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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244화 (244/335)

244화 삼한의 정략 (9)

사비궁은 의자왕과 군대부인의 주최로 연일 연회에 흠뻑 빠져 있었다. 은고가 주도하는 의자왕의 친위 정변이 성공하면서 좌평들이 새로 봉해지고, 의자왕 아래 왕자들이 연일 좌평에 임명되면서 담로를 맡게 되니 왕실 중심의 질서가 바로 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의자왕과 은고 개인의 취향으로 인하여 나날이 과도한 향락 추구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 매일 바다로부터 진귀한 물건들을 가득 싣고 들어오니, 궁궐은 항시 사치품으로 가득했다.

온갖 귀금속으로 치장한 왕자들이 고구려에서 들여온 흑당차를 물처럼 마시었고, 청과, 주단, 향 등을 나누는 귀족들이 많았다.

화려한 율동무를 자랑하는 무용수가 한차례 춤사위를 자아내자 의자왕이 껄껄 웃으며 왜국 사절단을 향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새로 치장하고 들어온 우리 궁녀가 참으로 고운 선을 선보이질 않소? 마치 선왕 때의 예인(藝人) 미마지(味摩之)가 살아 돌아와 기악무(伎樂舞)를 추는 것 같구려. 흐허허.”

“그렇사옵니다, 어라하. 백제의 예인(藝人) 미마지(味摩之)가 오(呉)나라에서 춤을 익히고 돌아와 우리 왜에도 기악무(伎樂舞)를 전해 주었습죠. 그리하여 가면극인 기가쿠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질 않았습니까? 덴노와 카마타리 공께서도 이를 기억하십니다.”

“그 옛날 왜의 쇼토쿠 태자가 무용인(舞踊人) 교습자에게 조세를 면제해 주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왜의 불교 예술을 크게 장려하였다고 들었지. 내 익히 들었기에 그 기카쿠라는 무용을 꼭 한번 보고 싶구먼.”

“이번에 본국에 돌아가면 덴노께 출중한 무인(舞人)들을 보내 달라 청을 올려 보겠사옵니다.”

“고맙네. 기대되는구먼!”

“백제의 예술이 왜의 예술이요, 왜의 문화가 곧 백제의 문화가 되는 게 아니겠사옵니까? 어라하. 흐흐흐.”

“아암, 그렇고말고. 모든 것이 대백제국의 문화에서 비롯된 게지. 모든 바다 담로를 가진 짐의 것에서 말이야.”

의자왕은 카마타리의 수하이자 왜의 사절단인 아미타에게 그리 자랑을 하며 바다 건너 왜에서도 주류 무용이 된 백제의 예술을 크게 칭찬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가운데 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나라가 백제임을 공언하다시피 한 것이다.

“왜의 황자께서 백제의 새 태자를 위해 사절단을 보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보답으로 저희가 준비한 불전, 불상과 함께 기악 용품을 보내겠사옵니다, 어라하.”

“그렇게 하시구려, 부인. 흐하하.”

은고의 말에 의자왕이 술잔을 들이켜며 기뻐했고, 은고가 왜의 사절단을 향해 화답했다.

“우리 새 태자를 위한 외교 문서를 이리 빨리도 보내 주다니, 참으로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고구려 태왕이 인정하는 백제 후계자 책봉서와 왜의 덴노가 인정하는 백제국 새 태자를 일컫는 문서를 양손에 거머쥔 은고는 이날 기쁨을 만끽하였다. 그간 성충이 주도했던 외교를 자신이 도맡아 하며 태자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해 그 권위 향상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결실을 맺은 날이기 때문이다.

성충이 죽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백제의 후계자를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으로 여기며 정사암 등청을 거부하는 귀족들이 있으니 끝까지 예의 주시 하며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얼마 전 대야성 수복의 공에 태자의 이름을 넣기도 하였으나, 태자의 공로로 믿지 않는 이들이 많으니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것만이 제 핏줄을 위해 은고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연남산이 백제에 가져다준 부가 도리어 백제를 향락과 사치에 취하게 하려는가.’

