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84화 (184/335)

184화 요하 경영 (1)

고구려의 파죽지세로 지난 몇 년간 영토를 크게 잃은 신라 조정. 그들의 온 신경은 백제보다도 북으로 향해 있었다. 고구려의 실세 연개소문과 그 아들의 행보는 더는 신라가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위기였다.

“지금 뭐라 하셨소? 연개소문이 신주로 내려왔다고 하셨소?!”

“그렇사옵니다! 폐하.”

김춘추에 이어 당항성 일대와 신주를 살피고 온 상대등 알천이 조의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당도한 연개소문의 동태를 아뢰자 여주와 조정은 큰 근심이 생겼다.

“내 일찍이 짐작했던 대로 잔학무도한 연개소문이 약조를 지킬 리가 없었소! 필경 다시 군사를 몰아 한수를 도하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진덕여왕은 화가 나다 못해 두 팔을 부들부들 떨며 신료들에게 의지했다. 지난날 비담의 난을 이용해 서라벌과 남쪽 깊숙한 곳까지 군사를 보낸 연개소문 부자를 생각할수록 치가 떨렸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다시 가야와 서라벌로 올 것처럼 속이며 뱃머리를 돌려 신주의 반을 강탈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당나라는 대체 무얼 한답니까? 그들의 관복과 연호를 쓰고 조공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당나라 천자를 칭송하는 시마저 써 보내었거늘 연개소문이 저리도 날뛰는 마당에 천자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입니까?”

한바탕 푸념을 늘어놓은 진덕여왕이 곧바로 분기를 띠었다. 격분한 여왕의 시선이 김춘추에게 꽂혔다. 심상치 않은 표정의 김춘추가 여주를 직시하며 입술을 뗐다.

“인문이가 연통을 보내왔습니다, 폐하.”

“뭐라 합니까?”

“강하왕 도종이 포로가 되어 평양에 압송되었다고 합니다.”

“강하왕 도종이라면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의 당질인 제후왕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럴 수가! 그럼 당나라가 또 고구려에 졌단 말입니까?!”

김춘추의 보고에 여왕이 기겁했고 신료들이 잇달아 아연실색했다.

“자, 잘못된 소문이 아닙니까? 춘추 공.”

“당의 제후왕이 고구려의 포로가 되다니……!”

“사실일지도 모르외다. 그러니 연개소문이 평양을 떠나 이리 신주로 내려온 게 아니겠소이까?”

당나라 황족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은 신라 조정을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왜마저 외면한 신라가 의존할 유일한 나라는 당나라뿐이었다. 강하왕은 그런 당나라 천자의 혈족이었다. 한창 서쪽에 신경 써야 할 고구려의 실권자가 이리 남으로 내려왔다면 당나라가 고구려에 밀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인문이 말하길, 연개소문의 아들이 요동으로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 하였습니다.”

“또 그 연개소문의 아들입니까?!”

신라와 백제, 바다 건너 왜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 하루에 한 번쯤은 반드시 나온다는 것이 바로 연개소문과 그의 아들 이야기였다. 연개소문의 아들이 배를 타고 움직일 때마다 인근의 여러 나라에서 늘 한바탕 풍파가 일었다.

“연개소문이 내려온 이때에 신주군주 흠순만으로는 아니 됩니다. 대장군을 신주로 보내십시오! 폐하.”

김춘추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는 그것밖에 없었다.

“대, 대장군은 가야만 보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신주로 보낸다 해도 가겠다 하겠습니까?”

“폐하의 명에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하나, 이찬간!”

“폐하께서 염려하시는 일이란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김춘추는 여주의 속내를 읽고 있었다.

“고구려가 다시 서쪽 바다를 통해 이곳 서라벌로 온다면 어찌합니까?”

진덕여왕의 근심은 결국 그것이었다. 한번 당하면서 생긴 염려로 서라벌의 경계를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어졌다. 이는 곧 국경 지역의 약화를 의미했다. 칠중성과 북한산성이 함락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폐하! 신의 말을 들어 보시옵소서! 대장군께서 신주로 가지 않으시면 신국은, 서라벌은 더 큰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김춘추는 그렇게 날이 저물 때까지 여주를 설득했다. 더는 신국의 영토를 잃어서는 아니 됐다. 여기서 성을 더 빼앗긴다면 다음에는 당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이다.

