에 백제의 통치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은 뻔하였다. 그 가운데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거의 해마다 그칠 날이 없던 것은 별개로 두더라도 말이다.
‘그런 때에 내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섬나라로 흩어진 가야 유민들을 포섭하고 정벌한 셈인 건가.’
그러한 역사에서 내가 왜에 이주한 가야계 출신들을 불러 모아 가야 정벌을 꾀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가야 부흥군이 왔다!
-가야가 부활했다!
-신라와 백제 놈들을 쫓아내자!
양국이 치열한 전투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시선이 서로에게 향해 있던 찰나에, 백제냐 신라냐 하는 가야 지역 주민들의 혼란이 점차적으로 가중될 그 시기에, 내가 가야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삼기군을 이끌고 정복했으니 삼국 가운데 민심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게 된 배경이다.
비사벌,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이하 가야연맹 7국의 정벌의 효과는 비단 남쪽에서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초기 삼한 가운데 해상 무역이 가장 번성했던 해상 국가의 세력을 얻는 것을 뜻한다. 이는 백제와 신라의 해상 진출의 축소를 나타내며, 백제는 고구려와의 해상 조약 없이는 왜와의 교역도 순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오늘의 신라 복속이 있으며, 백제가 고구려 전투선에 대한 백제 해협 통과를 허락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
신라에 맹공을 가하면서 당나라와의 관계를 거의 접다시피 한 백제가 의존할 곳은 고구려와 왜뿐이었다. 그로 인하여 성충이 연개소문과 담판을 지은 것이고.
또 근초고왕 이후 동아시아 해상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한 백제는 왜와는 300년 이상 이어지는 돈독한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양국의 의존도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할 수 없다.
그렇기에 백제 해협 통행권을 주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가야 해협과 대마도에 대한 통행권을 내주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백제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백제 해협 통행을 허락한 것이다.
“기벌포에 정박한 해선은 겨우 10여 척에 불과합니다.”
“백제 수군이야 남해의 해적들을 퇴치하는 백제선 스물세 척을 제외하고는 볼 것이 없사옵니다.”
그로 인해 나는 백제의 수군 동태와 해류, 백강 지형에 대해 정밀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해양 측량에 박식한 고구려 해협의 해양 경찰 격인 해라장(海邏長)들을 백제 해협을 통과하는 교역 상인들 틈 속에 몰래 심어 두어 백제 수군과 바다의 정보를 얻어낸 것이다.
‘그나저나 그 옛날 요서와 대륙에 진출했던 백제 수군 현황이 이 정도라니, 육지에서 고구려나 신라에 얻어터지면서 수군 양성을 거의 포기하고 육군 양성에 올인 한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이 아닌가.’
예로부터 왜의 침략을 받아 왔으며 왜적의 교두보인 우산국을 정벌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와의 교역을 추진한 신라는 피치 못해 동해와 아리수 유역을 중심으로 늘 20척가량의 수군을 양성했던 반면 후기 백제는 오로지 육군만을 양성하여 신라를 압도할 수 있는 군사를 양성해 왔다.
이는 지난번 계백이 지휘하는 백제군의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백제는 밖으로 황칠을 수출할 때에 고구려의 철기를 수입하여 고급 철로 질 좋은 전마를 무장시킨 철기를 양성했다. 말이 노비보다 비싸다는 이 시대에 기병 1기가 보병 10명의 가치라면, 철기 1기는 능히 기병 5, 6기 이상의 무장과 훈련 비용이 든다.
판갑옷으로 목뿐만 아니라 턱까지 보호하는 백제의 중장 기병은 돌진 가속으로 충돌하는 것만으로 인간의 뼈를 으깰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비사벌군에서 김유신과 맞서 싸우는 계백의 백제군을 목격한 나는 불과 5천의 군사로 5만의 군사를 상대로 4번을 싸워 이긴 저력을 알 것만 같았다. 수는 적으나 잘 훈련받은 중무장한 군사는 일당백이었다.
‘나는 이런 비용을 줄이고 기동력을 높이고자 무장을 버렸으니.’
비용을 아끼는 것뿐만 아니라 오로지 속도와 정확성만을 위해 삼기의 경무장을 선택했다. 철로 이루어진 무거운 갑주는 한두 번은 몰라도 10여 차례 이상 무기를 휘두르거나 화살을 쏠 때 몸에 가중되는 부담감이 크다. 체력 소모도 크니 전투를 오래 치를 수 없다.
물론 경무장의 단점도 뚜렷했다. 무장이 가벼우니 말 그대로 살상당할 위험도가 높다. 적병의 저항이 세거나 전세가 밀릴 경우 피해가 크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남산이 네 말은 수군과 육군으로 동시에 치자는 게야?”
시선을 돌리자 어느덧 연개소문이 내게 그리 묻고 있었다. 이미 알면서 묻는 것 같았지만 군사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오로지 내게 맡길 줄 알았는데 중간부터 들어와서 개입하는 아버지였다.
“내주나 그다음 주면 장인께서 친히 2만의 군사를 징발하여 남천(이천)으로 와 주겠다 하셨습니다.”
