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영주 (1)
임유관의 보수는 그런대로 어찌어찌 마무리되었다. 애초에 공성을 치른 것이 아니었기에 보수라고 하기에도 애매했고 상당수의 노동력과 한반도에서 가져온 자금이 관문의 중원 방면인 남문 증개축(增改築)에 투입된 참이다. 증개축 설계에는 중원의 기술자들은 물론 인근 지형과 지리에 밝은 유경이 참여하였고 과거 가야 지역의 산성 보수 경험이 있는 설인귀나 걸걸중상이 잠깐 검수를 맡는 정도였다.
그나마 경륜 있는 흑벌무가 이곳에 도착하면서 증축 설계도 검수가 조금 더 빡세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여긴 소장에게 맡기십시오! 중원에서 오는 오랑캐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이곳을 지나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못난 사내를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나는 연수영이 보내 준 용맹무쌍한 흑벌무와 연근행의 아내이자 말갈과 해족 부족의 신망이 두터운 유경을 임유관에 남겨 두고 다시 배에 올랐다. 흑벌무는 요동에서 수성과 야전에 능했으며 유경은 여장부로 군수 창고 관리를 세심하게 잘하고 또 임유관 민심을 다독이는 데 탁월했으니 두 사람을 맏고 떠나도 될 것 같았다.
“주군, 이리 나와도 정말 괜찮습니까? 아무래도 유주의 동향은 살피고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을지.”
“흑벌무 장군에게만 맡겨도 될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그간 나와 함께 여러 전장을 누빈 설인귀와 걸걸중상은 먼발치에서 톡 튀어나온 임유관의 노룡두를 바라보고는 다소 회의적인 시선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중원으로 진입하는 관문을 빼앗긴 당나라 조정이 곧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느냐는 예상 가능한 문제 제기였다.
“크흠, 이거 당나라 황제가 노하여 대병을 보내지 않을는지 나도 염려스럽소이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말갈 출신 연근행도 산짐승 같은 덩치와는 다르게 초조한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임유관에서 자신이 누굴 죽였는지 깨닫고 나서는 남겨 둔 처와 어린 자식들을 걱정하는 모양새다.
같은 우려를 하는 세 사람에게 각각 말할 것도 없이 내가 가운데 있는 설인귀를 보며 답했다.
“당나라 조정이 임유관 소식을 들었다 한들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시일이 걸릴 겁니다. 장안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수천 리 길이 아닙니까?”
“하나 유주라면 내일이라도 당장 당군이 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혹여 임유관과 가까운 유주에서 급히 군사를 일으켜 당군이 몰려와도 그 두 사람이라면 능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사이 우리는 서둘러 북쪽에 진을 친 이적의 당군을 무너뜨릴 계책을 짜야 합니다. 그들을 격파하지 못하면 기껏 점령한 임유관이 고립될 테니까요.”
당나라 수군의 대응을 보자면 이곳 소식이 지금쯤 대명궁에도 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이세민이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면 상당한 국력 소모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를 지치게 하고자 하는 당의 소모전이 결국 그들 스스로를 자승자박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나마 미래의 북경이 될 유주와 그 부근에 주둔한 1만의 당군이 신경 쓰이지만, 그 정도라면 흑벌무와 유경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불과 며칠 전에 당나라 우위장군 배행방이 수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만일 저들이 육군과 수군을 동시에 보낸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다수의 전쟁 경험과 그간 내 지시하에 여러 병술을 수행한 설인귀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질문은 과연 예리하고도 날카로웠다. 제아무리 천혜의 요새라 할지라도 육지와 바다를 이용해 동시에 공격해 온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누가 증명할 것도 없이 바로 요전에 내가 광개토태왕의 전술을 모방해 매소홀에 상륙하는 동시에 칠중하를 도하한 온사문과 뇌음신의 육군과 합류하여 아리수 이북을 수복하지 않았는가.
인적 물적 자원이 고구려보다 풍부한 당나라라면 능히 그런 전술을 펼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나라의 본격적인 대응이 이루어지기까지 아직 시간이 있었다. 거기다 설만철이 가까운 묘도군도를 놔두고 또다시 우회하여 이곳에 올 여유 같은 것이 있을까.
“장량의 평양도행군이 장산군도에서 대패했고, 지난번 삼기군이 참여한 해전 이후 당나라 수군은 거의 괴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번에 온 놈들의 수군도 산동을 지키는 설만철의 수군에서 쪼개온 수십 척의 전선에 불과합니다. 안심하십시오. 이번 임유관 정벌 소식이 태대사자께도 전달이 되었을 터이니 발해만에 대한 방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당 수군에 대한 우려는 강남과 검남도 지방에서 대운하를 타고 올라올 수백 척의 당선이 당도할 때 해도 늦지 않는다. 내주와 등주에 정박한 당선은 현 중원의 바다를 방비할 당나라의 유일한 수군이었다.
