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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208화 (208/335)

208화 여파 (6)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유목 민족의 피가 흐르는 아사나사이는 같은 기마 민족을 결코 우습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말갈과 같은 기마 민족을 잘 다루며 복속한 이들이 기병의 명수라 불리는 고구려인들이었으니 더 그랬다.

목축과 수렵을 병행하다 정착 농경민이 되면서 점차 성을 쌓고 궁술을 단련하기도 했으니 오히려 기마와 궁술에 능한 병사 중심으로 편성된 이들은 자연스레 고구려의 최정예 전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연남산이 모집한 삼기군은 당나라 황제가 안시성에서 퇴각한 뒤에야 창설되었고 이후 북방에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말갈과 유목 민족들을 흡수하였으며 배에 올라 신라와 요동 전선을 가리지 않고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활약했다.

고구려 전역에 목장이 설치되었고 퇴각한 당군이 요택을 지날 무렵 황야에 버려지거나 늪에 빠진 말들이 수천에 이르렀는데, 그 수가 아주 많지는 않아도 연개소문이 이를 노획하면서 요서 진출을 위한 기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와아아아!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불어난 고구려의 기병은 오늘날 당의 기병과 전면전을 벌여도 크게 뒤지지 않아 보였다.

“진문을 열어라!”

연신 창을 올리며 소리치는 걸걸중상의 명에 진문을 연 걸사비우의 홍기군이 기마한 채 달려가 쇠뇌를 쏘기 시작했고 선기군이 아사나사이군의 퇴로를 막았다.

“어디 넘어 봐라! 이놈들.”

“영주에는 절대로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 주겠다!”

“철륵 놈들의 진입을 허용하지 마라!”

화살 세례를 뚫고 기어이 들어오려는 야만인 철륵의 기병은 연근행과 이진충, 두방루가 막아 세웠다. 수레와 목책을 쌓은 장창 공격에 경계선을 넘는 철륵의 기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쫓아라! 아사나사이를 놓치지 마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후방에는 설인귀와 옥소의 맹추격이 이어지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기동을 멈춘 아사나사이군은 추격을 허용하며 맹공을 받았다.

“서쪽으로 우회한다!”

양 방면에서 밀고 오는 삼족오기에 아사나사이는 본능적인 판단을 내렸다. 이제 남은 방법은 요하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둘러 우회하여 그들이 왔던 서쪽으로 도주하는 것뿐이었다. 완전히 포위당할 때까지 머뭇거렸다간 서북에서 데려온 10만의 철륵 계열과 돌궐의 기병이 모두 전멸당할 위기였다.

으아아악!

그 예상대로 이미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었다. 일단 퇴로가 좁혀진 이상 앞뒤로 몰려오는 고구려군의 추격과 요격에 아사나사이군의 사상자를 막을 길은 없었다. 이런 상황까지 철저하게 대비한 고구려군의 기사병에 자칫 몰살당할 판이었다.

“뿔뿔이 흩어진다!”

그래서 아사나사이는 최후의 방법으로 부대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고구려군의 분산을 야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사상자가 늘어나더라도 퇴각할 가능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런 결정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기병 대 기병의 전투에서 황제나 이적이 지휘하는 기병이 아니고서는 천하 어떤 분대를 만나도 패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 믿은 아사나사이는 쫓기는 상황에 그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초원의 전사라 늘 자랑하던 그였다. 그런 아사나사이의 이마에서는 어느새 식은땀이 한없이 흘러내렸고 엄청난 고전에 생사를 오고 가게 생겼다.

한때 북방을 제패한 돌궐의 정통 후예라 지칭했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밀리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야말로 참패였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아사나사이는 지친 말의 고삐를 조이고는 해가 질 무렵까지 정신없이 달렸고, 줄어드는 인기척과 그윽한 해 질 녘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추격군은 없었으나 함께 출병했던 아군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

“대체 몇이나 나와 함께 이곳까지 온 것이냐?”

