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80화 (180/335)

180화 영주 (5)

소모전과 지구전을 주도하며 본격적인 2차 고구려 원정에 나섰음에도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무공 이적. 이세민이 환궁한 뒤로 대고구려 강경파이자 당나라 원정군 총사령관인 그의 심경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한 것은 소정방이 뒤늦게 사태를 보고받으면서부터였다.

“대총관!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오? 영주에 숨은 거란 놈들이나 고구려와 합한 흑수말갈이라도 움직인 게요? 혹 동쪽의 동태라면 염려할 것이 없소. 계필하력과 열(烈: 소정방의 이름) 장군께서 천거하신 영주도독부장사(營州都督府長史)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정명진(程名振)이가 요택과 인근 습지인 고구려군의 진입로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켰다는 전갈을 받았으니 놈들이 섣불리 우리의 배후를 치지는 못할 것이오.”

“그보다는 후방의 동태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후방의 동태라니?”

“얼마 전 대총관께서 요서 공략에 필요한 화살과 공성병기를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임유관에 그리하라 일렀지요. 보급에 무슨 착오가 생긴 것이오?”

보급을 언급하는 소정말의 말에 이적의 신경이 곤두섰다. 목전에 둔 숙군성을 나흘 내로 넘는다면 몰라도 그 이상 시일이 걸린다면 화살 보급은 필수적이었다. 서남의 영주와 고구려가 침투한 요서 전역을 공략하자면 공성무기 보급은 무조건 필요했다. 충차 3대와 발석거 몇 개 가지고는 숙군성을 넘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하루속히 임유관에서 보급이 당도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이적이었다.

“자꾸만 뜸을 들이는 게 수상하여 임유관의 동태를 살펴본 바, 아무래도 고구려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사옵니다!”

“뭐라? 임유관이 고구려에 넘어갔다?!”

“…예에.”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니오? 우리 당군이 유주와 임유관으로 가는 길목을 모두 확보하였거늘 고구려가 어느 틈에 임유관을 침투해 점거할 수 있단 말이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외다!”

유주에서 군량을, 임유관에서 화살과 공성병기를 보급받지 못하는 상황은 이적이 예상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겁니다! 영주에 연개소문의 아들이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사온데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영주에 연개소문의 아들이?!”

“유주의 군관에게 서둘러 알아보라 일렀으니 곧 소식이 당도할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아들이 영주에 나타났다면 요수를 도하해 요택을 넘어왔을 리는 만무하다. 그랬다면 정명진이나 계필하력으로부터 먼저 연통이 왔을 테니까.

이적의 시선이 서남 영주를 가르는 요하의 물줄기로 향했다.

‘설마 바다로?!’

그 길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의 아들이 동쪽과 요동을 오고 가며 신라를 괴롭히고 요동에 침투한 계필하력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번 요동만을 장악하고자 했던 황제의 수군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바다에서 자유로운 고구려가 요동과 요서로 보급품을 운송하며 황제의 소모전 계책을 무력화시키고 있었으니 연개소문의 아들이 영주에 이르렀다는 소문 역시 마냥 거짓이 아닐 수 있다.

“난감하도다. 임유관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졌다니!”

아직 확실한 보고를 받지 않았음에도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고 느낀 이적은 임유관 소식이 참일 것이고 아예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열 장군께서는 서둘러 영주의 동태를 살펴보시오! 그곳에 정말 연개소문의 아들이 당도하였다면 머지않아 이곳에 군사를 몰고 올 것이오!”

“아, 알겠소이다! 대총관.”

이적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 고구려군에 대한 탐색을 강화하며 삼기군에 대한 첩보 역시 입수했다. 기마전에 능한 그들이 그저 영주 땅에서 당군이 오기만을 기다릴 리가 없었다.

대범하기로 소문난 개금의 아들이 안시성 때와는 전혀 다른 구도의 전술을 감행할 것이 틀림이 없었다.

* * *

수년 전 이곳에 머물던 이세민의 천막을 흉내 내어 만들기라도 한 듯 화려하고도 큼지막한 거란족의 천막 내에는 각지에서 올라온 무장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몇 시간 전쯤에 가르통첸이라는 비상한 인물이 앉아 있어 꽉 찬 듯 보였으나 막상 이곳에 거란족, 말갈족, 해족, 고구려인, 그리고 이민족 혼혈인까지 여럿 자리하자 제법 그럴듯한 다민족 군사 회의장이 마련되었다.

온갖 향료와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 상등석에는 내가 자리했고 그다음 좌우 상석에는 당연히도 거란 추장 대하아복고와 그 후계자 이진충이 앉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현 영주의 실세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 또 뵙습니다! 중리대형. 임유관의 소식은 들었습니다. 대막리지께서 참으로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아버님께서 보내셨군요.”

“예. 그렇사옵니다.”

먼저 좌측에 앉아 반갑게 인사하는 한 사람은 지난해 왕성 제가회의에서 보았던 부여성 성주 고정문(高定問)이었다. 기록에 남은 고구려 부흥 운동의 몇 안 되는 고구려 장수였다.

