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만리장성 (3)
“보급품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단 말이냐?”
“예! 대총관. 분명 약조한 날짜가 오늘이었는데…….”
“이거 참, 어찌 된 일인지.”
군수품 수송을 기다리고 있던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은 요서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하기 직전에 보급을 한 번은 더 조달받고 움직이려 했다. 군량보다야 당장 시급한 것은 화살과 성을 넘을 공성병기가 필요했다.
‘너무 시일을 끌었어!’
그동안 소모전이니 장기전이니 해서 후방에 별동대를 보내 약탈을 일삼거나 하는 짓은 도저히 이적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때마침 지난번 비사성 공략에 공을 세운 정명진이 나서 주어 양만춘의 부상을 이끌어 냈다.
흉흉해진 요서의 분위기와 땅에 떨어진 영주의 민심이 당나라에 쏠려 있을 때 이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힘을 모아 한번에 치고 올라가 요서를 무너뜨린 뒤 다시금 요동을 넘을 작정이었다.
소정방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흰 수염을 어루만졌다.
“강하왕께서 어련히 잘 보내실 것을요.”
“여태 하루도 늦지 않았거늘. 이상한 일이 아니오? 나와 함께 전장에서 보낸 세월이 적지 않은 강하왕께서 보급의 중요성을 모르시는 것도 아닐 것이고.”
“곧 보내시겠지요. 정 급하시면 임유관에 전령 군관을 띄워 보시지요.”
“이런 이런, 적의 사기가 떨어진 지금이 적기이거늘.”
“하면 먼저 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어떻소이까? 정명진만으로는 놈들의 움직임을 묶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고 싶어도 화살이 없소이다! 한 해 동안 적의 후방에 침투하는 별동대에게 내준 화살이 대체 얼맙니까? 말이 소모전이지 놈들의 청야전술에 우리군의 소모도 만만치가 않소이다. 굶어 죽어서 오는 군사들도 적지 않으니 말이오.”
이적은 답답했다. 보급품이 제때 맞춰 도착했더라면 벌써 영주까지 장악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성에 날릴 화살과 성에 오를 운제만이라도 서둘러 도착하길 바랄 뿐이다.
“여봐라! 당장 임유관에 전령 군관을 급파하라.”
“대총관께서 급하시니 서두르도록 하라.”
다그닥 다그닥.
이적과 소정방의 명에 따라 전령 군관이 장성의 관문인 임유관으로 향했다.
* * *
“형제들을 죽인 철천지원수의 수급을 거두어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근행, 아니 이제는 연근행이 된 고구려 말갈 장수가 대도를 움켜쥐고는 내게 이도종의 처우를 요구했다. 지난번 방유애의 처분에 대해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킨 건가.
당나라의 말갈 포섭 정책을 막고자 한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로서는 당장 원한 관계에 있던 당나라 인사들을 모두 거두어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건 큰 착각이었다. 이도종의 수급 역시 당나라와 말갈 간의 관계를 아예 끊어 버리는데 기여할지 모르나 그것은 부마도위 방유애만으로도 충분했고 이는 엄연히 월권이다. 아무리 원수라 해도 이도종은 당나라 황족이자 이세민의 혈족이 아닌가. 부하들을 잃은 연근행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나 여기서부터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풀어 주어라.”
내 명에 연근행이 당황해했다.
“주, 중리대형?!”
“저자는 중원의 제후왕이오. 내 권고에 따라 백기를 들고 투항하지 않았소? 칼을 내려놓은 자를 베는 것은 장부로서 옳지 못합니다. 그것이 대고구려 연씨 가문의 오랜 가훈이니 사성을 받은 그대는 이를 깊이 유념하십시오.”
나는 사성을 빌미로 그를 제지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떨떠름하게 대답한 연근행이 이 결정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지언정 나는 우선 포박한 이도종을 풀어 주어야 했다. 비록 권고한 지 이틀이 지났긴 해도 그는 내 요청에 따라 투항했다. 그 부분에 대해 예는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닌가. 투항한 자에게 위해를 가했다간 앞으로 중원의 어느 누구도 고구려에 투항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풀어 주어라.”
옥소가 내 명에 따라 군졸들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적의 전투 의지를 꺾는 것은 후일을 생각했을 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수적 우위는 여전히 당나라에 있었고 그들이 죽기 살기로 싸운다면 자칫 고구려의 중원 진출은 여기까지일 수도 있다.
‘수나라 때부터 잘못 쌓인 고구려의 이미지를 바꾸긴 해야지.’
앞서 임유관의 한족들을 통해 알아본 거지만 중원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구려에 대한 인심은 매우 좋지 못했다. 수나라와 당나라 정권이 유도한 것도 있겠으나 수백만이 강제징용으로 요동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니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오는 것이다.
