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서벌, 서나벌, 서라벌로 (5)
“서둘러라! 저 비탈길만 틀어 지나가면 대장군께서 친히 우릴 마중 나와 주셨을 게다!”
고문의 매복, 비담과 염종의 기습과 걸걸중상이 거느린 선기군의 연이은 역매복과 습격을 피해 간신히 김유신과 약속했던 산지까지 내려온 천존은 일부러 거칠게 외치며 지친 신라군을 독려했다. 인근 산성의 군사까지 바짝 모은 9천의 신라군이 허를 찌르는 연이은 적습으로 산에 뿔뿔이 흩어지면서 남은 군사는 반의반에도 채 미치지 못하였다.
먼 북쪽에서 내려온 고구려 도적들이 서라벌 100리 밖 산의 지형을 알 리가 없다고 오판한 대가는 이처럼 혹독했다.
‘공산이 마치 제집 앞마당 사냥터인 양 날뛰는 형국이 아닌가!’
언덕과 숲, 고지를 계속해서 선점하며 전개하는 매복과 역매복에 크게 당하였다. 신라군이 들어서는 곳곳마다 마름쇠를 설치하는 등 허를 찌르는 함정까지 파 놓아 몇 없는 신라 기병을 무력화하는 고구려군의 여유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했다. 인근 산성에서 올라오는 신라군 원병마저 제대로 합류조차 하지 못한 채 괴멸당하기 일쑤였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 천존은 무려 십수 년 대치해 온 백제와의 전투에서조차 좀처럼 없던 공포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서둘러 대장군과 합류해야 한다! 이미 공산에 대거 포진한 고구려 놈들을 상대로는 이길 수가 없다!’
김유신과 합류하면 곧 그런 공포심이 조금은 누그러질 것이라 굳게 믿은 천존은 신라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준마의 말고삐를 채며 서둘렀다. 여차하면 서라벌 왕성의 군사들과 합류하여 최후의 일전을 치를 준비마저 해야 할지도 모를 위기였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서라벌 귀족들로부터 책망을 받겠으나, 고구려군을 막을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히이잉!
하지만 그런 천존의 희망을 깨뜨린 말 수천 마리가 천존과 신라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파 소리 같은 기이한 짐승의 울음소리는 삼한의 말이 아니라 사람을 태우고서 과실나무 가지 밑으로 지나갈 수 있다는 의미의 작은 고구려 짐승, 과하마(果下馬)의 것이었다.
“천존! 네놈은 이미 우리 주군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네 상급자의 목을 거두기 전에 너를 먼저 거두어 주어야겠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한다면, 내 특별히 주공께 네 그 알량한 목숨만은 보존해 달라 청하여 줄 것이다!”
김유신을 쫓는 척 이내 말머리를 틀어 활을 거두고 묵직한 방천화극을 거머쥔 장수 설인귀와 비슷한 크기의 대도 한 자루를 움켜쥔 연근행이 그렇게 외쳤다.
“닥치거라! 이 고구려 도적놈들이, 우리 대장군을 어찌한 것이냐?”
김유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불현듯 나타난 고구려 깃발에 천존은 이성을 잃은 듯 그리 부르짖었다. 공산에 오른 지 불과 며칠 만에 장수로서 가져야 할 신중함마저 잃고 말았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김유신은 너희를 버리고 이미 도망갔느니라.”
이 험악한 산세에 고립된 신라군에게 어떠한 말이 가장 심리적인 타격을 줄지 연남산으로부터 익히 배워 알고 있는 설인귀는 나뭇가지에 걸려 나부낀 흙먼지 속의 김유신군의 깃발을 방천화극에 꽂아 드높이 올렸다.
“놈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서둘러 쳐라!”
이내 우왕좌왕하고 있는 천존과 신라군을 향해 연근행이 말갈 군사들을 거느리며 거침없이 진격을 명했다.
“산기군은 북방 기마술의 무서움을 보여 주어라!”
뒤이어 설인귀가 과하마의 말 등을 걷어차며 산기군을 몰고 진격했다. 그저 북방의 기마술이 신라군보다 더 우세하다는 허세를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확실히 산에서는 과하마가 더 낫구나!’