김춘추는 부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 * *

“어서 오시구려, 계백 장군.”

“대막리지께서 저를 따로 지목하여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연개소문은 북한산을 찾은 계백을 접대하며 환영했다. 백제 내 신라의 김유신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게 한 몇 안 되는 명장이었다.

“지난날 가잠성에서 김유신이 아주 호되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얼마나 웃었는지 모를게요. 내 듣자 하니 장군의 활약이 컸다지? 또 얼마 전에는 내 아들을 도와 신라의 배후라 할 수 있는 가야를 정벌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였고. 내 크게 대접하고 싶어 불렀다오.”

“과찬이십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그저 운이 좋았다? 크하하!”

술잔을 건넨 연개소문은 차분한 어조로 말하는 계백의 여유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천하의 연개소문을 면전에 두고 보이는 이만한 여유는 백제의 성충을 제외한다면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한편 술을 한 모금 빨아들인 계백이 진하고 날렵한 눈매를 치켜올렸다.

“고구려가 옛 백제의 왕성이 있던 이곳 욱리하 유역뿐만 아니라 근초고왕과 근구수왕께서 정벌하신 요서군까지 정벌했다 들었습니다.”

남산의 행보는 뱃길을 통해 빠르게 백제에 전해졌다. 요서 지역이란 150년 전부터 백제의 선박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부터 고구려가 요동을 취하였을 때 백제는 이에 뒤지지 않겠다 하여 옛 부여의 고토를 취하였지. 우리 고구려가 그대들의 옛 땅을 모두 취하여 분이 난 겐가?”

“백제의 공식적인 국호는 성왕 대에 이르러 남부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부여에서 온 것이라 하여 이를 반영하였으며 부여의 조상들이 터전을 가꾼 요서를 백제가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옛 백제의 땅을 이만 돌려주시지요.”

“내 아들이 정벌한 땅을 도로 내놓으라?”

“우리 백제의 도움으로 고구려는 가야를 취하였습니다. 이곳도 마찬가집니다. 동맹이라면 옛 백제의 도읍이 있던 욱리하와 부여 조상의 터전을 내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백제의 24번째 어라하이신 모대(牟大)께서 동성왕(東城王)이라 시호를 칭하신 것은 다름 아닌 옛 부여의 고토를 회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계백의 얼굴을 빤히 보는 연개소문이 미간을 좁혔다. 이자는 사사로이 농을 한다거나 떠보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위로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는 장수 사법명, 찬수류, 해예곤, 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로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남제서》

태학의 기록도 그렇거니와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쓰인 중원의 기록에서처럼 고구려와 백제 양국은 개로왕이 죽임을 당한 뒤 원수가 되었고 삼한의 땅을 넘어 중원과 요하를 둘러싼 치밀한 외교전을 전개했다. 고구려는 북조를 이용하였고, 백제는 남조를 이용하였으며, 대륙과 요서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럴 수 없네.”

“백제는 고구려와 동맹이 아닙니까?”

“시대가 많이 변했으이. 이곳을 더는 한성이니 위례성이니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그리고 부여의 옛 땅이란 조선이 아닌가. 고구려가 예맥의 일족인 부여에서 나왔고 그 부여를 세운 동명왕이 조선에서 나왔으니 요서는 백제뿐만 아니라 우리 고구려의 고토이기도 하네.”

“양국의 고토이니 돌려줄 수 없다?”

“내 대답은 그렇네. 하나 고토의 흙을 밟고자 하는 백제인을 막을 심산은 없으이. 그 옛날처럼 요하 내 백제 상인들에 대한 교역을 허가하지.”

옛 조선의 경계였던 갈석산과 요서군의 영지성은 부여계인 여암(餘巖)이 활약했던 곳으로 근초고왕 대부터 수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백제인들의 왕래가 끊이질 않은 곳이었다. 연개소문은 같은 고토를 논하는 계백에게 백제인들의 교역을 윤허할 작정이다.

“제가 이곳에 온 대가가 고작 교역이로군요.”

연개소문이 고개를 저었다.

“고작 교역이 아니지, 더는 서토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지. 자네와 내가 이곳에 있으니 신라가 한동안 백제만 신경 쓰고 있지를 못할 것이야. 백제를 지켜야 할 자네로서는 다행 아닌가?”