“흐음.”

한편 우측의 무거운 분위기를 한 다른 한 사람은 연근행 못지않은 거구였다. 누런빛 털옷 위에 황칠 찰갑을 입고 있는 모습은 가히 노련미가 돋보이는 사내랄까.

그를 보며 옆에서 당황하는 일행들이 있었다.

“이거 참. 누군가 했더니 이런 데서 보게 될 줄이야.”

“아, 아니?! 욕살께서 여기 계셨습니까?”

“대체 언제부터 영주에 계셨던 겁니까?”

나를 제외한 설인귀, 걸걸중상, 옥소를 비롯한 삼기의 장들이 모두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웅성웅성. 그들뿐만 아니라 삼기군에 편성된 백두산과 동북면 일대 출신 자란의 장들도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는 거 같아 보였다. 나만 모르는 걸 보니 삼기군 창설 이후 만주 지역에서 흩어진 말갈을 통합할 때 알게 된 인물이 아닌가 싶다.

이 정도면 고구려 내 꽤 유명 인사라는 건데, 내가 못 알아보다니!

“이거, 무사한 자네들 얼굴을 보니 무척이나 반갑구만. 한데 자네들보다 대막리지의 자제분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흐흐.”

“그대는 누굽니까?”

답답한 마음에 내가 바로 묻자 턱에 부숭부숭한 털을 어루만지는 사내가 나를 노려보며 신분을 드러냈다.

“소장은 책성(柵城) 욕살(褥薩) 타인(他仁)이라 하외다! 대막리지의 명을 받자와 말갈 37부(部)의 부족들을 거느리고 이곳 영주까지 왔소이다!”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가히 압권이었다. 분명 익숙한 인물은 아닌데 그 이름을 듣자 기록에 어렴풋하게 남은 고구려인의 묘지명과 연남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책주도독(柵州都督) 및 총병마(總兵馬)로 고구려 영역 12주(州)를 주관하며,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백산말갈(白山靺鞨)을 포함한 말갈 37부(部)를 통솔하는 말갈의 장. 책성에서 나고 자란 동북면 토박이. 정확히는 고구려와 말갈의 혼혈이었으나 그는 고구려인이 분명했다.

할아버지 복추(福鄒)는 대형(大兄)을 지냈고, 아버지 맹진(孟眞)은 대상(大相), 즉 태대사자(太大使者)를 지냈다. 부친 대에 7위의 관등이 3위의 관등으로 오른 파격적인 승진은 그의 부친이 영류태왕의 명을 받아 수나라의 임유관을 선제 타격한 말갈군을 이끈 선봉 장수였기 때문이다.

“마, 빠뜨린 부분이 있는데 10부는 생해 아우가 처려근지 고돌발과 함께 회원진과 통정진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27부밖에 안 되옵니다. 흐허허!”

정변 이후 연개소문에게 충성을 바쳐 생해와 더불어 동북 지역 말갈을 관리하는 자. 묘지명에 이타인(李他仁)으로 기록된 그가 후일 연남생과 같은 길을 걸어 연근행처럼 이세민의 성을 사성받고 당나라의 장수로서 고구려 유민과 부흥 세력을 유린하는 잘못된 길로 가고야 말았다.

어디 그뿐이랴. 고구려 왕족들의 후예 역시 당나라에게 정치적으로 이용을 당하며 대조영을 포함한 고구려의 부흥 세력을 막는 선봉장이 되는 비극으로 치닫고 만다.

‘그런 비극은 반드시 막아야겠지.’

설인귀, 연근행, 대하아복고, 이진충, 이타인, 돌궐 유민과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도성의 왕건위와 려주의 흑치상지까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모두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계책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것이 어쩌면 내가 이곳에 온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힘을 모아 싸워 준다면 현재 요서에서 날뛰는 이적의 10만 대군 부럽지 않을 것이다.

“1부당 7백의 군사이니 1만 8천9백의 군사가 영주에 있는 것이로군요.”

“그렇소이다! 그중에는 흑룡강과 송화강에서 내려온 북흑수말갈의 용맹한 자들 또한 합류하였지요. 매해 쌀과 토기를 보내 주는 고구려에 은혜를 갚겠다 하외다!”

본래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의 명으로 구덩이에 파묻혀 죽었어야 할 북흑수부와 말갈의 용맹한 전사들이 팔팔한 기세로 요하를 도하하여 영주 땅을 지키고 있었다. 그간 이적이 괜히 영주를 넘보지 못하고 요동의 민생과 보급을 노리려는 소모전 전략을 시도하였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이세민이 모르긴 몰라도 말갈을 앞세운 고구려를 특히나 두려워했으니 이적 역시 선뜻 영주를 치질 못하고 거리를 두며 이민족들의 회유를 시도했나 보군.’

