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223화 (223/335)

223화 황산하 전투 (2)

“만일 다른 나라의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라? 이것이 진정 성충이 짐에게 남긴 마지막 당부였더냐?”

“그렇사옵니다! 어라하.”

밤새 흘린 눈물로 퉁퉁 부은 얼굴의 흥수는 사비궁 궁전에 들자마자 차분히 성충의 유언을 전하고는 그렇게 대답했다.

“죄인 성충이 어라하의 백제를 우습게 보아도 한참이나 아래로 보았습니다! 감히 어느 나라의 병사가 대백제국의 탄현(炭峴)을 넘을 것이며, 기벌포(伎伐浦)에 들어온단 말입니까? 이는 어라하의 백제군을 극도로 멸시한 것입니다!”

한편 의자왕의 친위 정변을 부추겨 성충을 비롯한 반대파 귀족들을 정사암에서 몰아내고, 유유히 태자를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교체하며 백제 황후에 오르는 데 성공한 군대부인 은고는 이제는 자연스레 의자왕과 함께 사비궁 어전에 입장하여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어라하.””

성충에 이어 내신좌평 겸 대좌평에 오른 사타천복을 비롯하여 각기 백제 조정의 요직을 맡은 내두좌평 사타상여, 병관좌평 은상, 조정좌평 국변성, 위사좌평 손등 이하 은고를 따르는 왕당파 귀족 무리 모두가 눈을 빛내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자 의자왕이 허벅지를 탁 치며 어좌에서 벌떡 일어섰다.

“황후와 그대들의 말이 옳다! 참으로 고약한지고. 감히 짐을 능멸한 죄인 성충이 제 주제를 모르고 마지막까지 설치려는 게 아니더냐? 짐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신라의 성 40여 개쯤은 다시 취할 수 있거늘, 끝까지 이런 같잖은 소리나 내뱉고 가다니! 짐이 태자 시절 때의 옛정을 생각하여 그 시신만은 고이 수습해 장사 지내 주려 하였건만. 어리석도다, 참으로 어리석어!”

그 반응에 욱한 흥수는 마지막까지 성충의 충심을 몰라주는 의자왕을 향해 한 소리 하려 했으나 이내 꽉 쥔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단념했다.

여기서 백날 싸워 봐야 백제를 위한 일과는 거리가 멀며, 조정이 왕당파 무리로 가득해진 지금, 오히려 자신이 쫓겨날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성충의 유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 또한 흥수는 잘 알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게. 흥수, 자네가 나 대신 끝까지 조정에 남아 있어 주어야 하네. 자네는 백제에 희망이 없다고 여길지 모르나, 아직 이 나라에는 자네나 계백과 같은 충신들이 여럿 있으이. 그들을 위해서라도 아주 조금만 허리를 낮추시고 성정을 다스리시게. 내 마지막으로 부탁하네.

숨을 한차례 고르며 꾹 참은 흥수는 성충이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유지를 기억했다. 더는 백제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켜서는 안 되며 급변하는 정세에 맞추어 백제인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였다.

이어 목적을 분명히 한 흥수가 의자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결단을 내렸사옵니다, 어라하.”

“연개소문이 결단을 내리다니?”

“신라를 끝장내기로 말이옵니다. 그 아들에게 대병을 내어주어 신라를 치라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 세작들이 수만의 고구려 군사가 평양을 나서 모을동비홀을 거쳐 국원소경으로 향했다 입을 모아 전해 왔사옵니다.”

“대병이라니? 기껏해야 지난번처럼 1, 2만의 군사이겠지. 그 정도 군사가 고구려와 신라 국경에서 날뛰는 일이야 이미 수도 없이 일어났거늘, 무엇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홧김에 정복을 뒤로 젖힌 의자왕이었으나 흥수가 바로잡고자 더욱 다그쳤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지난번 때와는 분명 다릅니다! 그보다 많은 군사가 국원소경의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를 넘었사옵니다! 어라하.”

“그 고개를?!”

연신 흥분하며 외치는 흥수의 말에 의자왕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고 은고가 특유의 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후훗. 당나라와 싸우느라 바쁜 고구려가 대체 어떤 여유가 있어서 대병을 이 남쪽까지 내려보낸단 말입니까?”

“군대부… 으읍.”

흥수는 은고를 향해 얼마 전처럼 군대부인이라 부르려다 한데 모이는 주변의 싸늘한 시선을 받고서는 곧바로 정정했다.

“화, 황후께옵서는 고구려의 속내를 모르십니다.”