흙먼지로 더럽혀진 깃발들을 보자니 자신을 따르는 기병이 불과 수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야 말았다.

* * *

뭉게뭉게. 십수만의 기병이 한바탕 날뛴 누런 강 인근에는 거대한 흙먼지가 한동안 일었다. 뒤이어 양만춘과 타인이 이끄는 수많은 군사가 북방에서 남하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 내가 따라잡을 수 없게 말을 몰다니.”

수성과 야전과는 별개로 추격에 익숙하지 않은 양만춘이 앞서간 산기군을 보며 푸념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못한 것이 아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추격은 자칫 역습을 받을 위험부담이 있었기에 걱정부터 앞섰다. 혹시나 그 아이가 다치면 어쩔까 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저길 보십시오. 적들을 모두 섬멸하였습니다. 야단칠 일은 아니라 봅니다, 대모달. 흐허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동북부 욕살 타인의 말대로였다. 조랑말을 여러 마리씩 거느린 산기군은 타인이 거느리고 온 동북의 말갈군이나 고정문이 이끄는 북방의 개마기병, 그리고 심지어 요동에서 건너온 양만춘 휘하의 경기병보다 더 빠르고 더욱 기민하게 아사나사이군을 추격한 것이다.

‘남산이 녀석이 영주에서 괜히 과하마를 구매한 것이 아니로구나.’

양만춘은 그들의 남다른 기동력을 그렇게 평가했다.

요서에서 이적과의 전투도 그랬지만 그야말로 갈아타기 수법의 진가를 볼 수 있었던 북방의 추격전이었다.

산기 부대가 다른 지역의 기병보다 다른 유일한 점은 조랑말을 최하 5마리에서 10마리까지 거느리고 있다는 점뿐이었으니까. 지친 말들을 계속해서 갈아타니 말들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달릴 수 있는 것이다.

‘기병의 새로운 운용법은 북방을 제패하는 원동력이 되겠구나.’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삼기의 기병들은 머지않아 북방을 제패할 것이다. 멀리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의 양기마저 발견한 양만춘에게 그런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 * *

“거의 다 잡은 걸 놓쳤습니다. 분합니다!”

“끝까지 저항하는 놈들이 고의적으로 과하마를 노려 쓰러트렸으니 어쩌겠는가. 놈들의 기병을 분쇄한 것으로 만족해야지.”

옥소와 설인귀는 철륵의 화살에 맞아 쓰러진 과하마들을 보며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거의 다 잡은 아사나사이를 놓쳐 버렸다. 이적 못지않게 장차 고구려에 큰 우환이 될 인물은 가급적 끝을 내야 했다.

그러나 과연 유목 민족이라고 도주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거기다 수천의 기병이 나뉘어 도망가니 추격은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사방에 드리운 삼기의 군사들을 보며 옥소는 마냥 분개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옥소 누님! 설 장군!”

“무탈하시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환희에 찬 표정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제때 서북 국경에 나타나 주어 아사나사이군을 거의 괴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영주나 요하까지 광범위한 추격이 계속해서 이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하 백성들의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지겹게 들은 얘기지만 장기화된 전쟁은 요하의 민생을 거의 파탄에 이르게 했다. 농경과 목축에 종사한들 약탈당하거나 군수품으로 착취당하니 그 어려움은 날로 더해 간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당나라 기병들이 휩쓴다면 민생 안정화는 무척이나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너희도 무사한 걸 보니 주군께서 또 크게 이기셨나 보구나.”

“암요.”

“작은 막리지께서 고구려를 질기도록 괴롭힌 이적을 처단하셨습니다.”

“이런, 내가 더 빨랐어야 했는데 졌구나. 흐하하하.”

불행한 일들은 잠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번갈아 보며 담소를 나누는 설인귀를 보며 옥소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중원의 관문을 넘어 북방에의 영향력 확보까지 려주의 아리수에서 출정했던 남산의 계획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옥소는 서둘러 달려가 이 기쁨을 전하고 함께 나누고 싶었다.

