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요하 경영 (8)
서요하의 지류인 시라무렌은 시라무룬강 또는 시라무룬허로, ‘누런 강’을 의미한다. 황하(黃河)와 구별되는 황수(潢水)로도 불리며 예부터 거란족의 중추 지역이었다.
인근에는 염수(鹽水)라는 소금 강이 흐르고 있어 옛 조선 시절부터 고대 소금 교역로였다. 오랜 세월 고구려 변방을 침략해 온 거란족 계통의 패려 정벌로 1만 명의 고구려 백성을 구출한 광개토태왕의 서북 진출을 기점 삼아 줄곧 고구려의 경략지가 되었다. 본래 역사에서도 이세민을 추격했던 연개소문이 거란족과 이민족들 지배에 신경 쓰고자 직접 관리하고 돌아온 고구려 국경의 최서단이기도 하였다.
“아사나사이가 이끄는 대병이 초원을 가로질러 누런 강을 건넌다 싶더니 일제히 말 머리를 틀어 북으로 향했사옵니다!”
그 증거로 양만춘의 대모달 부임 직전까지 요서를 경략하고 있던 연개소문 휘하의 고구려·거란의 혼혈인 말객 두방루(豆方婁)가 황수(潢水)역에서 이곳 영주(營州)역까지 직접 소식을 전해 왔다.
시라무렌 초원 가장 서단에 위치한 적봉진(赤烽鎭) 고지 언덕의 고구려의 봉수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동쪽으로 가면서 연이어 연기 기둥이 올라갔다. 아사나사이가 이끄는 대병의 행로를 두방루가 두 눈으로 확인한 뒤 역을 따라 직접 내게 첩보를 전달하러 온 것이다.
“두방루라 하였는가?”
“그렇사옵니다! 대막리지께옵서 소장에게 적봉진(赤烽鎭)을 사수하고 소금 교역을 잘 관리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연개소문이 그나마 잘한 일은 생해와 두방루와 같은 다민족 출신들을 두루 쓰며 이민족 통제에 힘써 왔다는 점이다.
요서가 이적이 주도하는 당나라 대군의 침공을 받을 무렵에도 염수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이 이처럼 남아 있던 것만 보아도 명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라무렌과 염수 지역은 측천무후가 황후가 될 무렵 서돌궐이 해체되고 대고구려 강경파 이적과 같은 산동 집단 세력 강화로 거란과 이민족을 둘러싼 양국의 유혈 패권 경쟁이 벌어졌던 곳이었지 아마.’
내가 기억하는 본래 역사도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서기 658년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과 우령군장군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예하 송막도독(현 내몽골 파림우기 일대) 거란 족장 이굴가(李窟哥)의 부락병을 동원해 시라무렌 초원의 고구려 거점을 공격했다. 당시 서요하를 관활했던 욕살 두방루가 급보를 받은 뒤 3만의 군사를 몰고 와 양군이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이에 당군이 거느리고 온 거란병과 당군이 회유한 고구려 휘하 거란병으로부터 역격(逆擊)을 받은 고구려군 2천5백이 전사했다.
거란의 의중을 알 수 없던 두방루와 고구려군이 혼란에 빠지며 급히 철군하자 고구려 휘하에 있던 거란왕(契丹王) 아복고(阿蔔固)와 여러 수령(諸首領)이 당군의 포로가 됐고 낙양으로 끌려갔으니 거란족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력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전투였다.
‘이런 사례만 보아도 이민족 통제는 양날의 검일 수밖에 없지.’
통제와 지배 속에 의심과 모략이 끊임없이 벌어졌으며 당나라는 틀림없이 이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대들의 참전 의사는 고마우나 이는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전쟁이니 그대들이 목숨을 바쳐 싸울 의무는 없소. 그럼에도 참전을 희망하는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대가를 받을 것이고 공을 세우면 태왕 폐하로부터 큰 포상을 받게 될 것이니 오직 용병으로만 참전을 허가할 것이오.
그렇기에 연근행의 사례가 고구려 쪽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던 나는 전날 군의(軍議)에서 임유관 전투에 참전을 희망하는 이민족 출신들에게 오수전(五銖錢)과 새로 발행한 삼족오 문양의 고구려 화폐 고려통보(高麗通寶)를 내어주며 이와 같은 제안을 했다. 고구려에 귀화한 이들은 몰라도 아직 이민족 특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상대로 아무런 대가 없이 참전하라는 것은 무모했으며 군사 작전을 시행하는 데 신뢰를 장담할 수 없었다.
“남산 주공께서 염려하셨던 부분이 이것이었군요.”