“모르는 건 내법좌평입니다! 어라하께서도 넘기 주저했던 그 험한 고개를 고구려가 어찌 대병을 몰고 넘었다 확신하는 겝니까? 설마 김춘추와 김유신을 그리 얕보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비웃는 듯한 은고의 지적에 내두좌평 사타상여와 병관좌평 은상이 재빨리 거들었다.

“황후 폐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그 험준한 고개에 신라군이 배치돼 있지 않을 리 없지요.”

“김유신이 그간 백제와 신라를 둘러싼 고개를 철통같이 지켰습니다. 여태 우리 백제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연유지요. 한데 고구려의 대병이 어찌 그리 쉬이 그곳을 넘는단 말입니까? 내 듣자니 죽령에 이미 2만에 달하는 고구려군이 내려와 김유신에게 크게 패하고 물러갔다고 들었습니다만?”

두 신하의 말에 수긍한 의자왕이 흥수를 타박했다.

“내법좌평이 고구려의 동태를 잘 안다 하는 것도 이제 다 옛말이 되었구만. 그 말이 100번 옳다 하여 고구려의 별동대가 국경에서 신라와 맞붙든,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를 넘었든, 추풍령을 넘었든, 짐의 눈에는 그저 국경에서 벌어지는 아주 작은 싸움에 불과하지. 여봐라! 지난 어전 회의에서 짐과 황후가 채택한 계책은 어떠했는가? 정사암에서 아직도 결정을 못 하였는가?”

화제를 돌리려는 의자왕의 부름에 병관좌평 은상과 조정좌평 국변성이 기쁘게 읍했다.

“정사암에서 말하길 모두가 어라하의 계책을 가리켜 신묘하다 입을 모았습니다. 지난날 어라하께서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염려하시어 당항성을 오래 치지 못하고 군사를 물려 돌아오셨으나, 이번에야말로 그곳을 취하고 옛 선조들의 터전인 욱리하를 도모할 발판으로 삼으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윤충으로 하여 대야성을 다시 도모하라 하신 것도 실로 절묘한 계책이라 사료됩니다. 김유신이 죽령에서 고구려와 싸우느라 그곳의 경계가 약해져 있을 테니 말입니다. 흐흐.”

그들의 말을 들은 은고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연개소문이고, 그 아들이고, 제아무리 얕은수를 부린들 어라하의 발뒤꿈치도 따라오지 못할 것입니다. 후훗.”

그들의 화기애애한 수다가 어이가 없었던 흥수는 욱리하 일대를 점령한 연남산이 왜 그 아래의 당항성 일대까지 내려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신라를 백제와 고구려와의 완충지대로 삼고자 일부러 두 나라가 접하는 긴장감이 팽팽한 군사 지역만을 골라 일부러 치지 않았다. 백제 조정이 이처럼 정세를 판가름하지 못하기에 시선을 분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성충의 유지를 답습한 흥수는 이를 반드시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면 국경을 지키는 계백의 말을 들으십시오! 신라의 경계가 삼엄한 당항성이나 대야성이 아니라 중원 지방의 가잠성을 취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셔야 하옵니다! 어라하.”

“만약의 사태라니? 그대는 설마 신라를 치는 고구려가 우릴 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흐허허.”

“내법좌평께서는 차라리 당나라의 수군이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온다고 말씀하시지요! 후훗.”

의자왕과 은고의 조롱에 이어 사위에서 무수한 웃음소리가 조정에서 홀로 남은 흥수의 주변에 드리웠다.

‘성충 자네 없이 나 혼자 무얼 한다고.’

살포시 고개를 떨군 흥수는 백제의 충신인 벗과의 약조를 지키지 못할 것만 같았다.

* * *

“이리 지나갔다더냐?”

“지나갔사옵니다. 한데 이곳은 일선주(一善州)로 가는 길은 아니옵고, 아무래도…….”

주름이 한시름 더 깊어진 김유신이 말을 잇지 못하는 천존을 보며 마저 이었다.

“압량주로 가려는 게로구나. 연남산은 서라벌을 노리고 있다.”

신라는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대야성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상 크게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대백제 방어상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된 곳이 바로 압량주였다. 서라벌 왕궁에서부터 불과 200리 길에 위치한 압량주는 왕성을 지키는 신라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고구려가 이리도 쉬이 신국의 심장에 비수를 꽂으려 한단 말인가!’

그러나 죽령 전선에서 어렵게 회군을 결심한 김유신은 다시금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연남산을 쫓고자 이미 결심하여 온 길이지만 뒤를 돌아보자 1만이 넘는 고구려군이 재차 새재를 넘어와 어느새 방향을 튼 가야군과 합류하여 신국의 수도권 최북단인 고모산성을 치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뒤였다.