이번에 3층 누선을 10여 척 남짓 발해만 앞바다에서 물고기밥으로 잃어버린 설만철과 그 졸개가 쉽사리 남은 수군을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그들 본대가 움직일 때까지 연수영이 수수방관하고 있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아, 한 가지를 빼먹었는데 이도종을 도성에 보내면서 아버님께 홍기군을 보내 달라 요청드렸습니다.”
“비우 아우의 홍기군을 말입니까?”
그 말에 옆에서 조용히 나와 설인귀의 담소를 경청하고 있던 걸걸중상의 안색이 환해졌다.
“그래. 그들에게 잠시 이곳의 바다를 맡아 달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멀리 요서의 중심지에 뻗은 서요하의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노룡두 앞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서 요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삼기군이 머지않아 한자리에 모이겠군요.”
의미심장한 설인귀의 말에 걸걸중상이 곧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고 항해에 신경 쓰며 돛을 펼치던 옥소도 잠시 이쪽을 바라보며 관심을 드러냈다.
왜에서 건너온 삼한의 유민들과 탐라, 유구 사람들이 합류한 홍기군의 군세는 첫 삼기군 편제 당시의 고작 2천5백이었던 병력에서 어느덧 8천으로 불어나 있었다. 지금 내가 거닐고 있는 산기군과 선기군 역시 요동과 남쪽을 여러 차례 오고 가며 불어난 군세에다 연근행의 말갈 부족이 합류하면서 각각 8천4백, 7천8백에 이르렀다. 만주 팔기 각기의 상한선인 7천5백의 군사를 이미 넘어선 규모였다.
‘슬슬 기를 더 늘려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2만 4천의 정예 삼기군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요서의 양만춘과 이민족 군사들과 함께 고립된 이적을 격파할 모종의 전략을 짤 수 있을 것이다.
* * *
“여우 같은 고구려의 대신을 보고 오셨다 들었소.”
“신의 아들 때문에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합니다. 폐하.”
“인문이는 이찬간을 닮아 총명한 아이가 아닙니까? 그 아이가 나서 준 덕분에 흉포한 고구려의 삼기군이 하북(河北)으로 건너가 더는 남으로 내려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하나 결과적으로 신주(新州)가 반으로 쪼개졌습니다. 진흥제께서 넓히신 영토를 잃었으니 그 죄를 어찌 쉬이 용서받겠습니까?”
“그 책임이라면 제게 있습니다. 하나 백제가 다시 날뛰는 지금은 별도리가 없어요. 일단 한고비는 넘겼으니 춘추 공의 말대로 앞으로는 당나라를 의지해야겠습니다.”
김춘추의 대왜 외교는 실패했다. 백제와 친한 왜는 해상 세력을 확보한 고구려의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돌고 돌아 결국 신라의 손을 잡아 줄 유일한 구원은 오직 당나라뿐이었다.
“제가 자리를 비울 때 대장군이 폐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진덕여왕을 향해 김춘추는 김유신의 동태를 물었다. 지난번 가야 지역에서 고구려를 도와 저항하는 가야인들을 보고 무척이나 실망스러워한 김유신이 신경 쓰인 탓이다.
“예에. 법민이를 만난 뒤로는 칩거(蟄居)를 하십니다.”
“대장군을 신주에 보내시는 게 어떻습니까?”
선도해를 만나고 돌아온 김춘추는 김유신으로 하여금 신주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상대하게 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때마침 고구려의 삼기군이 요동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음흉한 선도해가 있는 미추홀이라도 도로 가져올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김춘추는 가급적 고구려와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으나 괴변을 늘어놓는 선도해가 괘씸했고, 당나라와의 유일한 교역로인 당항성과 인접한 지역이 적지가 되는 것은 곤란했다.
“그건 아니 됩니다!”
그때 진덕여왕이 예민한 어조로 소리쳤다.
“폐, 폐하!”
“그러다가 지난번처럼 백제왕이 친정하여 군사를 몰고 압량주에 온다면 어찌합니까? 고구려가 배를 타고 서라벌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유신 공이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져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벌써 두 차례나 고구려의 상륙에 신라의 주요 거점을 빼앗긴 진덕여왕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김춘추는 처음 보는 여주의 안색을 살피며 조금 전의 말을 번복했다.
여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서라벌을 불태울 고구려의 상륙이었다.
* * *
요동에 요동성이 있다면 요서에는 영주가 있었다. 동서로 갈라지는 요하강(遼下江)을 사이로 요동을 대표하는 성과 요서를 대표하는 지역이 갈렸다.
요하 서편 대릉하, 서요하 유역에 위치한 광활한 영주는 예로부터 기름진 땅으로 요서의 중심지였다.
황하 문명보다 1,000년 이상 앞선, 요하 문명의 시발점과 인접해 있으며 지금은 군사적 요충지이자 고구려와 서역 간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곳은 중원과 동방, 그리고 서역이 연결된 교통로이자 풍요로운 땅이었다. 당나라의 이민족 이주 정책으로 거란, 말갈, 해 부족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인 동시에 작금에는 영주와 유주 사이에 적지 않은 돌궐 유민들이 유입된 곳이기도 했다. 실크로드가 우회하는 동북아 최대 국제무역로인 영주는 요하 유역에서 가장 번영한 영지였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실상 영주를 장악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서요하가 흐르는 물줄기 위에서 번창한 영주 땅을 둘러보자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모든 진귀한 물건이 중국 왕조의 왕성인 장안에 모여야 하는데 그중 태반이 북쪽의 내몽고 지역의 고비사막을 거쳐 영주에 이르렀으니 천하의 중심지가 반으로 쪼개진 격이 아닌가.