* * *

“평양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백성들은 좀 살 만합니까?”

“변함없이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예년과 다르게 백제와 가야, 탐라, 왜에서 온 상인들이 무척 늘었고요. 그보다 먼 곳에서 온 외국 상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요동만을 벗어나 평양으로 가는 해로에 접어들 무렵, 나는 고문에게 도성의 여러 상황을 전달받았다. 몇 번이나 강조했던 거지만 가장 큰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당나라를 적대하는 시국에 교역의 활로를 꽃피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리수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교역할 해상권을 확보하여 더 많은 배가 고구려로 흘러들어 오게 했다. 배에는 바다에서 건너온 진귀한 물건들을 실으니 그야말로 돈이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배건 일단 고구려 해협에 들어서면 돈이 된다. 그것이 청동기 시대부터 내려온 중계무역이 주는 풍요로움이었다.

임유관과 접한 발해만 해상로 또한 이번에 확고하게 장악하였으니 발해만-요동만-패강-아리수-백제만-가야만에 이르는 실크로드 못지않은 거대한 해상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동해로는 우산국을 경유하여 일본과 직접 교역이 가능했고 은광을 확보하면서 무역 거점을 세우기도 했다.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인 것 같습니다. 흑당과 비단에서 다시 향신료와 금은으로 갔으니까요. 그 외에 장신구나 백제나 신라에서 온 공예품을 사들이는 상인들도 크게 늘었고요.”

고문의 말에 내가 의도했던 몇 가지 현상 중 하나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았다.

일반 생필품부터 오직 귀족들만이 향유했던 물건을 이제는 일반 백성들이 사고팔 수 있는 현실. 지금은 마음 편히 듣는 얘기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나라가 경제력을 갖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

목숨이 오고 가는 전장과 정치적 문제가 늘상 껴 있는 조정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성에게서 조세를 징수하여 얻는 나라의 수익인 세수(稅收) 확보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세수 확보를 위한 기본 신분증인 호패부터 중국의 화폐에서 탈피한 화폐 개혁, 다물군을 중심으로 한 광산 개발, 교역로 확보, 영토 확장 등 중원 중심의 천하에서 탈피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멀고도 험난했다.

웅성웅성. 상인들이 오고 가는 대동강 포구에 이르자 삭막하고 경계심 가득한 고당 전쟁 직전의 평양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본래 역사였다면 수나라와 당나라의 끊임없는 해상 침공으로 인해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압록강에도 가도에도 당나라 수군의 끊임없는 침탈로 콩을 재배한다거나 식량원인 수산업을 발달시키는 것도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서역에서 들어온 향신료를 우리 고구려 사람 입맛에 맞게 제조한 것이라우. 맛 좀 보고 가시우~”

“다물군의 금과 백제 장인이 만난 금제 귀걸이라우~ 거기 귀족 나으리, 한번 착용해 보시겠소?”

“혼례를 치르는 데 은비녀가 빠질 수 없지! 여기 옥비녀도 같이 드리겠소이다!”

지금의 도성은 그야말로 중계무역으로 번영했던 옛 조선의 왕검성과 같았다.

* * *

“태왕 폐하! 감축드리옵나이다!”

“막내 아드님께서 큰 공을 세웠는데 제가 하례를 받을 일은 아니지요. 대막리지께서 받으셔야지요.”

“대고구려의 승리이옵니다. 태왕 폐하께서 하례를 받지 않으시면 누가 받겠나이까?”

“허허, 이거 참 부끄럽습니다.”

연개소문의 넉살 피움에 보장태왕은 떨떠름했다. 연개소문이 남쪽 국경에서 돌아온 뒤 독대하는 날이 잦아졌는데 동사가 폐지되고 신성이 참형을 당하고 사찰을 멀리한 뒤로 귀족들의 권세가 크게 떨어진 여파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태왕 폐하.”

연개소문은 슬슬 막내아들을 조정에 잡아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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