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만리장성 (4)
“적의 대병이 몰려 있는 것치고는 조용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주군.”
설인귀의 말에 그제야 북쪽 전선을 조금 파악할 수 있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양만춘의 부상 소식이 요동과 평양을 넘어 내가 머물렀던 남쪽 전선의 아리수 유역과 려주에 이르렀다면 애초에 이적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한참도 전에 총공세를 감행하여 요서를 공략하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도성에서의 대응이 뜸한 것도 그렇고 이를 이미 눈치챈 연개소문이 다른 계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나라의 경우 지난 해전에서의 참패로 황제가 직접 선박 건조를 진두지휘하며 수군에 치중하고 있으니 크게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요서 전선에 대한 보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당나라 전령에게 동이 트는 대로 요청한 것을 보내겠다고 하고 일단은 돌려보내십시오. 이곳의 정비를 마칠 때까지 시일을 벌어야 합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시간을 끌 겸 설인귀에게 이적이 보내온 자를 적당히 둘러대고 돌려보내라 한 뒤 급히 제장들을 임유관 관아로 소집해 군사 회의를 열었다.
“강하왕을 실은 배가 오늘 새벽에 떠났습니다.”
“성곽 증축은 예정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옛 수나라 시절 이곳에서 대승을 거둔 강이식 장군께서 중원에서 오는 적들을 막고자 설치해 둔 성곽과 봉화가 남아 있기에 전체적인 짜임새가 잘 되어 있던 덕분입니다.”
“군량을 풀어 민심이 수습된 덕분이기도 하지요. 이도종과 방유애가 그간 이곳에서 잡아 온 이민족들을 얼마나 박대했단 말입니까?”
“중원인들로 위장할 이들을 추려 오늘 밤이라도 중원으로 내려보낼 예정입니다. 중리대형께서 쓰신 시문을 모두 암독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정도 내용이라면 서토의 민심을 크게 흔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장들과 기술자들이 모인 군사 회의의 서두는 신속하게 시행했던 만리장성 관문의 보수와 민생 안정, 그리고 지난번 지시했던 일들의 진척 상황 보고가 주를 이루었다.
‘이걸 천운이 따른다고 해야 할지, 일이 잘 풀리고 있구나.’
임유관 정벌 계획은 애초에 내 머릿속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내정 관리 보고를 받을 때마다 다소 얼떨떨하긴 했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고구려 국경을 어지럽히는 당의 시선을 끌 겸 그저 간만 보고 돌아가려고 했으니까. 운이 좋다면 적의 보급을 한 차례 끊어 내는 것 정도나 기대했다. 겨우 1만이 조금 넘는 군사로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 하나를 이리 쉽게 돌파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굳이 따지자면 오늘의 성과는 분명히 지난번 대장산도 해전에서의 승리 여파라고 볼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이세민 친정의 고당 전쟁에서 출혈을 최소화하며 역습에 성공했던 시기까지 들먹일 수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본래 역사보다 많은 수의 선박을 잃은 이세민이 지방의 관리들을 독촉해 선박 건조의 공역과 비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가고 있던 부분이 컸다.
그렇지 않고서야 현 이적이 이끄는 요동도행군의 보급 문제나 임유관의 허술한 방비가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로서는 고구려가 이곳을 뒤로 기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겠지만 말이다.
‘아, 그때 연개소문의 상륙도 빼먹을 수 없으려나.’
강소성 몽롱보탑의 터전에서 연개소문의 상륙에 쫓기던 이세민이 마냥 국경 부근에서 방비만 할 수 없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이 역시 현 당의 수군 양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터. 또 한때 연개소문이 뇌물을 먹인 설연타의 배후 침략도 있었고 국경이 넓은 당나라로서는 여러 이민족 부대에 더해 이미 이적에게 10만의 대병을 맡긴 요서 전선에 별도의 군사를 투입할 여유가 없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그렇게 여러 정황이 쌓이고 쌓여 눈덩이처럼 불어난 결과가 이번 만리장성 관문의 돌파라 하겠다.