영주에 이른 교역품은 다시 동쪽의 요동을 거쳐 고구려의 왕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과거 연개소문은 신라가 앗아간 죽령 이서보다도 영주 수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세민이 친정하는 고당 전쟁이 발발하기에 앞서 요동의 신성까지 군사를 거닐고 나온 연개소문이 직접 영주를 치고자 했던 것은 당나라 천하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요서 수복의 염원이 깔려 있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영주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간 뒤로 염수 지역의 소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도성의 소금값이 크게 치솟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영주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가 바로 고구려의 민생에 적잖이 영향을 미칠 경제적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저기 영주가 보이옵니다!”
서요하의 물살을 따라 북상하자 확 트인 땅을 보고 영주라 외치는 걸걸중상의 눈이 초롱초롱하고 영롱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걸걸중상과 무관한 곳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미래 걸걸중상의 일이었지만 수많은 고구려 유민이 끌려온 이곳에서 모친 고초를 겪은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이 고구려 계승 국가를 세우고자 결심한 기회의 땅이 아닌가. 당나라는 그것도 모르고 복속시킨 갖은 이민족들을 한꺼번에 관리하겠답시고 이곳에 한데 모아놓았으나 결과적으로 악수(惡手)였다.
“어서 오십시오!”
짧게 역사를 회고한 뒤 포구에 이르자 거란의 후계자 이진충이 맞이했다.
당나라의 공세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과 달리 손에 낀 금가락지고 옥가락지고 담비 가죽의 모피 하며 온갖 사치스러운 품목들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비단길 교역로가 잠시 뜸해지긴 했어도 바다에서 들어오는 교역로가 이를 대체한 것 같았다.
포구에 늘어선 품목만 보아도 비단, 항류, 약재, 후추, 종이, 보석부터 지금은 조리되어 되파는 고구려 향신료나 맛소금, 자기, 붉은 토기, 흑당, 모피, 금과 은 등이 자연스레 영주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품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거 참 오랜만입니다, 삼 공자. 하하.”
“당나라의 공세를 받은 것치고는 무탈하시군요.”
“대모달께서 잘 지켜 주신 덕분이지요! 대막리지께서도 이번에 군사를 보내 주시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하하.”
여러 차례 너털웃음을 치는 이진충은 이곳에서 불과 100리밖에 10만 당나라 대병이 진을 친 전황과 다르게 현 영주의 상황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뭐가 있나 보군.’
그가 안심하는 배경에는 틀림없이 뭔가가 있다는 증거였다.
“이리 따라오시지요.”
그렇게 나는 팔자걸음을 걷는 이진충의 뒤를 쫓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뒷모습을 보며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다.
후일 그가 영주의 자치권을 두고 당과 갈등을 빚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자면 고구려에도 마찬가지의 요구를 해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
물론 현 거란의 추장이 대하아복고이고, 그가 고구려를 따르며 당나라를 적대하는 상황이었기에 아주 먼 훗날의 근심이 되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그의 동태를 잘 살펴보아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들어가시지요. 가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진충의 안내를 받아 영주 내 가장 크고 웅장한 천막에 이르렀다. 그 안에는 뜻밖의 인물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 * *
늦은 밤 동북에서 전해 온 소문에 대명궁이 발칵 뒤집혔다. 횃불을 든 군사들이 뛰어다니며 삼엄하게 경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주요 대신들이 단봉문과 현무문을 통해 조심스레 입궁했다. 황제의 특명으로 급히 소집 명령이 떨어진 까닭이다.
선정전으로 향하는 이세민을 장손무기가 만류했다.
“황제 폐하! 옥체를 살피시옵소서. 이리 늦은 밤에 행차하시면 환부가 덧나시옵니다.”
장손무기의 손을 뿌리친 이세민이 욱하듯 소리쳤다.
“지금 장성의 관문이 뚫렸다! 고구려가 중원의 바다를 제집 드나들 듯이 오만방자하게 날뛰는 마당에 그까짓 조그마한 환부가 대수겠느냐!”
“폐, 폐하!”
“육로와 수로에서 모두 패하였다. 강하왕은 생사를 알 수 없고 현령의 아들인 부마도위는 죽었느니라! 천하의 무리가 작은 오랑캐에게, 개금 따위에게 모두 졌단 말이다! 이를 듣고 어찌 고이 잠이 들겠는가!”
안시성과 몽롱보탑의 치욕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천행이 따른 그 우물터에 정혜사(净慧寺)라는 사찰을 세운 이세민은 그와 같은 천운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있는 대로 표정을 구긴 이세민은 힘겹게 가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