그러던 때에 사비궁의 연회를 지켜보는 흥수의 수심은 또 한차례 깊어져만 갔다.

고구려의 연남산이 대마도에서 금은광을 발견하고 가야의 상권을 활성화시키며 흑치국과 유구 열도의 교역로를 개척하면서 백제 상권 역시 덩달아 커진 여파가 백제 왕실에는 그리 좋지 않은 분위기로 연결되고 있던 까닭이다.

의자왕 앞에 쌓인 온갖 사치품만 보아도 그랬다.

지난날 백제 궁궐에서 대마도 금은광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의 연남산과 왜의 중신겸족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첨예하게 대립하였을 때 의자왕과 군대부인이 은근슬쩍 고구려의 편에 섰던 것은 고구려가 금은광의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편이 해상 무역에서 백제가 얻어 갈 수 있는 이윤이 더 클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작금에 흥수가 염려하는 일은 전혀 다른 사안이었다.

“제 청을 들어주시어 계백을 다시 왕성으로 불러들여 위사부 소속으로 백의종군하게 한 것은 참으로 황공한 일입니다만, 또 이번에 남만으로 윤충 장군을 좌천시키는 연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서라벌의 심상치 않은 정세를 읽은 흥수가 결국 참다 못해 부여궁 연회장에서 한마디 꺼냈다.

의자왕이 귀찮다는 듯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옆에 앉은 은고가 미소를 잃지 않고 대신 답하였다.

“내법좌평께서는 이리 좋은 날에 꼭 그런 얘기를 꺼내셔야겠습니까?”

“나라에 극히 중차대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윤충은 죄인 성충과 형제입니다. 죄인의 친족을 어찌 믿고 군사를 맡기겠습니까?”

“대야성 내의 모든 첩보와 성세를 꿰고 있던 이가 윤충 장군입니다. 백제군이 이를 듣고 성을 함락했으니, 대야성 수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누구란 말입니까?”

성충의 말에 은고가 살며시 시선을 돌렸고 기다렸다는 듯 사타천복과 사타상여가 핀잔을 주었다.

“그거야 태자와 병관좌평의 공로지요!”

“감히 어라하의 명도 없이 하늘의 태양을 두고 맹서하며 김품석의 막료들을 살린 윤충은 그 형제인 성충과 다름없는 오만불손한 죄인이올시다!”

흥수는 그로 인해 대야성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왕당파 무리와 싸우기 위해 이리 나선 것이 아니기에 서둘러 의자왕의 관심을 끌어야 했다.

“어라하, 신의 말을 들으십시오! 서라벌에 입성한 연남산이 김춘추의 여식과 혼례를 치렀다 합니다!”

“뭐라? 누가 누구랑 혼례를 치러?”

흥수가 신라의 도성인 서라벌에서 벌어진 일을 말하자 마침내 의자왕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구려가 신라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전황 정도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의자왕이었으나, 백제와 신라 국경에 고구려군이 나타나는 등 극도로 어지러운 상황 속에 서라벌에서의 소식은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존심 강한 연개소문이, 제 아들을 그토록 증오하는 당나라 황제에 고개를 숙인 김춘추의 사위로 삼았다?

미심쩍으나 의자왕으로서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은고가 깔깔대며 비웃었다.

“도저히 들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라하. 풉! 송구합니다. 나 참, 웃음이 나서. 내법좌평이 진정 실성하였거나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

“실성한 것이 아니라 사실이라 알리는 것입니다! 신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세작들을 불러 직접 들어 보십시오!”

“연개소문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김춘추와 사돈지간이 된단 말입니까? 죽령 이서를 바치겠다며 거짓을 말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도 모자라 제 아들을 시켜 신라 여주가 쓴 치당태평송을 검수하게 하고 당나라 황제에게 바치라 한 이가 김춘추입니다, 연개소문과 고구려의 군부 세력이 이를 용인한단 말입니까?”

“그러면 그렇지!”

논리정연한 은고의 말에 의자왕이 재차 흥수를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아예 연개소문이 신라 여주와 혼례를 치렀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내법좌평. 흐하하.”