수평 이동에는 과하마가 준마를 못 따라가지만, 수직 이동에는 준마가 과하마를 못 따라간다. 즉 어느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은 상태인 수평보다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서는 과하마가 기동력에서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연남산이 기동력과 체력을 자신하며 황산하가 아니라 공산을 신라 정병과의 최종 전장으로 고른 것은 그저 군사들의 능력을 믿은 것이 아니라 과하마가 전술적으로 움직이는 데 훨씬 유리한 까닭이었다.
‘산기군과 말갈군이 날뛰기에 이만한 곳이 없지!’
연근행마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군을 운용하고 있었다.
산속에서 사냥을 즐겨 하는 북부 산악 지대의 고구려인들에게 과하마란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그런 도구였다.
으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고구려군의 맹렬한 기동력에 신라군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신라가 자랑하는 장창단도 경사진 지형에서 쏘아 대는 맥궁과 경기병들이 날리는 비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랴! 이랴!”
무너지는 신라군을 뒤로하며 천존이 샛길을 발견하고는 준마를 재촉했다.
“어딜 도망가느냐!”
그러나 이미 자신을 목표로 삼은 설인귀를 상대로 달아나기란 역부족이었다.
‘내가 평생을 기른 준마가 저런 조그마한 말의 추격을 허용하다니!’
천존은 놀라운 속도로 쫓아오는 설인귀를 보며 두려움을 가졌다.
무장에서도 설인귀는 가벼운 경기병에 가까워 두툼한 찰갑으로 무장한 천존이 도무지 따돌릴 조건이 아니었다.
다그닥! 다그닥!
압도적인 힘과 속력. 천존의 바로 지척까지 따라온 설인귀는 거침없이 방천화극을 휘둘렀다.
휘우웅-!
바람을 가르는 단 한 번의 일격에 목이 떨어졌다. 뒤늦게 천존의 뒤를 쫓아온 신라군은 그 광경을 보고는 일제히 얼굴이 창백해지며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신라 장군의 수급을 베었다!”
이내 산속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설인귀의 목소리에 한참 전투를 치르던 신라군은 전의를 상실하며 도주하거나 투항하기 일쑤였다.
이윽고 상황이 정리되었고, 연근행은 설인귀에게 다가가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내 설 장군에게 졌구려. 적장의 수급은 내가 베고 싶었는데.”
“정작 중요한 목이 언덕 아래에 있소이다. 걸걸이 녀석에게 질 수 없으니 서둘러 갑시다.”
설인귀는 아쉬워하는 연근행을 황급히 재촉했다. 그 말대로 신라를 대표하는 장수가 아래에서 삼한도행군의 대총관과 대치하고 있었다.
“좋소이다! 설 장군. 내 이번에야말로 적장의 목을 주공께…….”
“산기군은 뭣들 하느냐! 당장 김유신을 잡으러 간다!”
연근행의 말을 끊은 설인귀가 전속력으로 김유신을 쫓았다. 반대편 언덕에서 앞서 내려가는 걸걸중상과 고문 그리고 비담과 염종마저 목격한 참이다.
제일 중요한 목이 남아 있는 만큼, 그들에게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 *
“수레만 노리지 말고 고구려 놈들의 기병을 노리란 말이다!”
신라군의 쇠뇌와 화살 공격이 고구려군이 전면에 내세운 수레는 물론이고, 고구려 보병들이 열에 숨겨 둔 수레 방벽에도 번번이 막히자 조급해진 김유신이 이를 악물며 외치고 있었다.
김유신은 도무지 공세를 펼치는 장군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성급해 보였다.
분명히 유리한 쪽은 기동력을 앞세운 기병이 주력이며, 수적으로도 우세인 고구려였으나 공세는 여전히 신라군이 주도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 공세에 대한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을 경험 많은 노익장 김유신은 알고 있기에 갈급해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수레 사이로 날아드는 공격으로 설사 고구려군이 피해를 약간 입는다 쳐도 신라군의 화살과 쇠뇌를 무력화한다면 이후 벌어질 포위 공격에도 훨씬 적은 피해로 마무리 짓는 것이 가능할 터.
“조금만 더.”
그런 계획에 나는 신라군의 화살 세례 공세를 목견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후백제의 견훤은 바로 이 전장에서 적은 군사로 수배가 넘는 왕건의 군사를 모조리 괴멸했다. 김유신의 신라군이 딱 내가 거느린 고구려군의 병사를 이길 수 있는 견훤의 처지와 같은 셈이다.
