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69화 (169/335)

169화 말갈

바야흐로 삼국의 패권은 근초고왕의 백제와 장수태왕의 고구려, 그리고 진흥왕의 신라에 이어 개화 시대를 맞은 고구려의 수중에 다시 놓였다. 그 상징과도 같던 아리수 유역의 중심지가 그야말로 옛 광개토태왕 때와 비슷한 국면이 되었다.

삼면의 바다가 거의 봉쇄되다시피 한 신라는 고립을 피해 간신히 숨구멍만을 튼 채 당나라와의 교역을 유지하고 있었고 백제는 가야를 통해 새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는 등 십자 외교의 중축인 고구려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오호라, 저기가 아리수로구나!”

가야에서 귀환한 걸사비우와 홍기군은 탐라와의 교역에서 확보한 황칠과 조공으로 얻은 말, 감귤, 전복, 참돔, 사슴 등의 토산물을 들고 백제 해협을 거쳐 서해 큰물섬에 이르렀고 그 후 이틀 뒤에는 아리수 유역에 당도했다.

“삼족오 깃발이 보인다!”

갑판 위에 올라 외치는 고구려 장정의 우렁찬 목소리가 알리듯 고개 돌려 보이는 서아리수와 북아리수 일대가 모두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었다.

“이런 영광스러운 순간을 작은 막리지와 옥소 누님, 설 장군, 중상이 형님과 함께하지 못해 아쉽군.”

걸사비우는 앞서 태대사자가 진출한 갑비고차를 발판으로 작은 막리지와 삼기군이 수복한 매소홀현 일대와 아리수 유역을 몸소 확인하고 싶었다. 교역로 확보와 유구열도 진출로 인해 가야에 주둔하는 시일이 예상보다 길어지고도 한참이나 길어져 미처 참전하지 못했으나 뱃길을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삼기군 소식을 손꼽아 기다린 그였다. 그 대미를 장식한 사건이 불과 얼마 전 수복한 새 영토였다. 이사부, 거칠부, 김무력 등 신라의 진흥왕이 보낸 자들에게 빼앗긴 지 100년 만의 쾌거였다. 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걸사비우의 얼굴에 희미가 엇갈렸지만 그럼에도 뿌듯한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이러한 영광의 중심에 말갈이 함께 있었다.

“남쪽은 휑하군.”

한편 백제 진영과 동해 바다, 서라벌, 가야 등 지켜야 할 전선이 넓어진 까닭인지 신라의 영토로 인정받은 아리수 이남의 신주는 남동쪽의 김흠순이 지키는 이성산성 일대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무주공산과도 같았다. 오히려 매소홀현과 잉벌노현에서 실시되고 있는 새 농사법으로 말미암아 아리수 이남과 이서 지역에 광범위한 토지를 소유한 신라 농민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고구려 백성으로 받아달라는 요청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이는 칠중성과 북한산성의 연이은 패배와 려주(麗洲) 설치로 인한 여파였다. 신라보다 고구려라는 민심이 강 일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고 고구려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신분증인 삼족오 호패와 함께 1년간 조세 면제는 물론 재산을 함부로 뺏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도 크게 작용했다. 희망자에 한해서는 베 하나로 중원에서 온 악병을 물리친다는 동명왕 침을 놓아 준다는 이야기 또한 한몫을 했다. 예약자만도 벌써 수백 가구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안전하게 농사를 짓고 어업에 힘써 하고 싶어 하는 아리수 토착 백성들에게 연패를 거듭한 신라는 불확실했다. 여러 조건을 보아도 민심이 신라를 이반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때 배를 타고 아리수 중심부에서 마중 나온 이는 바로 얼마 전까지 백제 사람이었던 젊은 청년이었다. 아리수 일대의 승려, 약사, 점쟁이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동행시켜 현지인의 민심을 크게 뒤흔들기도 한 장본인이었다.

걸사비우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흑치상지 장군, 그대의 활약은 내 이곳까지 오면서 잘 들었소. 우리 고구려의 일원이 되었다지요? 작은 막리지를 도와 미추성과 북한산성 공략에 큰 힘이 되어 주어 고맙소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홍기의 장이야말로 저 남쪽에서 김유신과 대적하여 가야 지역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들었습니다만, 그 공에 비하겠습니까?”

“그거야 가야의 저력이었지요! 흐하하. 빨리 북한산성에 들어가 그대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싶구려. 날도 화창한데 여기 이 신선한 감귤 맛 한번 보시구려. 탐라에서 가져온 귀한 것이오.”

중상이 형을 흉내 내듯 걸걸한 웃음을 터트린 걸사비우가 흑치상지에게 새콤한 감귤 하나를 건넸다. 비단이나 쌀 한 가마보다 값비싼 탐라의 귀중한 특산품이었다.

* * *

휘우웅!

떡대만 한 대도를 장난감 다루듯 휘두르는 이근행의 무용은 무시무시했다. 과연 공을 세우자마자 이세민이 친히 국성 이씨를 사성한 자의 아들다웠다.