고모산성이 함락당한다면 죽령 일대와 더불어 고구려의 대군이 이제는 마음 놓고 황산하로 물밀듯이 밀고 내려올 수순이었다.

‘내가 압량주로 가면 새재를 지킬 수가 없구나.’

김유신이 군을 몰고 고모산성으로 향한다면 능히 문경새재를 지킬 수 있으나 그리했다간 연남산에 의해 압독주가 무너지고 서라벌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너무나도 자명했다.

“서둘러 압량주로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장군.”

천존이 우선순위를 말하고 있으나 김유신은 이미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가도 낭떠러지가 아니냐.”

“예에?”

천존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김유신은 자신이 압량주로 회군할 때에 고구려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유신은 죽령을 포기하고 나왔을 때와 같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압량주로 가자. 연남산을 추격한다.”

김유신이 결정을 내렸으나 고구려군의 군세를 확인한 천존에게는 아직 할 말이 있었다.

“무려 4만의 대병이라 합니다. 반대로 저희는 죽령 전투에서 뜻하지 않게 수천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인근 지역의 군사를 한데로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장군.”

“일선주(一善州)의 군사는 아니 된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고구려군을 막으며 시간을 벌어야 할 것이야.”

어느 쪽이든 낭떠러지이나, 그나마 높이가 낮은 쪽을 선택하겠다는 것이 김유신의 결정이었다. 문경새재가 뚫리고 고구려군이 완전히 밀고 내려오기 전에, 연남산이 황산하 하류의 곡류 하천이 유로가 바뀌는 압량주에 당도하기 전에, 연남산이 이끄는 고구려 대군을 먼저 쓸어 버리는 것만이 오직 신국을 구하고 전세를 바꿀 유일한 방도였다.

“춘추 공이 화랑들만 이끌고 온다면 좋을 것을!”

승기를 높이기 위해서 서라벌의 화랑들이 필요했다. 고구려군이 모두 내려오기 전에 서둘러 연남산과 결판을 벌어야만 온전히 신라를 지킬 수 있었다.

황산하의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 김유신과 1만 5천의 신라군은 결사를 다짐했다.

* * *

“김유신의 신라군이 저희가 머물렀던 새재 길에 잠시 멈추다 이곳으로 길을 텄습니다! 작은 막리지.”

기마와 척후에 유능한 별동대로 조랑말을 활용한 걸걸중상이 황급히 김유신군의 동태를 살피고 내 곁에 왔다. 그들의 선택에 상관없이 나는 청룡부대 1만을 앞세운 고문으로 하여금 신속하게 압량주로 진군하라 명한 참이다. 만일 김유신이 내 예상과 다르게 걸사비우, 흑치상지, 옥소, 검모잠이 있는 문경새재 방면으로 틀었다면 우리는 서둘러 압량주를 점령하여 서라벌을 몰아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짐작대로 결국 김유신은 나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서라벌이 버젓이 위기에 처한 마당에 다른 전선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 같은 건 없으며 김유신으로서도 상당한 부담감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또 그랬다면 애초에 죽령 전선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선택 하나로 신라의 여주와 서라벌 귀족들의 비난을 피할 수도 없기에 정치적이나 정황상이나 김유신은 나를 잡으러 오는 것이 당연했다.

“고, 고구려군이다! 고구려군이 나타났다아아!”

“으아아아!”

김유신이 아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백제나 가야와의 접경지대도 아니고 신라의 수도권에 갑자기 나타난 고구려군의 출몰에 느슨해진 경계의 신라군 망루와 목책을 파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유신이 죽령과 조령을 택하는 것 대신에 나와의 승부를 택했습니다.”

결전에 앞서 나는 설인귀와 걸걸중상, 연근행 옆에서 그렇게 말했다.

“신라가 무너져서야 국경을 지키는 일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주공의 계책대로였습니다!”

이어 설인귀가 칼칼한 목소리로 동조했고 배후를 유심히 살피며 말하는 연근행도 같은 어조였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는 걸걸중상이 동공을 동그랗게 뜬 채 남쪽을 바라보며 확신을 가진 채 외쳤다.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작은 막리지.”

걸걸중상이 바라보는 꽁꽁 얼어붙은 낙동강의 물줄기 위에 비사벌군에서 한참 진한인들과 신라 귀족들을 회유한 매부리코의 신라인이 군사들과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2천에 달하는 삼한의 군사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되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시작했고, 격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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