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94화 (194/335)

194화 각개격파 (2)

“적이 후방에서 나타났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임유관의 역습에 한바탕 당한 뒤 중원에서의 2차 보급품을 기다리고 있던 이적으로서는 보급을 노리는 적습 소식에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하려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무려 중원에서 지척인 이곳에서 서요하 전선 때와 비슷한 양상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필사문 행군총관이 급히 철륵의 기병 2천과 대총관께서 내어주신 1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보급부대를 수송하러 갔으니 일단 기다려 보시지요.”

“내가 심려하는 것은 놈들이 어이하여 우리가 지나온 후방에 나타난 것인가 말일세! 혹 유주나 탁군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게 아닌가?”

전방의 철벽 요새 임유관과 후방의 발해만이 닿은 휑한 모래벌판을 번갈아 바라본 이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부르짖었다. 중원에서의 보급이 끊긴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문제였다. 만에 하나 그런 소식이 군사들 사이에 알려졌다간 아예 무기를 버리고 적에게 투항하겠다는 자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징병부터 상당히 문제가 된 군의 사기였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미 양만춘이 10만의 대병을 이끌고 북으로 향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고구려에 유주를 칠 군사가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필시 예와 같이 소수의 군사를 보내어 우리의 보급을 끊으려는 오랑캐들의 술책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곧 행군총관이 보급부대를 무사히 호위하여 이곳에 당도할 것입니다!”

정명진이 이적의 곁에서 안심시키듯 그렇게 소리쳤다. 이적이 요서에서 대패하고 삼기군에게 쫓긴 뒤로 알게 모르게 불안감이 커진 감이 없지 않아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산동 출신으로 일평생 전장에 몸을 담은 무공 이적이 이렇게나 불안해하는 모습은 그로서도 처음이었다. 오히려 대패를 떨쳐 버리고자 보급이 완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히 군사를 모집하고 출전하여 승기를 잡으려 했던 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군사들이 다른 생각을 먹지 않도록 경계 태세를 강화하시게! 내 후방에는 고구려가 아니라 도적 떼가 나타난 것이라 하였으니.”

지휘봉을 이마 위로 막 들어 올리며 내색을 안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적이 정명진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그리하겠습니다.”

정명진에게는 그런 이적의 심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겠지.’

이적의 불안감. 만일 계필사문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는 보급되지 않은 상태로 앞뒤로 포위당하는 격이었다.

정명진은 임유관을 빼앗긴 일이 이리도 뼈아픈 실책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 * *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내 형제를 죽인 오랑캐 놈이 죽을 곳을 스스로 찾아왔구나! 이런 처죽일 놈들!”

퍼덕이는 고구려 대장기를 향해 계필사문이 연근행을 지나쳐 말 머리를 돌리고는 한바탕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어서 고개를 돌려 연근행에게 말했다.

“어서 가시오! 대총관께서 중원의 보급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니.”

“예에! 뒤는 장군께 믿고 맡기겠습니다!”

몸을 떨면서 조마조마했던 연근행이 그제야 대답할 수 있었다.

“가자!”

“이랴!”

그렇게 연근행과 수레를 둘러싼 당군이 말 머리를 돌려 지나쳤고, 사위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그제야 수레 안에 숨어 있던 걸사비우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고개를 내밀었다.

“후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소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중원에서 온 이들은 누구고 오랑캐라 부르며 깔보고 있으나 보이는 것과 다른 이들도 많으니까요.”

걸사비우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모래를 뒤덮은 말발굽을 보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적진에 들어갈 수는 없소이다.”

그런 걸사비우의 말에 연근행이 고개를 갸웃했다.

“적진에 들어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의 임무는 이적의 진영에 들어가 그들의 군량을 불태우고 이적을 볼모로 사로잡는 것이 아니오? 남산 주공과 남은 군사들은 배를 타고 무사히 도주할 것입니다.”

연근행이 걸사비우에게 남산의 계책을 상기시켰다. 삼기군이 적을 유인하고 보급으로 위장한 군사들이 적진을 휘저으며 이적의 숨통을 노리는 지휘관 척살 작전이었다. 그리만 된다면 당군은 더는 싸울 의지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 놈들의 선봉대를 보십시오. 기마술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자칫 작은 막리지와 중상이 형님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지나친 이들 중 계필사문과 철륵의 기병들이 선봉을 맡았다. 배를 타는 것은 고사하고 놈들의 추격을 피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이곳은 진영 구별이 없는 확 트인 벌판이 아니었다. 서쪽으로 향한다면 탁군이 있으며 그대로 당의 군영에 있는 적진 한복판인 것이다.

“이거 참, 어찌해야 할지.”

뒤를 돌아본 연근행은 난감했다. 걸사비우의 말이 일리가 있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역으로 적의 후미를 친다면 계필사문은 꼼짝없이 포위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는 하나하나 나누어 적을 부숴야 합니다!”

* * *

적의 눈과 귀를 속이는 얄팍한 수가 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운이 따라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운도 때로는 상황이 만들어 주기도 한다.

다그닥 다그닥. 우선 그 첫 번째는 당의 수송부대로 위장한 연근행과 걸사비우 일행을 우리가 쫓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적의 군사들이 쪼개져 이곳으로 오기 마련이다.

“서쪽에서 온 깃발이 보입니다. 계필사문입니다! 작은 막리지.”

걸걸중상이 전방 5리 밖에서 펄럭이는 철륵 계열의 깃발을 먼저 알아보았다. 전날 들었던 대로 아사나사이를 쫓지 않은 일부 철륵 계열의 부족이 우회하여 이적과 합류한 모양이다. 그것도 천하의 이세민이나 연개소문조차 경계하는 초원의 전사들이었다.