한편 나와 함께 두방루로부터 서북 소식을 들은 연근행이 아직까지 임유관으로 향하지 못한 나를 조금은 이해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영주를 떠나기 전 나는 먼저 이 소식을 듣지 않고서는 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적의 계책인지 서돌궐에서 돌아온 곤구도행군대총관 아사나사이가 이끄는 칠륵, 돌궐 기병은 설연타를 거쳐 곧바로 북상하지 않고 동쪽의 요서로 들어오는 강 황수(潢水) 시라무렌 인근까지 이르렀다 북으로 향했다.
양만춘이 동돌궐의 영역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아사나사이에게 전해졌다면 10만의 이민족 기병이 고스란히 요서로 내려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휴우.”
남몰래 작게 한숨을 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유신이 본관인 가야에 집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궐 가한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사나사이 역시 돌궐의 집착이 강하여 북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이 맞아떨어졌기에 망정이지 자칫 요서에서 다시금 한바탕 큰 전투를 치를 뻔했다.
물론 요서에는 양만춘의 전술을 물려받은 마로가 이끄는 수성 병력 2만이 남아 있었고, 요동성의 고돌발도 언제든 원군을 보낼 준비가 돼 있었다.
또 유경과 흑벌무가 임유관을 잘 지켜 줄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혹시 이민족 여장부에 대해 이적이 방심을 해 주었다면 더 좋을 것이고.
그러나 내 목적은 이미 지겹도록 반복해 온 막아 내기보다 요하를 위협하는 근본 원흉 이세민의 오른팔 산동 출신 이적의 숨통을 끊어 내는 것이다.
“움직입시다. 지금부터 나와 그대들은 발해만으로 향할 것입니다.”
소식을 들고 급히 군의를 다시 소집한 나는 요하 포구로 향했다.
* * *
두둥! 두둥!
웅장한 북소리가 확 트인 백사장 위를 가득 울렸고 당나라 대군이 발해만을 접한 임유관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진군하라!”
이민족 오랑캐 여인이 무리를 지휘해 임유관의 남문을 지킨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이적의 명이 떨어진 직후였다. 그 뒤로 6만에 달하는 당군이 따르고 있었다. 때마침 서북 철륵의 한 갈래인 글필 부락에서 내려온 기병 3천 기가 유주를 거쳐 임유관에 당도했다.
“대총관! 소장이 왔사옵니다.”
“오오, 자네는 계필하력의 아우 계필사문이 아닌가?”
곧 창을 내리고 군례를 올린 계필사문이 이적의 곁에서 외쳤다.
“열 장군의 연통을 받고 형님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이리 내려왔사옵니다! 소장에게 선봉을 맡겨 주십시오! 임유관을 단숨에 넘어 형님의 원수 연남산의 목을 치겠습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무찌르라는 소정방의 계책을 받아들여 이적은 아사나사이에 합류해야 할 철륵의 기병을 일부 임유관 전선으로 끌어들였다. 탈영으로 잃은 오합지졸들을 정예 기병으로 보강한 셈이었다.
“그리하시오! 계필하력이 그리된 것은 저 임유관의 오랑캐들이 감히 천자와 당나라를 배신하고 고구려에 가담하여 크게 기여한 까닭이니. 하여 그대의 첫 번째 원수는 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고맙사옵니다! 대총관.”
계필사문의 합류에 이적은 더욱 의기양양하게 지휘봉을 휘두를 수 있었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동쪽의 작은 오랑캐들이 겁도 없이 중원에 발을 들여놓았단 말인가.
“계집이 맞사옵니다! 강하왕을 배신한 말갈 추장 돌지계 아들놈의 아내라 합니다! 대총관.”
정명진이 남문을 지키는 적의 지휘관의 정체마저 밝히자 이적은 더욱 득의양양해졌다.
“수성의 ‘수(守)’ 자도 모르는 젊은 오랑캐 여인이 지휘하는 관문이라니, 양만춘이 지켰던 요동과 요서에 비해 훨씬 수월한 격이 아닌가!”
“저리 방심한 놈들을 보니 우리 당군이 이곳에 이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게 아니겠습니까?”
이어 떠드는 계필사문의 말에 이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당군을 우습게 보아도 한참이나 아래로 보았군!”
관문을 지키는 고구려군의 군사 수도 기껏해야 1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보다 남쪽은 더 적은 수의 군사만 보일 뿐이었다.
끼이익. 뒤이어 수만 당군 사이에 드리운 거대한 건조물. 앞쪽에 굵직한 두 개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뒤쪽 바닥에서부터 비스듬하게 계단을 만들어 기본 사닥다리를 만들었으며 그 상층 부분에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2층 사닥다리를 구성했다. 나무로 틀을 짜고 좌우에 각각 세 개씩 도합 여섯 개의 바퀴를 달아 굴리게 되어 있는 물체가 하늘 높이 세워졌다. 높이가 구름에 닿을 만큼 높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운제(雲梯)’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을 공격할 때 이것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며 성을 넘을 수 있었다.
