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241화 (241/335)

241화 삼한의 정략 (6)

“전쟁은 끝이 났다. 신라 여주가 삼한도행군대총관께서 제의한 화합에 응하였으니, 너희 화랑들이 싸울 이유가 없다. 무기를 버려라!”

“어서 썩 무기를 버리거라! 고구려의 중리위두대형이 너희 신라 임금과 화해하였느니라.”

김흠돌과 연근행은 한껏 언성을 높이며 서라벌 월성 치안을 수습하고 있었다. 혹여나 아직 저항하려는 신라군이 남아 있을까 싶어 임하였더니 과연 산에서 내려온 무장 화랑들과 대치했다.

“이 고구려 도적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신국의 왕성을 더럽히다니!”

“대장군의 원수 놈들!”

고구려군을 마주한 화랑들은 저마다 눈에 독기를 품고 있었다.

“화랑들은 뭣들 하느냐? 어서 칼을 거두거라! 이자들의 말대로 전쟁은 끝이 났느니라.”

인근 산에서 수행하다 내려온 몇몇 어린 화랑들이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김유신 대장군의 원수라며 극구 저항하려 들자 김법민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타고 달려 나와 그들을 막았다. 이미 연남산이 서라벌에 입성하여 여주의 안내를 받고는 궁궐에 들어간 마당에 왕성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 사이에 유혈 사태란 있을 수 없었다.

다 죽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책임이니, 내가 막아야 한다!’

입술을 잘근 깨문 김법민은 책임을 통감했다. 아버지 김춘추를 만류하며 마지막까지 의심하고 고민하여 자신이 직접 연남산을 만나고 결정하겠다고 떼를 부린 통에 인근 산에서 수행 중인 화랑들과 낭도들이 미처 이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오나 대아찬! 어찌 고구려군이 폐하께서 계신 서라벌에 주둔한단 말입니까?”

“고구려 놈들이 공산에서 김유신 대장군과 우리 화랑 형제들을 죽였습니다. 이는 화합이 아닙니다! 어이하여 고구려의 편을 드십니까?”

“혹여 협박을 당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신국의 화랑들은 죽기 살기로 싸울 것입니다!”

혈기를 무릅쓰고 따져 묻는 총명한 화랑들의 물음에 김법민의 속이 쓰라렸으나, 즉시 품에서 진덕여왕의 교지를 보이며 외쳤다.

“폐하의 명이니라!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은 너희 화랑들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을 잊었느냐?”

화랑들에게는 백 가지 천 가지 말보다 다섯 가지 말이 더 확실한 법이다. 원광법사가 남긴 오계(五戒)를 밥 먹듯이 다짐하며 외치는 화랑들이 김법민의 말을 듣고는 이내 서로 눈치를 보다가 힘없이 칼을 버렸다.

“대총관의 명이다! 고구려 관군, 신라 군졸, 삼한 군졸 가릴 것 없이 모두 치료하라.”

그러자 연근행이 임유관에서 치안을 담당하며 부상병 치료에 대해 삼기군으로부터 철저히 교육을 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고구려군과 신라군 가릴 것 없이 부상을 입은 군졸들 치유에 나섰다. 무구류나 침을 불로 소독하는 작업과 손을 씻고 환부를 되도록 만지지 않는 것 등 남산이 가르쳤다는 위생이라는 관념을 군에 적용하면서 전시에 응급조치가 가능해졌다. 신속한 응급조치는 요서에서 당군과의 격전뿐만 아니라 공산에서의 전투에서도 톡톡히 그 효과를 보며 산악전에서 빛을 발했다.

부대마다 1할이 조금 모자라는 위생병을 별도로 두어 응급조치를 습득하게 하였으니, 군의 새 체계가 작동한 덕분이다.

“호태왕께서는 과거 왜적으로부터 온 나라가 불바다가 될 뻔한 신라토 내 백성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기꺼이 맹용하고 담대한 관군을 내려보내시어 구하시었으니, 그 후손인 우리가 서라벌 백성들을 해할 이유는 없소!”

“우리 삼한도행군은 삼한을 모두 취하려는 탐욕스러운 서국 당나라를 널리 알리기 위해 왔소이다!”

“우리의 대의는 이러하니, 각자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하시오!”