스르륵. 손에 쥔 임유관 관아의 장부를 살펴보니 중원에서의 보급을 받은 날짜가 차일피일 미루어지다가 일주일 전쯤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도종이 괜히 이적에게 보급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됐건 고구려의 민생이 하루속히 대병을 징집할 수 있을 만큼 나아지길 바라며 시일을 벌고 있던 나로서는 당나라의 민생 파탄은 예측할 수 없는 가장 큰 이변이자 호기인 셈이었다.
“지난번 들었던 소식에 의하면 대하아복고의 거란 군사와 생해가 이끄는 말갈 부족, 장성 이북의 돌궐 유민들의 연이은 약탈로 요동도행군이 준비한 충차와 운제가 불에 타 버렸고 화살 역시 적잖이 소모한 것으로 압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요동도행군대총관이 고구려의 후미에 침투시킨 이민족 부대에 적지 않은 화살을 쥐여 주었을 것이고요.”
군사 회의에 참석한 연근행의 부인 유경이 당나라 요동도행군의 상황을 나와 제장들에게 짤막하게 요약해 주었다. 생해가 나섰다는 것은 역시나 연개소문의 지시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또한, 이곳에 전령을 보낸 이적이 보급품 가운데 특히나 화살과 사다리를 재촉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면 이적이 보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뜻이오?”
내가 정리하듯 묻자 유경이 술술 대답했다.
“퇴로가 없는 이적에게 요서를 공략할 힘은 없을 것입니다. 중리대형께서 적기에 나타나시어 이도종이 보급품을 올려 보내기 전에 이곳 관문을 점거하셨으니까요. 중원은 한참 인부들을 징발해 공역을 치르게 하고 선박 건조에 몰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임유관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진 것조차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똑 부러지게 당나라 보급 현황과 현 사태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자면 비록 역사에서는 적이었을지 모르나 아군이 된 유경은 생각보다 상황 판단력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괜히 무리를 지휘하여 고구려 말갈 부대를 격퇴한 여장부가 아니었다.
‘이래서 편을 늘려 가야 해.’
굳이 마음도 없는 이도종을 무리하게 회유할 필요 없이 임유관에서만 해도 주변 정황을 상세히 꿰고 있는 이런 뛰어난 인재를 얻을 수 있지 않았는가.
천하의 인재를 다 얻는다 해도 얻기 어렵다는 것이 중원이라지만 그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릴 것만은 분명하다. 저 넓은 땅의 지형과 지리, 해류, 군세, 보급 상황 등 이기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장 다음 전쟁의 승리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고구려 침략에 북방의 이민족들을 이용하는 당의 이세민처럼 눈 뜨고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적은 소장이 지척에서 보았으니 잘 압니다. 당나라 천자의 오른팔이 아닙니까? 결코 방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에 주둔한 이도종은 그렇다 쳐도 설인귀의 주의대로 이적은 결코 쉬이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신라의 김유신이 있다면 당나라에는 이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결코 질 수 없는 이유는 고구려를 소국이라 모욕하며 현 안학궁과 태학 서고에 무수한 고서들을 불태워 버린 본래 역사의 이적의 만행을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나는 불끈 쥔 주먹을 풀지 못했다.
* * *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잠깐 수면에 빠진 나를 깨운 이는 걸걸중상이었다.
부산스러운 소리에 노룡두에 오르자 멀리 선박이 보였다. 한두 척은 아니었고 어림잡아 수십 척은 넘어 보였다.
나는 다른 경계하는 보초들처럼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묘도군도에 이어 임유관 앞바다의 발해만이라면 어찌 됐건 고구려의 최전선이었다. 과거 동해 바다를 거쳐 우산국에 상륙했을 때의 거리나 내주와 등주에서 노룡두 앞바다까지 뱃길로 오는 거리나 피장파장이었다. 당선이 언제든 출몰할 수 있는 지역이었기에 바다든 육지든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 고구려 배입니다! 작은 막리지.”
잠시 후 내 뒤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주시했던 걸걸중상의 말에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요동 벌판을 달리며 초원에서 자란 걸걸중상의 시력만큼 정확하고 믿음직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런데도 적의 위장술을 간과할 수 없어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이내 익숙한 인상의 사내가 갑판에 오른 것을 보고서야 경계를 풀 수 있었다.
