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206화 (206/335)

206화 여파 (4)

“가르통첸!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이 감히 천가한과의 약조를 어기고 우릴 치느냐?!”

“여기는 배짱 없는 선비족들이 다스릴 만한 땅이 아니다. 당나라의 집을 지키는 개는 썩 물러가거라!”

“이런 무도한 놈이!”

토욕혼의 가한 모용낙갈발(慕容諾曷鉢)은 가르통첸이 이끄는 토번군 10만의 국경을 넘는 기습적인 습격에 악다구니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로 인해 당나라 수도 장안에 급히 전령을 여럿 띄워 보냈으나 황제가 북방이 염려되어 유주로 시찰을 나갔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 신속한 원군을 기대하기 어려워진 참이다.

당나라의 속국을 자처하는 토욕혼은 토번의 대군과 맞설 여력이 없었다.

“빌어먹을!”

가르통첸의 지휘 아래 선발대에게조차 곧바로 밀리며 모용낙갈발은 당나라 국경 인근까지 도주하기 시작했다.

“토욕혼을 정벌한다면 장안으로 가는 비단길을 우리가 선점하게 될 것입니다! 토번 백성들도 살기 좋아질 것이고요. 아니 그렇습니까? 친네 형님.”

한편 활발한 가르친링은 아버지 가르통첸과 형 가르친네와 함께 통일된 토번 왕조의 영토 확장 일선에 섰다. 꿈같은 첫 정복 전쟁의 길에는 풍요가 넘치는 비단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아우야, 이 땅을 거쳐 당나라만이 독점한 교역 물품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향료건 보물이건 그 탐욕스러운 당나라 상인들 때문에 그간 우리 상인들이 입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장안으로 가는 길목을 우리가 모두 장악하여 저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야!”

동생의 말에 가르친네가 그렇게 외치며 부응했다. 사실 갑작스러운 거병이 있기 직전에 영주에서 거란과 말갈인들을 만나고 돌아온 아버지와 아우가 웬 이상한 소리를 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웃어넘길 일들이었다.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이라고 네 동생만 한 녀석이 이적을 꺾고 요하를 장악하겠다는구나. 그리만 된다면야, 우리가 토욕혼을 먹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아주 건방진 놈이었습니다, 친네 형님.

그러나 그 말대로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고 한창 서돌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던 곤구도행군대총관 아사나사이마저 서북에서 동북 전선으로 향하자 당나라의 시선이 온통 고구려로 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토욕혼을 접수할 완벽한 순간이 온 것이다.

-토욕혼을 치는 것은 당의 황제를 배신하는 일입니다. 부디 황제를 노엽게 하지 마세요.

토번 왕 송찬간포가 당나라 황실에서 온 왕비를 총애하기에 정치적으로 섣불리 군사를 일으키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가르통첸은 강경하게 이를 밀어붙였다.

-왕비께서는 더는 당나라 황실의 문성공주가 아닙니다. 토번의 국익을 올리는 길이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왕을 설득하며 군사를 일으키지 말라는 왕비에게 가르통첸은 도리어 그렇게 일갈을 날리면서 정복 정책을 추진했다.

“그저 건방진 놈은 아니었나 보구나? 흐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친네 형님.”

가르친네의 미소에 가르친링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친링 아우가 보고 왔다던 그 연개소문의 아들 말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으나 틀린 말이 아니었다.

‘설마 진짜로 이길 줄이야!’

가르친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가르친링이 홧김에 시선을 돌려 허공을 보고는 사냥할 준비를 개시했다.

“저도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친네 형님.”

“출격!”

다그닥! 다그닥!

재차 떨어진 출격 소리에 가르친링은 누구보다 빨리 말을 몰고 달렸다.

* * *

중원에서 올라온 소식에 임유관 관아는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이세민이 돌아갔다더냐?”

“세작들의 증언이 모두 일치하였으니 틀림이 없을 것이옵니다! 대장.”

연수영의 물음에 흑벌무가 그리 말했다. 이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응하는 제장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오라면 오라지요! 안시성에서의 패배를 다시 보여 줄 테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작은 막리지.”

“겁을 먹었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 여겼을 겁니다.”

“이런, 아쉽습니다. 이적의 수급이 아니라 당나라 황제를 태왕 폐하께 바칠 절호의 기회였는데요.”

“여부가 있겠소이까? 이참에 중원을 공략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흐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정명진과 이적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고돌발과 고문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아무리 이빨이 빠졌다고는 하나 천책상장의 명성이 어딜 가겠습니까? 아군의 부상자들이 많습니다.”

“…….”

“엇! 갑자기 왜 그러시오? 부인.”

한편 고구려 제장 가운데 이세민을 가장 잘 아는 연근행은 방심하지 말라며 이세민의 능력을 다소 띄워 주는 발언을 하였고 말을 아끼는 유경이 눈치를 주며 조심스러워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시는구려.”

“겁을 먹으신 게요?”

그 탓에 다른 고구려 제장들의 미운 소리를 듣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개소문을 보고 자란 이들답게 용맹스러움 하나는 가히 천하제일들인 것이다.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적당히 연근행의 편을 서 주려 할 때 이 상황을 그나마 잘 이해하고 있던 손만영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그 역시 연근행과 마찬가지로 이세민의 공적을 가장 잘 아는 거란인이었다.

“어찌 됐건 토번이 나서 주었으니 참으로 다행인 게 아닙니까? 우리 진충이 형님께서 지난번 중리대형과 가르통첸 공이 만나 담판을 지었다는 일을 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었습니다그려! 허허.”