견훤과 김유신, 두 인물을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경륜을 갖췄을 뿐 아니라 전장을 누벼 온 그들은 언제라도 전세를 바꿀 수 있는 역전의 용사임이 분명했다.
그저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이 팽팽한 긴장감의 전황만 분석해 보아도 그랬다.
슝슝슝-!
특히나 표적이 큰 말들의 배나 몸통은 신라군 노사들의 타깃이 되기 충분했다. 당나라 황제 이치조차 개량 쇠뇌인 신라의 천보노를 탐내며 군사 기술을 얻고자 했으니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흐히잉.
아니나 다를까, 무지막지한 신라 노의 사거리에 선회하던 기병 수십이 비명을 지르며 말들과 함께 쓰러졌다. 조랑말도 아닌 한 땀 한 땀 미늘로 이루어진 전투용 마갑을 입힌 말들이 신라군 쇠뇌에 고슴도치가 되어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나부라진 것이다.
‘이세민의 후계자가 괜히 탐내는 무기가 아니었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아군의 대열을 유지하고는 전방의 상황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신라가 공세는 몰라도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도 아리수 유역을 꿋꿋이 지킨 것은 다름 아닌 포노와 천보노와 같은 신라의 개량 무기 덕분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버텨라!”
진공이 이끄는 가야군 보군들조차 어느새 진형만 유지한 채 진군 속도를 내리고 장방패로 최대한 몸을 보호하며 신라군의 쇠뇌를 막기에 급급했다.
신라군과 장기간 대치한 경험에서 나오는 움직임이었다.
반면 설인귀와 걸걸중상은 북방에서의 경험만으로 이성산성을 넘으려다 성벽에 설치된 신라 노의 공격에 크게 당하였다.
내가 참전했던 북한산성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함정도 함정이지만 포노와 같은 무기의 위협 때문이 컸다.
삼한도행군의 목적은 그저 한 전투를 끝낸다거나 서라벌만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삼한 전체를 일통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리한 전황일지라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
신라군의 화살이 다할 때까지 버티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라면 나는 기꺼이 수레를 한 트럭이라도 더 쌓아 올릴 작정이다.
“선기군이다!”
“고문 장군이다!”
그런 생각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전방에 집중할 때, 김유신이 수레 장벽에 화살과 연노 공격이 뻔히 막히는 상황임에도 재촉했던 이유가 해 지기 전에 나타났다. 매복과 역매복을 성실히 수행하며 신라군을 이곳까지 몰아붙인 걸걸중상과 고문 부대가 당도했다.
“으음?”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시선의 움직임과 함께 한 군사가 반대편을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저쪽을 봐! 산기군과 홍기군도 왔다고!”
“그게 사실이야?”
웅성웅성. 군졸들의 외침에 나는 반가움을 느꼈다.
배후 호수인 공산호 방향에서 달려온 삼기의 두 깃발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쫓아오라고 신호를 남겨 두긴 했는데 설마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반가운 두 얼굴이 선봉대 기병들을 선도하며 달려오는 조랑말 위에 보이기 시작했다.
“대총관을 구하라!”
“작은 막리지께서 위험에 처하셨다!”
숨을 몰아쉬는 그들이 그렇게 외치며 기병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레 장벽을 치며 김유신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연출이 그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한 모양이다.
자칫 귀한 기병들이 신라군의 쇠뇌 공격에 휘말릴 수 있어 슬슬 반격 준비를 해야겠다.
사방에서 나타난 고구려군으로 인해 신라군의 시선이 분산된 바로 지금이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이다!”
잠시 후 내가 외친 구호에 수레 안에 숨겨 두었던 맥궁과 노를 꺼내 든 백호 부대가 일제히 수레 쪽으로 치우친 신라군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후방의 언덕과 사방에서 몰려오는 고구려군으로 인해 신라군이 그들의 사거리를 잊은 채 수레 장벽에 가깝게 진군해 있었다. 신라군의 천보노보다 사거리에서 자신 없던 나는 대응을 최소화로 계속해서 신라군을 수레 쪽으로 끌어들였다.
신라군과 아군의 화살이 멈추고 나면 공산을 크게 울릴 총공세가 벌어질 것이다.
* * *
흙먼지를 뒤집어쓴 신라군 전령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서라벌 왕성 앞에 당도했다.
“…대장군.”
성벽 위에서 전령병의 표정을 읽은 김춘추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승전보와는 거리가 멀 것임을 진작부터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