“김춘추가 말이냐?”
“예. 남천 지방에서 저희 삼한도행군과 합류해 삼년산성과 금돌성을 통해 탄현을 넘을 것이라고요.”
나는 이곳까지 오면서 김춘추와 나눈 신라군의 지원과 군사기지 이용 약조를 꺼냈다. 본래 역사라면 5만의 대병을 징발하여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하는 신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군사와 싸운 것이 나와 삼한도행군이었다. 가야 지역을 잃고 황폐해진 아리수 이남의 보급 상황을 볼 때 2만의 군사를 징발하여 오는 것으로도 신라의 처지에서는 상당히 무리하는 것이었다.
“그 2만의 군사가 우리 뒤통수를 친다는 보장은 없느냐?”
누가 배신의 아이콘 아니랄까 봐 천하의 연개소문마저 신라의 배신을 염려하고 있었다. 김춘추와 사돈을 맺은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고 또 김춘추의 복수심을 알고 있는 상황에도 말이다.
“아버님께서 무얼 말씀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만, 염려하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믿고 있는 구석이라도 있는 게야? 김춘추가 제 복수심 하나만으로 우리의 뒤를 치지 않는다는 보장 말이다.”
“서라벌 인근과 월성을 우리 고구려 제장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서라벌 귀족들은 비담 일파하고도 골이 깊으니 허튼 생각을 가져 보았자 득이 될 게 없을 겁니다. 거기다 화백회의에서 작성된 선전포고가 곧 당나라에도 전해질 겁니다. 믿고 있던 당나라에도 등을 돌린 저들이 무얼 하겠습니까? 또 김춘추가 그런 모험을 시도할 인사라고는 보이지 않고요.”
애초에 고구려와 싸울 작정이었다면 내 강화에 응한다거나 항복하지 않고 서라벌에서 끝까지 싸웠을 김춘추였다. 지금 딴마음을 품기란 그때보다 진덕여왕의 신변에 더 위협적인 일이라는 걸 김춘추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그건 남산이 네 말이 맞구나. 김춘추가 범상한 인물은 아니나 김유신과 같은 배포 있는 무장은 아니지. 그런 배짱이었다면 너와 사생결단을 내려 했을 게니 말이다.”
연개소문도 이쯤 돼서 김춘추라는 인물에 대한 판단이 거의 끝난 것 같다. 모험심도 있고 추진력도 있으나 군사를 이끌 장군감은 아니라는 것이다. 김유신이 살아 있었다면 상황은 또 달랐겠으나, 그가 없는 상황이 내가 예측할 수 없는 변수 하나를 없애 준 셈이었다.
“평양의 전선 120척에 삼기군이 쓰는 판옥선 200여 척을 더하여 북아리수와 갑비고차 일대에 정박해 두라 일렀습니다. 내주면 당도할 것입니다.”
한편 선도해가 내가 요청한 군선 이동 현황을 보고했다. 백제 공략에 대한 준비가 서서히 완료되고 있었다.
* * *
한동안 백강을 따라 울리던 기악 소리는 고구려의 선전 포고와 함께 멈추었다. 동시에 무역 길이 막혀 한동안 큰 이문을 벌어들인 백제 상인들의 곡소리가 그칠 새 없었으니, 상황은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문을 닫아라!”
“사비성에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느니라!”
군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사비성은 곧장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성충과 흥수의 정신을 이어받은 일부 정사암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이 흩어진 병력을 불러 모았고, 국경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지고 있었다.
“어라하, 지방은 몰라도 국경의 군사마저 불러들이라 하시면 어쩌십니까? 그러다 애써 함락한 성을 신라에게 빼앗깁니다.”
사비궁 어전에서 그런 염려를 내뱉은 이는 성충도, 흥수도 아닌 뜻밖에도 은고였다. 국경에 방비가 허술해지면 기껏 부여효와 은상이 함락한 대야성을 도로 빼앗길 수 있기에 안절부절못하고 나선 것이다.
“연개소문이 짐에게 선전포고를 하질 않았소? 제 임금을 시해한 역적 놈이 국원성에 와 있으니 김춘추 놈들과 함께 북으로 올 것이외다!”
한편 의자왕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탕정성을 거쳐 웅진과 사비로 올 것이니, 군사를 모아 북쪽을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고구려가 신라를 복속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신라를 거쳐 오질 않겠습니까? 어라하.”
“그렇다면 삼년산성을 통하여 탄현으로 올지도 모르옵니다!”
“이미 바다로 가야를 정벌한 연개소문의 아들이 아닙니까? 이번에도 바다에서 나타난다면 혹여 기벌포로 올지도…….”
대성팔족의 사타천복, 사타상여, 국변성이 연이어 얼마 전 성충과 흥수가 충고한 충언을 떠올리며 우려를 드러내자 의자왕이 어좌를 두들기며 불편함을 표했다.
“닥치거라! 너희들이 감히 짐의 말에 말끝마다 반기를 든 자들을 두둔하느냐!”
왕당파 스스로 의자왕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