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서벌, 서나벌, 서라벌로 (9)
연개소문의 아들과 직접 담판을 짓고 오겠다는 김춘추의 대범한 선언에 고요한 적막에 잠긴 신라 정궁 월성 왕궁 내에서는 귀족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간 보여 준 김춘추의 외교 능력을 의심한다고 해도 고구려 대군을 목전에 둔 현 서라벌 사정에서 당장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 누구라도 이번에는 김춘추의 달변으로 고구려군을 물리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전회의를 마치고도 어전 내에 진덕여왕과 김춘추, 알천, 법민 네 사람이 남아 조석(朝夕)을 가리지 않고 논의를 계속했다.
“전쟁광인 연남산을 설득하는 것이 정녕 가능하겠소이까?”
이는 김유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수라를 몇 차례 물린 진덕여왕의 염려가 가라앉지 않은 탓이었다.
“어서 말씀해 보시오, 이찬간.”
“저들이 내건 삼한도행군이라는 군단의 이름만 보아도 알겠습니다. 삼한을 평정하겠다는 연개소문의 야욕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폐하, 춘추 공.”
나라의 위기 속에 김춘추를 향한 진덕여왕과 상대등 알천의 우려는 그러했다. 신라를 치지 말라는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거듭 어긴 고구려가 이제는 서라벌까지 군사를 내려보냈다. 그것도 삼한에서 징발한 군사까지 더해 기어이 삼한을 송두리째 먹겠다는 야심을 내보인 것이다.
“…….”
질근 입술을 다문 김춘추는 애써 말을 아꼈다. 그간 고구려, 왜, 당을 연달아 방문하며 깨달은 것은, 책임을 지겠다는 것과 결과를 얻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인지하게 된 탓이다. 고구려의 의중이 명확히 드러난 이상, 또한 서라벌 귀족들을 거듭 실망시킨 이상,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긴 여주와 알천에게마저 지키지 못할 약조를 할 수는 없었다.
“아버님, 이걸 보십시오.”
그때 압량주에서의 소식을 듣고 온 김법민이 김춘추에게 대뜸 붉은 서신 하나를 건넸다.
“법민아, 이게 무엇이냐?”
면목이 없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은 김춘추가 법민을 보며 물었다.
“연개소문의 아들이 원하는 것이 여기 들어 있사옵니다.”
범민의 말에 김춘추가 바짝 긴장해서 서신을 열어 보았다.
[고구려 태왕의 은택이 황천(皇天)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에 떨쳤느니. 삼한의 중원이 다시 고구려에 있음이라. 맹서를 어기고 당과 화친한 신라의 불손함에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기신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 그 옛날 신라왕처럼 태왕의 민(民)이 된 자로서 어서 나와 노객(奴客)을 청하라. 태왕께 귀의하여 분부를 청하라. 굳게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나와 청명(聽命)하라.]
김춘추는 떨리는 손으로 냉큼 그 서신을 구겨 품속에 넣고는 숨기려 했다. 도저히 여주에게 보일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어서 내게 보이시오, 이찬간.”
“폐하, 이는 폐하께서 보실 만한 것이…….”
“어서 보이십시오! 여기까지 와서 춘추 공만이 책임질 만한 일이 아닙니다.”
알천이 끼어들었고, 김춘추는 하는 수 없이 붉은 서신을 진덕여왕과 알천에게 돌리며 보여 주었다.
“내가 항복하면 저들이 물러간단 말이오?”
“폐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신이 가서 저들의 노객(奴客)을 청하면 될 것입니다.”
진덕여왕의 말에 애가 탄 김춘추가 참지 못하고 그리 소리쳤다. 이미 당나라 황제 앞에서도 여러 차례 했던 일이었다. 연개소문과 왜의 권신에게조차 거듭 허리를 굽히며 치욕을 감수했다. 그 어떠한 치욕이라도 자식을 잃은 고통만 하지 않았기에 기꺼이 감수했다.
이번에도 자신이 허리를 굽히기만 하면 끝날 것이라 믿는 김춘추였다.