그것이 영주의 동태를 살피고 온 옥소, 걸걸중상, 연근행의 일관된 보고였다. 그러나 재물을 얻고 먹을 것을 얻어 더는 굶주리지 않는 이민족들이 당나라의 편에 설 이유는 없었다. 생계를 보호하고 지켜 주며 자신들의 풍습을 존중해 줄 더 강한 나라가 나타난다면 그들은 망설이지 않고 전향할 것이다.

‘어느 민족이건 민심을 얻는 것은 같은 이치니까.’

이민족들에게 벼슬을 내리며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했던 이세민의 정책은 앞으로도 더욱 흔들릴 것이다.

“야전을 치르겠다고요?”

“예.”

내가 막 이적에 대항할 작전을 언급하자 타인이 가장 먼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와 영주에 있는 거란과 이민족들의 군사까지 2만7천, 여기서 공자께서 거느린 삼기의 군사가 더해져 4만이 조금 넘는 병력이 모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당의 군사가 2배 더 많습니다. 이럴 때는 전면전을 감행하는 것보다 수성하며 적의 배후를 노리는 편이 더 옳은 전략이 아니겠소이까?”

“숙군성의 대모달이 지키는 군사까지 정확히는 5만이지요. 임유관의 홍기군까지 거들어 준다면 여기서 8천이 더 늘어납니다.”

“그래도 당장 야전이 벌어진다면 적이 2배가 넘습니다. 무모하외다!”

주필산 전투를 예로 들자면 마치 타인이 고구려의 전통적인 전략을 채택하려는 고정의이고 내가 고연수, 고혜진과 같이 무모한 전술을 쓰자는 것처럼 보이는 형세였다. 그러나 나는 이적의 군대가 거용관으로 빠져 유주로 회군하여 다시금 고구려를 넘볼 것은 계획에 두지 않았다.

북쪽의 산지를 제외하고는 무주공산과도 같은 지역이 많은 요서는 요동과 다르게 천산산맥이 지켜 주지 않는다. 늪지대를 빼자면 해수면이 높은 강 상류를 따라 중원의 침략자들이 언제든 올라올 수 있는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 지방 오부(五部)의 으뜸 벼슬이자 행정과 군사의 양면을 관장하는 욕살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영주의 군정(軍政)을 좌우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별수 없다.

“우리는 4만이 모두 기동력을 갖춘 기병입니다. 적은 화살이 떨어졌으며 변변찮은 공성무기조차 없습니다. 또한, 국경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아 사기 역시 만만치 않게 떨어졌을 겁니다. 지금 서토의 오랑캐들을 진압하지 않으면 그들은 또다시 장성을 넘나들며 우리의 강토를 유린할 것입니다.”

“중리대형의 말대로 그리 하십시다! 임유관이 우리 손에 떨어졌으니 이적의 사기가 말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부여성주 고정문이 곧바로 지지해 주었고 대하아복고 이하 이민족들 역시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지긋지긋한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그들이었다.

“좋소이다. 언제까지고 저의 행정구역인 책성을 이탈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공자의 말대로 하루속히 이적을 토벌해야겠소이다.”

잠시 후 주변의 눈치를 살핀 타인이 허리를 굽히며 그리 대답했다.

* * *

영주를 벗어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당군과 마주쳤다. 이적의 노련한 대응으로 성 쪽은 소정방에게 수천의 군사를 주어 맡기고 10만의 병력이 이미 일제히 이쪽을 향해 있었다.

퍼러러. 과거 안시성에서 보았던 이적의 깃발이 멀리 흩날리고 있다.

“영주로 진군하라!”

두둥! 두둥!

이내 이적이 칼을 뽑아 외치자 전고(戰鼓)가 크게 울렸고 육화진법의 원조답게 노수(弩手), 궁수(弓手), 마군(馬軍), 도탕(跳蕩), 기병(奇兵), 치중병(輜重兵) 등 온갖 종류의 부대가 뒤섞인 육각형 모양의 꽃이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갖추며 행군을 개시했다.

순간 저걸 상대로 내가 왜 정면 승부를 하자고 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으나, 어차피 진짜 정면 승부도 아니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아군을 보며 대응 지시를 내렸다.

“전투 준비!”

준비한 대로 삼족오의 날개가 하늘로 회전한 깃발이 깃대 위에 높이 걸렸다. 사냥할 때 이미 익숙할 대로 봐 둔 삼기군은 모두 그 깃발의 의미를 인지하고 있었다.

히이잉!

우렁찬 말 소리와 함께 설인귀, 걸걸중상, 옥소, 연근행 뒤 각기 삼 열로 도열한 1만의 기병이 그 뒤를 따랐고.

휘이이. 흙먼지가 흩날리는 광활한 요서 평원 위. 조랑말 5필씩을 보유한 기사병들이 선봉에 섰으며 나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아아!

그때 전방에서 울리는 10만의 고함에는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자 하는 이적의 명백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나와 삼기군은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당군이 사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법 긴 하루가 될 것임을 암시라도 하듯 날이 무척이나 화창했다.

아침 이슬이 져 버린 해가 중천에 뜨면서 이윽고 시간이 되었고.

“공격하라!”

사냥을 시작할 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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