‘충차 3대와 포차 5대, 운제 12대인가. 조금은 부족하나 서둘러 성만 넘으면 해결될 일일 테지!’
철옹성을 넘기에는 부족한 수였으나 적장과 남문의 성세를 본다면 두 번 넘고도 남을 숫자였다.
어차피 임유관 내에는 강하왕이 마련한 군수품과 공성병기가 창고에 제법 쌓여 있을 것이다. 굳이 임유관 앞에서 공성무기 제작으로 시일을 소비한다면 급하게 모은 군사들의 군량 소모로 보급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자칫 고구려 원병이 내려오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곤구도행군대총관이 나서 준 지금 당황하고 있을 놈들이 더 준비할 시간을 주어서는 아니 되지!’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이적의 선택은 하나였다.
“총공격하라! 단숨에 관문을 탈환하라!”
그런 이적의 명에 계필사문이 즉시 창을 들어 고구려군이 장악한 임유관을 가리켰다.
“이-랴!”
그리고 곧 자신의 말에 박차를 가하며 선두에서 달려 나갔다.
* * *
“이거 좌불안석이로구만.”
임유관 관아에서 줄곧 난감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답답하여 관아 문밖으로 나와 남쪽을 향해 난감해하는 기색을 비친 사내는 흑벌무였다.
와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저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었으나 그는 남문의 군 지휘를 모두 연근행의 아내 유경에게 맡겼다.
-남문의 수비는 유경에게 맡기십시오. 그리해야 적들이 방심할 것입니다.
영주에서 남산의 그러한 명이 떨어졌다.
흑벌무는 처음 그 명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야 요서에는 이적의 대병이 주둔하고 있었고 언제 임유관으로 내려올지 모르니 남쪽은 유경이 북쪽은 자신이 맡아야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황이 바뀌어 적이 온통 남문에 몰려왔다면 응당 자신이 남문에 내려가 군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나 남문은 수나라 시절부터 중원에서 오는 당의 보급이 오고 가는 통로여서 오랜 기간 방치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개축을 하였다고는 해도 지금 수준으로는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남문의 수비는 유경에게 맡기시고 흑 장군께서는 야전에 능한 군사들을 준비해 언제든 역습할 준비를 하십시오. 그렇다고 군수품 지원은 마다하지 마시고요.
그러나 이날 북쪽에서 받은 남산의 이 연통대로라면 자신에게 따로 역할을 부여할 것이란 의미가 실려 있었다.
“그거야 알겠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원.”
그럼에도 흑벌무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남문의 보수를 애초에 유경에게 맡겼다지만 남쪽이 뚫리고 나면 야전이고 뭐고 곧바로 시가전에 돌입하여 큰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날 임유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간 흑벌무가 경험한 천산산맥이 뻗은 요동 남단에서의 수성보다 규모가 큰 전투였다. 육로로 오는 당군에 비해 바다로 상륙해 오는 수군은 공성병기에 대한 준비가 녹록했다. 그야말로 지형을 잘 이용하고 성을 지켜 낸다면 적을 몰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탁 트인 백사장 위로 중원에서 온 큼지막한 공성무기가 쏟아진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이곳 관아까지 대석이 날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잠깐, 안시성에서 저걸 어찌 막았다더라?’
지원을 마다하지 말라는 남산의 전언에 흑벌무의 머리가 번뜩였다.
심지어 당나라 수군과의 해전에서도 이를 이용하지 않았는가.
이를 장산군도에서 직접 경험한 흑벌무였다.
“임유관의 포차를 남산 공자와 삼기군이 가져가지 않았다면 이를 적을 방어하기 위해 쓰라고 남겨 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흑벌무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 * *
정탐선에 의하면 며칠 사이에 임유관에선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남문과 당군의 진영 모두 횃불이 타오르고 있을 만큼 격전을 벌였다고 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발해만 중심부에서 나름 이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정탐선을 제외하고는 해안가에 배를 띄우지 않았으나 염려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도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부러 밤에 정탐선을 띄웠으며 조용히 칼을 갈던 우리는 적절한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적의 보급품이 탁군에서 임유관으로 향할 때를 노리고 말이다.
인내의 시간은 출항한 지 엿새가 될 때까지였으니 예상보다 길었다. 무려 열흘 가까이 주야로 공세를 퍼부은 이적이 새 공성무기를 제조할 목재와 군수품을 받고자 전령병을 유주로 파견한 뒤였으니.
“준비하십시오.”
나는 다른 장수 누구보다 먼저 뛰쳐나가고 싶어 한 연근행을 첫 번째로 차례차례 상륙부대를 편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