* * *
“김유신 대장군이 쓰러졌다!”
“신국의 명장이 공산 아래 묻혔다!”
김유신이 공산에서 쓰러졌다는 소문은 곧 인근 지역 내 삽시간에 퍼졌다. 초상집이 된 신라 백성들의 분위기로 봐선 아마도 지금쯤 서라벌을 포함한 진한 땅 전체에 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를 전해 들은 신라군은 정확히 두 부류였다. 하나는 화랑의 정신으로 한참 선배 격인 김유신의 뒤를 좇아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자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비담과 염종, 흠돌과 진공 같은 진한계 및 가야계 인사들이라는 고구려 귀부의 좋은 예가 있으니 마땅히 이들을 좇아 삼한도행군의 뒤를 따르겠다는 부류였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어디서 또 이리 저항을 하느냐!”
첫 번째 부류야 어차피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저항할 것이니, 한바탕 조랑말을 몰고 있는 옥소와 설인귀에게 맡기면 그만이었다.
“삼한도행군을 따르겠습니다!”
“고구려 고지에서 왔습니다. 저흴 받아 주십시오!”
문제는 두 번째 부류였다. 고구려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현명한 마을이 결정하여 나섰든, 과거 태왕의 군사가 주둔했던 여파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그런 결정을 내렸든, 제 발로 찾아와 종군하겠다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군사 보충은 신라를 더 빨리 무너뜨리기에 필경 도움이 될 일임은 분명하다.
“삼한도행군에 종군하여 삼한일통에 동참하겠다는 마음은 가상하나, 그들은 얼마 전까지 신라 백성이었습니다. 신라 백성이었던 무리가 신라의 여주를 향해 칼을 들이미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이 아니니 마음만 받고 마을 방위에만 힘쓰게 하도록 하십시오.”
기꺼이 종군하여 삼한일통에 일조겠다는 신라인들을 내친 이는 다름 아닌 나였다. 당장 김유신과의 전투에서 잃은 군사를 보충하겠다고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었다. 그들을 징발하는 일은 남은 마한을 통일할 때 써도 늦지 않는다.
“제 발로 찾아와 종군하겠다는 진한의 백성들입니다. 삼한도행군의 대의와 그들의 뜻이 같사온데 그리 모질게 돌려보내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상대등의 말씀대롭니다! 자고로 옛말에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백제와의 잦은 전쟁으로 신라 백성 하나하나가 무시하지 못할 무예를 갖추고 있습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 결정에 찬물을 끼얹은 이는 공산에서 죽지랑을 놓치고 돌아온 신라인 비담과 염종이었다.
그들이 공연히 트집을 잡아 헤살을 놓는 이유는 뻔했다.
전쟁이란 본디 한 세력이 무리를 거느리며 세력을 확장하는 좋은 기회이다. 제 발로 찾아와 비담과 염종의 세력이 되겠다 자처하는 신라인들을 그냥 돌려보내려는 내가 방해를 하였다 여겼겠지.
김유신이 쓰러지고, 서라벌을 목전에 둔 지금 신라의 새 권력 구도가 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한 여파였다.
미안하지만 김유신의 수급을 비담과 염종에게 거두게 하지 않게 한 그 순간부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겠다는 내 의지를 표방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내 아버님이신 대막리지께서는 신라토 내의 여러 사람을 모아서 움직이게 하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그들이 자칫 배신을 할 수 있다 경고하시면서요.”
적당히 핑계를 댈 만한 인물이 때마침 중원 지방에 내려와 있었다. 연개소문이 신라의 대표 배신자들인 비담과 염종을 염두에 두고 할 법한 말이기도 했다.
“소장은 대막리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중리위두대형의 생각과 같사옵니다. 신라 백성이 스스로 종군하여 신라 왕궁을 넘보는 행위는 대막리지께서도 그리 반기실 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뇌음신 장군은 뭣 하시오? 고구려 고지에서 내려온 백성들을 정중히 돌려보내시오!”
“아, 알겠소이다!”