“정말이지, 진짜 임유관을 정벌해 버리셨구려! 누구 아들이 이런 대범한 짓을 벌였는지 이제는 천하가 다 알겠소이다! 흐허허.”
임유관에 이르러 고구려 깃발을 확인한 흑벌무가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운이 좋았습니다. 근데 어찌 된 일입니까? 장군께서 오시기에 묘도군도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을 텐데요?”
의구심과 함께 물으면서도 나는 흑벌무를 반갑게 맞이했다. 느닷없이 최전방에 이르러 정신없던 찰나에 원군이 도착한 것이 아닌가.
제아무리 야전과 기습, 해전, 공성, 상륙 등 산전수전을 다 경험한 삼기군이라지만 유일하게 수성 경험은 없었고 언제까지고 이곳을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태대사자께서 보내시었습니다. 성을 잘 지키는 놈으로 가려 뽑아 왔지요.”
그러던 때에 이렇게 흑벌무가 도착했다. 연수영의 배려에 눈물이 찔끔 났으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싶었다.
“잘 오셨습니다. 흑 장군이 이곳을 지켜 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이거 저도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우선은 이 얘기부터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흑벌무가 정색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대장의 명으로 묘도군도의 최전선인 대흑산도, 고산도, 장도에 거주하는 백성들을 후방의 섬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곳 섬들은 당의 본토와 너무 가까우니 적절한 조치였습니다.”
“한데 당선 수십 척이 서쪽으로 우회하는 듯 보였습니다.”
“적선이 우회했다고요?”
“예. 그들이 운하를 낸 중원으로 가려는 것은 아닐 것이고 아무래도 돌아서 이곳으로 오지 않겠습니까?”
바다라면 육지보다 소식이 더 빠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미 발해만을 잠식한 고구려 전선의 소식이 설만철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웅크리고서 대운하를 통해 나올 수백 척의 전선까지 모아서 온다면 그것만큼 성가신 일도 없을 것이다.
“임유관을 지키기 위해 흑 공께서 와 주셨습니다. 바다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결심을 마친 내가 흑벌무에게 그렇게 말했다.
물론 해전은 이제 내가 아니라 능력이 입증된 옥소가 맡겠지만 말이다.
내 시선은 여전히 북쪽에 있는 요동도행군에 머물러 있었다.
* * *
“이거 놔라! 나는 당나라 황제 폐하의 당질이다! 강하왕이니라! 너희 작은 오랑캐 놈들이 감히 지금 나를 죄인 취급 하는 것이냐!”
“중리대형의 명이 있었다. 정중히 모시도록 하시오.”
태학에서 나온 젊은 학사의 말에 양옆에서 이도종을 억압하던 군졸들이 힘을 풀었다.
왕건위가 이도종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태학에서 수학하는 왕건위라고 합니다.”
“네놈은 대명궁에서 황제 폐하를 모욕했다는 그 고구려 애송이 놈이로구나!”
이도종의 시비를 사뿐히 무시한 왕건위가 대뜸 뒤에서 굼떠 있는 한 젊은 신라인을 소개했다.
“이분은 신라 태자의 둘째 아드님이시고요.”
“뭐어, 신라 태자?!”
“이찬간말입니다. 하하.”
왕건위의 말에 이도종의 시선이 그의 뒤에 서 있는 김인문에게 향했다. 이찬간이라면 지난번 장안을 찾은 김춘추의 아들이었다.
“아, 아니?!”
한편 당황한 이는 비단 이도종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태학에 머물며 고구려 동태를 살피려던 김인문은 당나라 제후왕이 이리 압송되어 고구려의 도성까지 끌려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라와 당나라를 이간질하려 하시는가.’
당황해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왕건위가 미간을 좁혔다. 이는 남산의 밀서대로 엄연히 연출된 상황이었다. 포로로 잡은 이도종에게 고구려와 신라와의 거짓 관계를 보이고 오해하게 만들어 그가 언제고 이 소식을 전할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신라를 의심하게 만들 계책이었다.
“이리 오십시오. 어전에서 태왕 폐하와 대막리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건위는 자신감 있는 발걸음으로 육중한 솔개 꼬리 치미(鴟尾) 아래 당나라 대명궁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웅장한 궁으로 강하왕을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