夷兵似虎豺(이병사호시). 범과 승냥이 같은 오랑캐 병사들이라는 뜻의 이 어구가 정확히 중원이 생각하는 고구려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 외로 반세기 넘도록 중원에서 유행하는 노래가 무향요동랑사가(無向遼東浪死歌)였다. 요동에 가서 개죽음을 당하지 말자는 제목부터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머리는 잘리고 온몸에는 부상을.’이라는 가사까지 고구려라는 나라의 이미지가 도통 좋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나이가 좀 있는 기술자들은 옛 북제 시절이니 북연 시절이니 떠올리며 기억해 주었으니 수나라와 그런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에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쉬이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중원 내에서의 고구려는 여전히 적개심이 가장 크게 나타나는 나라였다.
그 경계가 바로 진시황 때부터 수나라 양제에 이르기까지 쌓아 올린 저 만리장성이었다. 그 경계에 따라 고구려에 대한 이미지는 천차만별이라는 의미일 터.
“나는 불쌍한 군사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잠시 칼을 내려놓은 것뿐이지 결코 오랑캐에게 투항한 것이 아니다!”
잠시 후 내 앞에 선 이도종이 그렇게 떠들었다. 제 딴에 황족의 체통을 지키려는 건지는 몰라도 이도종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했다. 당나라 초창기 영주의 터줏대감으로서 돌궐과 설연타를 격파하고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등 개국공신으로서 이적 못지않은 군공을 세우기도 한 인물이 그였다. 그런 그가 안시성 때의 일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후방에서 보급이나 맡으며 말갈의 배신으로 포로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내가 옆에 있는 옥소에게 명했다.
“정중히 모시거라. 내일 새벽에 나가는 배에 태워 태왕 폐하에게 보낼 것이다.”
“뭐, 뭐라?!”
그 결정에 이도종이 경악했다.
“나, 나를 고구려로 보내겠다고?!”
“그렇소.”
“웃기지 마라! 내가 언제 고구려로 가겠다고……!”
“태왕 폐하께서 당나라 황족에 대한 예우를 다하실 것이니 염려하실 일은 없을 것이오.”
“자, 잠깐만!”
나는 붙잡으려는 그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할 말만 하고 이도종을 내보냈다.
사실 이도종에 대한 처우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그의 신분으로 보자면 이곳에 포로로 잡아 두어 다른 고구려 포로들과 교환할 수도 있었고 여러 외교 카드로 쓰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나는 본래 역사인 주필산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고구려의 귀족인 두 욕살을 장안으로 끌고 간 이세민의 계책을 모방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얼핏 보면 이세민이 자비를 베푼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나 두 욕살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고는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 군사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손대음과 같은 다른 고구려 배신자를 유도하고자 했던 이세민의 치밀한 내막이 깔려 있었다.
수나라 말부터 당나라 개국을 모두 지켜봐 온 이도종만큼 당나라 내부 사정을 훤히 아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를 포섭만 한다면 중원 진출의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결정에는 나름 확신이 있었다.
이세민 사후 이도종과 방유애는 어차피 당나라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치열한 정치적인 대립과 갖은 모략에 휘말려 숙청을 당하는 인물들이었다.
그 자세한 배경에는 장손무기와 저수량 같은 인물들의 무고가 있었다.
“이거 놔라, 이놈들! 나를 오랑캐 나라에 잡아가려는 게냐!”
이세민이 죽고 난다면 이도종은 어차피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그를 회유하여 중원 정벌의 최전선에 세우게 될 것이다.
* * *
[莫向遼東去, 迢迢去路長。
요동으로 가지 마라, 가는 길이 아득하게 멀도다.
老親倚閭望, 少婦守空房。
늙으신 양친께서 문간에 서서 자식이 돌아올까 먼 곳을 바라보고, 젊은 부인은 홀로 빈방을 지켜야 하느니.
有田不得耕, 有事誰相將。
농지가 있어도 경작할 수 없고, 변고가 생기면 어느 누가 돌보아 주겠는가.
一去不知何日返, 日上龍堆憶故鄉。
한번 가면 어느 날 돌아올지 모르니, 날마다 용퇴에 올라 고향을 추억할 뿐이로다.] 『수사유문』
[莫向遼東去, 從來行路難。
요동으로 가지 마라. 가는 길 험난하니.
長劍碎我身, 利鏃穿我腮。
장검이 내 몸을 짓이기고 날카로운 화살촉이 내 뺨을 꿰뚫으니.