내가 더 나설 필요도 없이 연개소문의 명에 따라 내려온 온사문이나 뇌음신이 알아서 비담과 염종의 야욕을 꺾는 데 보탬이 돼 주었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큼큼, 저도 이만.”
한껏 불쾌감을 드러낸 비담과 염종이 그리 자리를 비웠고 한동안 분위기가 흐려졌다.
“비담은 가야인들을 배척하는 데 일선에 섰고, 또 신국의 권좌를 노렸던 잡니다.”
“믿을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흠돌과 진공이 내게 주의 주듯 그리 주절거렸다. 이쯤 되니, 삼한을 하나로 통일하는 일이 온전히 힘만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권력자의 탐욕이고, 지역 갈등이고, 도무지 피해 갈 수 있는 일들이 없군.’
복잡한 상황에 막사 밖으로 나가 보았다.
다그닥 다그닥.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낙동강 지류를 따라 올라오는 군사 하나가 붉은 깃발을 등에 맨 채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급보를 전하는 전령이기에 군졸들이 분분히 길을 비켜 주고 있었다.
“대총관! 부총관께서 보내신 급보입니다.”
삼한도행군의 부총관이라면 응당 고문에게서 온 것이었다.
말에서 내린 전령이 나에게 서신 하나를 건넸다. 그런데 그 서신은 고문이 작성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고구려 장수의 편지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색상의 끈과 매듭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옅게 비치는 문체도 그러했다.
“먼저 말하거라. 고문 장군께서 압량주를 넘으셨는가?”
내 옆에서 성미 급한 온사문이 바로 묻자 전령이 예를 갖추며 답했다.
“예. 고문 장군과 걸걸중상, 걸사비우 장군께서 무사히 압량주를 점령하였습니다! 한데 고문 장군이 압량주에 입성하자마자 서라벌에서 김춘추가 보낸 서신이 당도하여 이리 급히 전해 올리는 것입니다.”
예측대로 이건 고문의 서신이 아니었다. 설마 김춘추가 직접 보내왔을 줄이야.
나는 고구려에 대항해 최후의 결사 항전이냐, 항복이냐를 두고 밤새 고민했을 법한 김춘추의 심경을 떠올리며 서신을 열어 보았다.
[나와 내 아들 법민은 고구려와 백제가 순치(脣齒)처럼 서로 의지하여 다투어 군사를 일으켜서 함께 침략해 신라의 대성(大城)과 중진(重鎭)을 차지하려는 줄만 알고 심히 고뇌에 빠져 당나라 황제께 고구려와 백제가 침탈한 성을 돌려주도록 조서를 보내 달라 요청한 것입니다. 이리 늦게나마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은혜를 깨달았으나 신국의 강토는 날로 위축되고 위력은 아울러 시들고 있으니, 죄를 구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바라건대, 태왕께서 조서를 내려 침탈한 성을 돌려주게 하고 죄를 구하게 하소서. 만약 조서를 받들지 않으면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목숨을 칼도마에 걸고서 무기나 찾아내어 서벌에서 거역한 자들의 목숨을 치라 이를 것입니다. 고구려의 대총관께서 이 서신을 받았다면 일컬을 만한 덕망으로 저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기를 바랍니다.]
누가 김춘추 아니랄까 봐 그럴듯한 사정으로 핑계를 대고 있었다.
정신 못 차린 내용도 있으나 죄를 구하겠다니, 확실히 이번에는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하긴 한 모양이다.
“이제 서라벌만 남았습니다!”
“신라의 숨통을 끊어 버리십시오!”
“은혜를 저버린 신라를 용서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서신을 들고 삼족오 깃발이 드리운 압량주에 이르자 제장들이 열을 올리듯 한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일개 군졸들조차 신라 왕궁의 보물 소문이라도 들었는지 서라벌 방면으로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서라벌로 진군하라.”
준비를 마친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옷만 정갈히 갈아입고서 압량주를 떠나 서라벌로 진군을 명했다.
와아아아!
하나의 국가가, 하나의 수도에서 천 년을 영속한 그 땅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하룻밤에 당도한 월성 앞에는 흰색의 도포를 입고 선 김춘추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