내가 이적을 꺾는다면 토번은 당나라 치하에 있는 토욕혼을 친다. 가르통첸은 정확히 나와 한 약조를 지켰으며 이세민을 물러서게 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황급히 놀란 이세민이 장안으로 향할 것이온데 이참에 그 뒤를 추격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 목을 가져오겠사옵니다!”

“결단코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고구려 장수들이 저마다 당나라 황제의 목을 가져오겠다며 호언장담할지 모르나 이세민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임유관과 중원 사이의 공방전은 자칫 장기전으로 치달을 우려가 있었다.

“이만 돌아가도 되겠구나. 수진이에게 맡기기에는 바다가 염려가 된다.”

“그리하십시오. 군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결단을 내린 연수영이나 나나 당장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는 이곳에서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강이식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적을 잡기 위해 무리한 전투를 계속해서 수행해 온 삼기군과 고구려 군사들이었다. 잦은 백병전 탓에 크게 다친 부상병이 적지 않았으며 휴식이 필요했다. 여기서 또 하나 우려해야 할 부분은 아직 북방 전선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몽골 지역에 해당하는 광활한 황야 벌판은 전투 범위가 상당히 넓다.

십수 만의 양군이 그 넓은 초원에서 말을 몰며 달리고 싸우는 상황에 온전한 승전보를 듣기란 내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설 장군과 옥소 누님이 염려됩니다! 양만춘 대모달도요.”

“저희를 북방으로 보내 주십시오! 선기와 홍기 모두 북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사옵니다.”

그런 내 염려와 일치했는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두 장부가 말들을 쉬게 하고 목을 축이자마자 내게 그렇게 요청했다. 따지고 보면 북방의 패권은 양만춘과 아사나사이의 결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양만춘이 패한다면 중원의 관문에서 재현된 임유관 대첩의 그 빛은 바랠 것이다.

“너희가 간다면 나도 가야겠다. 중상을 입은 자들은 임유관에 남겨 치료하게 하고 싸울 수 있는 자들만 선발하겠다.”

한번 숨을 고른 내가 그들의 요청에 담담하게 다음 행보를 언급했다. 전우라 부르며 서로가 서로를 형제라 인식하고 있는 삼기군이었다. 어느 쪽이 먼저 승부를 내어 승리를 거두었든, 그들은 기꺼이 다른 형제가 있는 전장으로 달려갈 것이라 진작부터 의지를 다졌다. 지쳤다고 내가 막는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른 이민족들 가운데서 희망자를 뽑아 임유관을 떠나려 할 때.

“남산이 너는 갈 수 없다.”

“……?”

그런 말과 함께 내 길목을 막아선 이는 연수영이었다.

“예? 그럴 수 없다니요?”

“네게 할 말이 있느니라. 오라버니에 관한 일이다.”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연수영이 나를 불러세웠다.

* * *

“이보게, 흑치상지.”

“무슨 일입니까? 온달 장군.”

온달의 부름에 아리수를 배경 삼아 백제주를 마시며 분위기에 취한 흑치상지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계속 강만 보고 있구나. 옛 백제의 바다라 그러는가?”

“예에. 잠시 옛 강에 취해 있던 모양입니다.”

“후회하지 않는가?”

“무얼 말입니까?”

“백제 사람이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 사람이 되기로 한 것 말일세.”

“후회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제게 언제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고 약조를 하나 해 주셨거든요.”

“누가? 중리대형께서?”

의미심장한 말에 흑치상지가 아리수 너머 강역을 크게 보았다.

“머지않아 삼한을 일통하실 거라 제게 약조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넓은 저 대륙을.”

서아리수를 바라보는 흑치상지는 남산의 약조가 이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제가 당장 도성에 가야 한다고요?”

“그래. 평양에서 온 고문이가 수군과 합류하면서 내게 오라버니의 서찰을 주었다. 임유관을 노리는 당군을 소탕하자마자 널 즉시 보내라고 말이다.”

연수영의 그 말에 대강 알 것도 같았다.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부터 당나라 황가의 이도종까지 평양 도성으로 보내며 조정의 혼란을 야기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나였다. 물론 가장 혼란스러운 이는 고구려 정계 가장 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연개소문일 터다. 귀족들은 이것이 연개소문이 계획한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니 한 소릴 듣는 건 거의 확정인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산기군과 합류하여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며칠 말미만 주십시오.”

“그럴 수 없다. 너는 당장 돌아가야 한다.”

“너무 억지 아닙니까? 옥소는 태대사자 당신의…….”

일순 숨을 참은 연수영이 내 말을 끊었다.

“그 사내가 있으니 그 아이라면 괜찮을 게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껴 있다.”

“정치적인 문제요?”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께서 작은 오라버니를 치려 한다.”

“아버님께서 숙부님을요?”

“자세한 상황은 가 보면 알 게다.”

연개소문이 직접 수족 같은 연정토를 노린다고? 예기치 못한 이야기에 나는 한동안 고심에 빠졌다. 그러던 때에 채비를 마친 제장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북방은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작은 막리지.”

“반드시 승리하여 지난번처럼 금의환향할 것입니다.”

“주공을 잠시 의심하였으나 결국 그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기꺼이 북방 전선에도 참전하겠습니다.”

연수영에게 지시를 받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 그리고 연근행이 나를 안심시키며 그렇게 말했다.

“이 소식을 가한과 형님께서 들으시면 필경 거란의 전사들을 북방으로 파병해 주실 겁니다. 제가 보탬이 되겠습니다.”

손만영이 대하아복고와 이진충으로부터의 추가적인 증원을 약조했다.

“임유관은 저희가 지키겠사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임유관은 흑벌무와 유경이 지키고 있었다.

각자가 맡은 바 위치에서 본분을 다하려 하니 그들을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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