性命只須臾, 節俠誰悲哀。
생명은 그저 찰나일 뿐, 절개를 지킨 협객이 된다 한들 어느 누가 슬퍼하여 울어 준단 말인가.
功成大將受上賞, 我獨何為死蒿萊!
공을 세운다 한들 장군이 좋은 상을 받을 뿐이니, 내 어찌하여 죽은 풀떼기가 되어야 하겠는가!]『수사유문』
“이를 중원에 퍼뜨리시겠다고요?”
“요동요 때처럼 말입니까?”
임유관의 증축에 박차를 가하던 때에 내가 보여 준 그럴듯한 시와 노래 가사에 요동에서 한번 경험한 걸걸중상과 옥소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과 공을 세워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회의감이야말로 중원의 민심을 크게 흔들 만한 기발한 방책이었다. 당장 고구려의 인식을 좋게 만들기는 어렵더라도 당나라의 인식을 떨어트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걸 노래로 만들어 퍼뜨리는 것만큼 효과가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의 기원은 내가 중국에서 유랑하다 읽은 명나라 사람이 쓴 역사소설 수사유문에서 따왔다. 고구려 원정 이후 중원 백성들의 삶이 그대로 드러난 시가 아닌가.
“그래. 당장 시일을 벌자면 중원의 민심을 어지럽히는 계책만 한 것이 없으니까.”
좋게 말하면 고구려의 임유관 정벌은 북쪽의 이적을 고립시키는 형국이었고 그 반대라면 이곳이 고립된 상황이었다. 위에서 이적이 내려오고 중원에서 군사가 몰려온다면 그야말로 앞뒤로 포위되는 형국인 셈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원의 민심을 어지럽혀서 시일을 벌고 신속하게 요서에 진을 친 이적의 당군을 분쇄해야 했다.
“주군!”
“무슨 일입니까?”
그나마 정비가 돼 있던 북문 검수를 뒤늦게 맡은 설인귀가 다가왔다.
“이적이 전령 군관을 보내왔습니다.”
“이적이 말입니까?”
“예. 아직 북문에 당나라 깃발이 내려지지 않은 곳이 있사온데 이곳의 상황을 모르고 온 듯싶었습니다.”
임유관의 동서와 남쪽을 신경 쓰다가 북문 검수를 최대한 미뤄 놨는데 그 때문에 아직 이곳 소식이 이적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엇 때문에 왔답니까?”
“화살과 운제를 시급히 보내 달라 요청해 왔습니다.”
임유관 장악이 끝나고 당나라의 보급 현황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 * *
“지금 뭐라 했느냐? 임유관이 고구려에 넘어갔다고?”
“해류에 휩쓸려 발해만에 이른 고기잡이배가 그리 전해 와 혹시 몰라 정탐선을 파견했더니 그 말이 사실로 입증되었습니다! 백 척의 고구려 전선이 발해만 일대에 나타나 임유관을 기습한 것입니다! 대장군.”
행군총관 배행방의 보고에 마침내 임유관 함락 소식이 내주에 주둔한 설만철에게 전해졌다. 그의 안색이 퍼래졌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폐하께서 내게 수군을 맡기셨거늘, 놈들이 바다를 통해 임유관을 기습할 줄이야!”
바다를 내준 설만철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찌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묘도군도에서 번번이 고구려 수군에 막히는 바람에 산동반도의 등주와 내주, 체주를 오고 가며 정면 승부를 피하고 있었다. 수군영을 설치한 고구려 수군의 위세가 날로 사나워지고 있었고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슨 낯으로 폐하를 볼꼬. 당장 임유관 앞바다에 상륙한 고구려 놈들의 배라도 격침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 그렇습니다만.”
“배 장군에게 전선 50척을 줄 터이니 당장 격침하고 오게나. 하루가 급하네!”
“제, 제가요?!”
“그럼 부장인 자네가 가야지, 내가 가랴?!”
“하, 하지만 장군! 적선이 100척입니다. 또한 전방에 고구려 수군이 우리 당선을 그냥 보내겠습니까?”
설만철의 지시에 배해방은 울화통이 터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주에서 임유관을 가려면 묘도군도에 주둔한 고구려 수군의 시선을 피해 반대편으로 우회하여 가야 했다. 또 임유관에 상륙한 적선이 100척에 이르거늘 50척으로 격침하라니, 이런 터무니없는 지시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의 전선을 격침해야 해! 빨리 안 가고 뭐 하는가?!”
설만철이 선황의 딸인 단양공주에게 장가를 들어 부마도위가 된 뒤 거만해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답시고 저런 무리한 지시를 내리는 꼴이 아닌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지난번에 이어 잘못된 상관 배정에 어금니를 악문 배행방이 분기탱천한 표정으로 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