연개소문의 그 말에 계백은 지난날 협상해 온 그 아들이 누구를 닮았는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 * *

“양만춘 이놈! 네놈이 우릴 속였구나!

그토록 두드려도 성안에 박혀 나오지 않은 인물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적은 절로 막말이 나왔다.

기마한 채 양만춘이 조금 앞으로 나와서 외쳤다.

“이적 장군! 내 이세민에게 받은 비단을 다 써서 돌려주지는 못하겠소만 그 대신 고기에 찍어 먹을 맛 좋은 양념을 좀 드릴까 하는데 어떻소? 내 매일 챙겨 먹는 것인데 그간 오래 봐 온 장군께서 이 맛을 모르고 세상을 떠나면 아주 억울할 것 같소이다!”

이어 양꼬치를 양념에 푹 찍어 먹는 양만춘은 당군의 앞에서 자신의 무사함을 내보였다. 뒤이어 다른 고구려 장정들이 하나둘 꼬치를 입에 넣으며 조롱했다.

그런 양만춘을 보며 이적은 분개했다. 그의 얄팍한 속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50만 대군이 주야로 공격해도 흔들리지 않는 안시성에서 양만춘은 당군을 향해 성내의 군사들에게 밤마다 가축 짖는 소리를 내게 하며 사기를 떨어뜨린 그 계책을 다시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퇴각하는 당군의 사기를 꺾어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닥쳐라!”

스르릉, 이적은 홧김에 칼을 뽑아 들었고 즉시 공세를 명하려 했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추격을 개시한 고구려군이 지척까지 와 있었다. 고구려 놈들이 탄 말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종일 기마를 하고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대총관! 어서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오랑캐 놈들이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옆에서 헉헉거리며 사색이 된 계필하력과 방효태가 손도 못 쓰고 밀렸고 이적을 다그쳤다.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대총관.”

소정방을 유주로 가는 거용관까지 안내하고 돌아온 정명진이 달려와 소리쳤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게나!”

아군의 통솔을 계필하력과 방효태에게 맡기며 안시성 때의 퇴각을 되풀이하는 이적은 후회막심이었다. 확 트인 벌판이 아니라 양만춘이 주둔한 성 인근까지 고구려군을 끌어들여 산지에서 싸웠더라면 이리 허무하게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레 정면에서 도전해 오는 놈들을 보며 진법만을 믿고 방심하고 말았다.

“서둘러 여길 빠져나간다!”

임유관 쪽에서의 고구려의 원병 출몰 소식에 이적의 결정이 빨라졌다. 아군의 피해보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와아아아!

그렇지 않다면 포위망을 좁혀 오는 고구려군의 화살 세례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빈틈없는 양만춘이 결코 자신을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으아아아!

10만 당군이 고구려의 이중 포위 전술에 무참히 쓰러지는 혼란 속에서 이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포에 질린 듯 허둥지둥 요서를 빠져나가고자 했다.

* * *

“대승입니다!”

“우리가 10만 대병을 물리쳤습니다!”

양쪽에서 옥소와 걸걸중상의 외침과 함께 5만 고구려군의 함성이 가득 울렸다.

와아아아!

그러나 치열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현대인의 기억이 있는 탓인지 도무지 주변의 끔찍한 광경을 보고 마냥 군사들과 기쁨을 함께하기 어려웠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 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였다.

북위가 수만 기병을 일으켜 백제를 공격했고 그 전장이 어쩌면 백제인들이 진출했다는 갈석산과 영지성 부근인 이곳 요서평원일지도 모르겠다.

“몇 번 안 본 사이에 장부가 되었구나.”

군사들이 저마다 시체를 뒤지고 노획품을 쥐며 기뻐하는 사이 양만춘이 내게 다가왔다.

“놀라게 하는 데는 재주가 다 있으십니다.”

“일을 벌여 네가 온 것이고 오늘의 승리가 있지를 않았느냐.”

그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누가 괴짜가 세상을 바꾼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아무튼, 나는 이 괴짜 아저씨와 한동안 요서에 머물게 될지도 모르겠다.

“당나라의 두 장수를 잡아 왔습니다! 주군.”

“어서 꿇려라!”

아, 그보다 설인귀와 연근행이 잡아 온 포로 처분부터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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