물론 그에 앞서 옥소와 걸걸중상, 걸사비우를 필두로 호태왕 방울을 달고 다니는 고구려군이 무고한 신라 백성들을 해치지 않을 것을 명시하고, 한글과 신라인들이 알아볼 수 있는 이두로 여기저기 벽보를 붙이며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침은 꼭 깨끗이 소독하고 맞아야 하외다. 아, 참고로 고구려의 대막리지분과 그 아드님이신 삼한도행군대총관께서도 모두 접종하셨소. 삼한도행군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오. 이게 어떤 원리로 중원에서 건너온 악병을 막는가 하면 말이외다. 바로 이 소에게서 나온 것을 이렇게 추출하여…….”

또한, 위생병들이 나서며 희망하는 신라인에 따라 중원에서 들여온 역병인 완두창을 미연에 방지하는 우두침을 놓게 하며 민심을 달래기도 했다. 두창 예방 효과와 붉은 발진, 흉터 등 부작용 위험의 쌍방에 대해서 이해를 한 다음 접종을 받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진군하는 신라 고을마다 한두 가구에서 꼭 완두창이 발생해 사람이 죽었는데 지난날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이후 병이 옳은 고구려군이 가야 원정 당시 일부 지역에 확산을 시킨 것인지, 가야 지역 고을에서 이따금 완두창이 발생한 여파였다. 이를 알게 된 위생병들이 남산의 명을 받고 적극적으로 점령지와 삼한 땅에 우두침 접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평양과 요동를 넘어 삼한 땅인 려주와 가야 지역을 집중적으로 접종하면서 완두창에 걸리거나 죽는 백성이 줄었고 다행히 삼한인들도 큰 의심 없이 응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말 신기하군!’

‘이런 걸 어찌 발견하셨는지!’

‘우두침 덕분에 완두창으로 죽는 백성들이 없어졌으니!’

위생병들 사이에서는 의학서에도 좀처럼 기록되지 않는 이런 예방법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고 신기하여 남산에게 따로 묻기도 하였으나.

-우두침은 머나먼 서국에서 수십 년간 검증된 예방법이니 삼한의 백성들에게 안심시키고 접종하도록 하시오. 화타의 침이니 무슨 병이든 낫게 하고 완전히 병을 예방한다는 혹세무민하는 다른 검증되지 않은 침은 오히려 병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 최하 5년 이상 임상해 나온 것이 아니라면 건강한 이가 결코 함부로 맞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고, 위생과 영양에도 곧잘 힘을 쓰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오.

오히려 이와 같은 답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우두침 접종 이후 두통을 낫게 한다느니, 고뿔을 한 방에 낫게 한다느니, 상업의 활성화로 한탕에 재물을 벌고자 등장한 온갖 돌팔이들로 우두침 접종에 상당히 차질을 빚은 지역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렇게 우두침이 완두창 예방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그러한 접종 방식이 태학 의학서에 기록되었고, 발 빠르게 삼한 지역의 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 *

“저쪽이 무척 소란스럽군요.”

“송구합니다. 아무래도 고구려군이 서라벌에 당도한 것을 아직 모르는 철없는 어린 화랑들이 있는지라.”

설인귀가 검지로 요란한 어딘가를 가리키자 김춘추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신라 국상의 아드님께서 가셨으니 곧 해결되겠지요. 하나 철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화랑도의 신조나 신라 화랑들의 용맹함이야 우리 삼기군도 익히 잘 알고 있으니, 잘 마무리될 것이란 뜻이외다. 아하하!”

“대체 화랑도의 신조를 고구려의 장군께서 어찌 알고 계십니까?”

“병법에서 이르길,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 하였지요. 주군께서 화랑들의 오계(五戒)를 하나하나 일컬어 주시며 그들의 정신 상태를 말씀하셨으니, 제아무리 분으로 얼굴을 칠하고 소년 같은 아름다운 용모의 화랑들이라도 우리가 방심하지 않고 싸운 것입니다.”

그리 자신 있게 말한 설인귀는 처음에는 화랑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으나 가야 땅에서 김유신의 신라군과 맞서며 어린 화랑들의 임전무퇴(臨戰無退) 정신을 몸소 느끼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전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다시 무장하여 달려드는 신라 화랑들의 정신은 진짜였다. 그러한 화랑들이 서라벌 내에 수천에 이른다면 아무리 수배의 달하는 군사라도 결사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 애초부터 확신했다.

그러나 가야에서 보고 느낀 화랑의 신조는 설인귀가 후일 삼기의 기강을 잡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화랑들이 적들과 맞서는 정신을 삼기군이 받아들여 요동과 요서, 북방에서의 실전을 맞이하며 성장하였고, 마침내 공산에서 김유신을 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놀랍군요. 대막리지의 아드님이 화랑도의 신조를 알고 있다니.”