오죽하면 고구려 원정으로 고생한 이세민이 안시성에서 중원으로 돌아가자마자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곧바로 군을 재정비하여 뒤통수를 노렸던 또 다른 철륵 계열의 설연타를 치라 지시했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안도감과 긴장감이 공존한 상태로 적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적이 쪼개진 것만큼 아군도 쪼개져 있기에 양측 모두 전력의 분산은 불가피했다.

‘이거 불안한데?’

그렇지만 영주에서 출항하면서 임유관 전투에 그들이 참전했다는 소식은 나를 더욱 근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이적의 당군에 초원의 전사들이 합류하면서 그들을 조금은 살아나게 하였으니까.

그러나 유경이 잘 버텨 주었고 그들이 이처럼 후방으로 밀려나게 된 것은 임유관으로서는 다행이었다. 임유관의 역습이 통하기 위해서는 용맹스러운 그들이 후방으로 빠져 있는 편이 더 나았다.

그리고 막상 저들을 보니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알 것도 같았다.

계필사문이 아사나사이의 뒤를 쫓지 않고 이곳에 온 까닭은 필경 나 때문일 테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계필하력을 일기토로 꺾은 요동의 고돌발을 데려올 걸 그랬다.

“놈들이 몰려옵니다!”

걸걸중상의 다급한 외침. 아니나 다를까 계필사문의 창끝이 나를 향해 있었다. 형제의 원수나 그런 것도 있겠으나 임유관에서의 애먹었던 상황 역시 그를 따르는 기병들이 이와 같은 야전을 꽤나 바라고 있었던 이유가 된 모양이다.

“작전대로 가자.”

나는 걸걸중상에게 곧 그렇게 명을 내렸다.

“예! 작은 막리지.”

* * *

다그닥! 다그닥!

수천의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울렸다. 쫓던 상황에서 역으로 쫓기게 된 삼기군이었다. 이젠 삼기라고 하기도 애매한 반의반쪽짜리 삼기군의 기병들이 말 머리를 돌리며 오히려 적의 추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쫓아라! 작은 오랑캐들을 모조리 도륙하라!”

그 선봉대장은 역시나 나를 중심으로 쫓는 계필사문이었다. 예리한 창끝이 줄곧 대장기 아래 있던 나를 향해 있었다.

‘이거 까딱 잘못하다간 따라잡히겠는데?’

내가 얕보고 있었던 점이었다. 그간 적을 압도하는 삼기군을 보며 기마술과 궁술에서 어느 부대와 맞서도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계필사문과 나를 쫓는 철륵의 기병들은 고구려보다 더 북방에있는 곳에서 나고 자란 유목 민족이었다. 그들의 기마술은 삼기군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저 선봉대에 한해서는 상회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젠장, 갈아타 봐야 어차피 적진이잖아?’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완전한 당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조랑말을 갈아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배가 정박된 포구에 이르러도 놈들이 탑승을 허락해 줄 리가 없다.

그러니 남은 길은 오직 역습뿐.

“지금이다. 쏴라!”

만약의 상태를 대비한 걸걸중상이 잡힐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며 군사들과 함께 등을 돌려 화살을 쏘았다. 위장 후퇴술로 추격자를 향해 뒤돌아 쏘는 화살 공세였다. 추격만을 당할 수는 없으니 적의 추격대를 향한 우리의 유일한 역습이었다.

“소용없다! 이놈들.”

그런데 그렇게 외치며 대항하는 이는 계필사문이었다.

챙챙챙!

그 유명한 계필하력의 아우답게 창을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 저런!”

심지어 놀라운 적중률을 보이는 걸걸중상이 쏜 화살마저 수차례 튕겨 냈다.

“죽어랏! 이 원수 놈들아!”

계필사문이 놀라운 창술을 펼치자 당황한 삼기군의 만구다이들이 그만 추격을 허용하였고 차례차례 놈의 창에 쓰러졌다. ‘붉은 전사’라는 뜻의 만구다이들이 상당수 도주하다 희생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순간이다.

‘젠장, 기마술로 이렇게까지 추격을 허용할 줄이야!’

그간의 승리로 안주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느낄 새 없이 흥분한 계필사문이 어느새 내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자, 작은 막리지!”

“나는 괜찮다. 걸걸이 네가 당황하지 말고 전군을 통솔해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노옴! 개금의 아들아!”

주변의 군사들이 쓰러지자 이윽고 예리한 창날이 기마한 채 등지고 있는 나를 향해 있었다. 고개를 살포시 돌렸다. 양손을 들고 창을 들어 올리며 정조준하는 계필사문이 나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이 거리라면 내가 던지는 비도보다 놈이 뻗는 창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계필사문이 들어 올린 창을 내지르는 순간 놈의 삭(矟)이 내가 입은 찰갑을 뚫고 그대로 심장에 박힐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계필사문의 의도가 다분히 보이기 시작하면서 연무장에서 배운 스승 연수영의 마지막 비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우리 고구려 무사들은 전장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기술을 무덤의 벽화에 새겨 놓았단다.

그저 국내성 벽화로 본 것만이 아니라 내가 찌르는 창을 무력화시킨 무사들의 고난도 고급 기술을 직접 당하고야 말았다.

나는 그것을 떠올리며 계필사문의 창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이런 미친!”

경악하는 계필사문이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탈삭(奪矟). 나는 그야말로 계필사문이 찌르는 창날의 윗부분인 삭(矟)을 그만, 잡아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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