이어진 사타천복의 말에 흥수가 연회장에서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망할 것들!”

성충의 충고를 잊은 흥수는 결국 성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연회장에서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당장 하옥하라!”

그리고 결국 성충이 들어갔던 옥에서 처량한 처지를 맞이해야 했다.

* * *

“신라의 항복을 받아 내고 협조를 받게 된 것 또한 다행입니다만, 비담이나 염종을 저리 서라벌에 두고 가셔도 되겠습니까? 주군.”

평양, 요동, 요서, 가야, 북방, 서라벌 등 여러 등지를 옮겨 다니며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눈을 뜨기 시작한 설인귀가 국원성으로 향하는 도중 내게 눈치껏 묻고 있었다. 아무래도 김춘추나 신라 사절단이 주위에 있는 탓이기에 조심스러워 보였다.

“설 장군이 뭘 말하는지 제가 압니다. 그렇지만 염려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흐음, 주군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설인귀는 비담 일파로 말미암아 비롯될 몇 가지 일들을 미리 염려하고 있었다. 첫째는 신라 왕실과 그들이 동맹하여 고구려를 대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비담이 재차 귀족들을 선동하고 난을 일으켜 서라벌을 장악하는 사태일 것이다.

일단 나는 이미 서라벌을 나서기에 앞서 그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

사실 준비라는 걸 할 것도 없이 우선 신라 왕실과 비담의 동맹이 성사될 리가 만무했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라는 가치를 내세웠던 비담이었으며, 신라는 여전히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역적이 된 비담이 위기에 처했을 때 때마침 내가 가야로 상륙하여 그를 구제하였으니, 서라벌 귀족들이 만에 하나라도 비담과 내통할 리가 없다. 또 하나는 비담 소속 가야와 진한계 군졸들을 이미 삼한도행군에 속하게 하여 나를 따르게 하였으니 현재 서라벌에서 비담이 가진 군사로는 모험하는 것은 곧 죽음에 가까워지는 길이었다.

그런 이유로 중간에 염종이 날 찾아와 김춘추와의 동맹을 재고해 보라며 비담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비담은 끽해 봐야 신라 왕실이 딴짓을 하는지 혹은 귀족들 간 모의하는지 살피는 견제 도구 그 이상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고문 장군이 압량주에 주둔하고 계시고, 온사문 장군과 뇌음신 두 분 장군도 서라벌에서 한동안 머물며 지켜보고 계실 터이니 괜찮을 것입니다.”

시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귀도 밝은 걸걸중상이 나 대신 설인귀에게 그리 귀띔해 주며 안심시켜 주었다.

사실 그들이 아니더라도 법민이라든가, 알천이라든가 만만치 않은 신라 인물들을 알고 있기에 비담과 염종이 화백회의 견제 그 이상의 다른 일을 꾸미기란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검모잠 대형께서 추풍령을 모두 장악하셨습니다!”

“저희는 모두 고구려 고지에서 왔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그러던 차에 일선주 부근에서 검모잠이 추풍령 고개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죽령 아래 고구려 고지에서 대백제 전선으로 향할 삼한도행군 모병에 스스로 자원하는 이들이 생기고 있으니, 낙동강 중상류에 고구려의 세력권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새 부대를 편제한 뒤 한참을 지나자 걸걸중상이 멀리 조령 고개를 보며 외쳤다.

“마목현이 보입니다!”

가파른 고개는 북에서 남으로 가나, 남에서 북으로 가나 마찬가지로 험준했다.

그렇게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문경새재를 넘자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선도해가 마중 나와 있었다. 희미하지만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중원 땅에 다시 세워진 고구려 비석이 두드러졌다.

“어서 오시옵소서. 대막리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흰머리가 조금 더 늘어난 선도해가 나를 이끌며 연개소문에게 안내를 자처했다.

고개를 돌리자 연개소문과 다시 마주하는 것에 다소 긴장한 김춘추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딸의 손을 붙잡고 흔들며 해하지 않을 것을 넌지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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