한편 김춘추는 자신과 두 아들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재차 확인했다. 고구려와 백제라는 두 강국을 맞아 신라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진평왕 때 세워진 신라군의 기강이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이하 오계(五戒)를 기본 신조로 삼은 화랑들은 줄곧 신라군의 모범이자 기백이었다. 고구려가 마찬가지의 기백을 지녔다면,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러한 명철함이 나 설인귀가 당나라 황제 폐하를 버리고 우리 주군을 따르는 이유가 아니겠소이까? 흐하하!”

“그렇군요. 어쩐지, 알 것도 같았소이다.”

김춘추가 침울해하자 설인귀가 주변 눈치를 보며 다가가 말했다.

“그것보다 아까 보니까 어린 따님이 있으시던데.”

“그, 그건 왜 갑자기 묻는 것이오?!”

당황한 나머지 김춘추가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알게 모르게 들리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 지역을 점거한 고구려군이 서옥을 지어 가야의 처자들과 혼인을 올린다는 소문을 말이다. 그것이 최근 고구려가 진입한 신라 영토 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시구려! 내가 아니라, 우리 주군 말이오. 우리 주군.”

“중리위두대형?!”

설인귀의 말에 궁 앞에 선 김춘추의 발걸음이 멈췄다. 때마침 진덕여왕의 안내를 받아 어전에 들어서는 연남산의 모습이 보였다.

* * *

고구려의 안학궁과 백제의 사비궁보다 유서 깊은 왕성, 삼국의 도읍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라의 서라벌에는 기록에서나 보던 숭례전·강무전·명학루·월정당·월상루·망은루 등의 온갖 건물과 임해문·인화문·무평문·현덕문·귀정문·준례문·적문 등 크고 작은 출입문이 있었다.

이 중 중심이 되는 정전의 이름은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법흥왕이 즉위했다는 자극지전(紫極之殿)이며, 처마 끝의 서까래 위에 짧은 서까래를 잇대어 달아 낸 겹처마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강 사이에 남북 방향을 기본으로 하며, 둥글게 기울어진 초승달 모양인 월성 언덕에 자연지세에 맞춰서 전각을 배치했으니 가히 한 나라의 아름다운 도읍다웠다.

‘지금이 7세기 중순이라는 걸 감안해도 무려 700년 왕성이니 일개 무덤이나 사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들이 많이 묻혀 있겠어.’

1,000년 왕국이라는 신라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있음에도 새삼 유구한 서라벌 왕성의 세월을 눈으로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한때 고고학자가 목표였던 입장에서 현대의 기술로도 적어도 100년 이상은 연구해야 알아낼 서라벌 시대의 층과 배치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보는 서라벌은 그야말로 학구적인 고고학자들의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분부하신 대로 연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내게 다가온 상대등 알천이 그리 말했다.

호우총에서 한 바퀴 돌아 입성한 신라 궁궐에서 연회를 열라 지시한 것은 나였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긴 회포를 풀고, 피로한 군사들을 위로하며 또 신라 여왕과 귀족들에게 말을 편하게 하기에는 이만한 자리도 없으니까.

“신주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아직 고구려와 신라가 화합한 것을 모르니 제 아버님이신 대막리지의 군사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귀형의 말을 듣고 급히 전령을 보내 신주 군주에게 고구려와 싸우지 말고 서둘러 서라벌로 돌아오라 명을 내려 두었습니다.”

진덕여왕의 말을 들은 나는 여왕과 나란히 앉은 상석에서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마신다는 차를 가볍게 홀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국원성을 수복하고 신라가 삼한도행군에 의해 반으로 절단이 난 상황에서 신주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연호를 쓴다는 여왕의 약조와 당에 선전포고 한다는 화백회의의 문서를 받았으나, 형제 김유신의 죽음으로 누구보다 내게 강한 분개심을 가질 김흠순을 서라벌로 소환해야 했다. 백제를 치다가 신라에게 뒤통수를 맞아 줄 심산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여기다 삼한도행군의 제장들과 신라 귀족들을 엮어 뿌리 깊이 내린 근친 문제도 해결을 보고자 했다.

“우리 주군께서는 어느덧 성년식을 올릴 나이올시다. 혹여 적합한 규수가 있다면 신라의 여주께서 한번 알아봐 주심이 어떻습니까? 흐흐.”

그런데 그때 신라주를 원샷에 비운 설인귀가 예기치 않게 끼어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