“헉헉.”

일대일에서는 좀처럼 밀리지 않는 걸걸중상이 겨우 일곱, 여덟 합 만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설인귀와 연수영을 비롯한 몇몇 무장들을 제외하고는 무예가 출중한 걸걸중상을 저렇게 빨리 지치게 할 만한 무장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와아아아!

그래도 그가 바로 나서 준 덕분에 걸걸중상을 따르는 선기군이 즉각적으로 분기탱천해서 적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잘못하다간 걸걸중상이 위험했다.

다그닥 다그닥.

삼기군과 거의 대등한 기마술을 보유하고 있는 이근행 휘하의 말갈부대를 상대로 섣불리 등을 보일 수도 없을 터다.

‘젠장, 조금 더 정보를 파악하고 움직일 걸 그랬나.’

나는 어금니를 질근 깨물었다. 신라와의 승리에 잠시 취한 나머지 너무 섣부르게 움직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거기다 이곳은 무려 임유관이었다. 중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이세민의 당나라가 그렇게 허술하게 대비해 두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설마 말갈 출신들을 이곳에 배치할 줄이야.’

여진족의 전신이자 만주족의 뿌리인 말갈은 하나로 통합된 삼기군이나 고대 당에 편입된 부족이나 전투 능력 하나만 놓고 보자면 북방의 어느 유목 민족들과 비교해도 절대로 꿇리지 않았다. 요동에 쳐들어온 이세민이 괜히 보통의 고구려인들은 포로로 삼거나 예우해 주었던 반면 고구려에 복속된 말갈 부족을 하나같이 모두 구덩이에 처넣으라 한 것이 아니다. 본래 역사의 주필산 전투에서도 말갈군을 향한 이세민의 두려움은 기록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이런 말갈을 그저 외지인이니 촌뜨기 취급하는 중앙의 귀족들도 문제지.’

말갈을 한 점 이민족시(異民族視)하지 않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주장대로 내가 살펴본 고구려 평민들에게 말갈이란 어디까지나 변방 시골 사람에 불과하다. 지체를 따지는 귀족들의 경우라면 더 멸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이 배신자 놈!”

그러므로 대조영과 그의 부친인 걸걸중상은 고구려 속말부 출신 촌놈인 셈. 그러니까 지금 걸걸중상이 이근행을 가리켜 배신자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걸걸이를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륙한 군사들의 정비를 마친 옥소가 걸걸중상의 불안한 모습에 당장이라도 투입할 준비를 했다. 내가 망설임 없이 지시했다.

“방패병을 앞세워라. 활 솜씨에 자신 있는 궁수들을 언제든 쏠 수 있게 뒤에 배치하고.”

“기마궁수나 창병이 아니라요?”

옥소가 그런 내 지시에 무슨 소리냐는 듯 잠시 갸우뚱했다. 그도 그럴 게 적의 주력은 기병이고 삼기군의 본 실력은 기사술에서 나온다는 걸 그녀도 나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창병도 아니고 방패병은 이해할 수 없는 배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진의 동태를 유심히 살폈다. 이도종이 군을 더 투입하는가 싶더니 이내 궁수 부대를 위주로 진법을 포진하기 시작했다. 저 위치에서 작정하고 화살을 퍼부었다간 아군이고 적군이고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우리와 싸우는 말갈군이 밀리는 낌새가 보인다면 주저 없이 화살을 쏘겠다는 거냐?’

순간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토산 건으로 안시성에서의 패전이 이도종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후방에 머무르게 한 것이라면 그는 두 번 다시 고구려에 져서는 안 됐다. 요서를 지키는 양만춘이 고육지책을 썼다면 틀림없이 이도종도 마찬가지의 일을 벌여서라도 임유관을 사수하려 들 것이다.

“지금 가겠습니다!”

예리한 눈썰미로 내 의도를 파악한 옥소가 곧 방패병과 궁수 부대를 거느리고 걸걸중상과 선기군의 뒤를 받쳤다.

“죽어라! 이 배신자 놈아.”

“시끄럽다, 이놈!”

걸걸중상과 이근행의 격돌이 한층 더 격렬해지는 순간.

때앵, 재빨리 움직인 옥소가 깍지를 떼자 휙 날아간 화살이 이근행의 팔꿈치에 꽂혔다.

푹!

“윽, 어느 놈이냐!”

팔꿈치에 박힌 화살을 뽑아 던진 이근행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뒤에 다른 궁수들도 그녀의 활시위를 신호 삼아 화살을 쏘아 댔다.

푸푹!

히이잉.

목표물인 큰 말에 연달아 명중하며 적의 기병들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기 일쑤였고 서서히 전세가 역전되려 하고 있었다.

캉캉!

방패를 내리치는 쇳소리. 방패를 들이밀며 다가오는 고구려군에 밀리자 이근행이 소리쳤다.

“이런 비겁한 놈들, 퇴각하라!”

고구려군의 대응에 당황한 것이다. 그렇게 이근행을 따르는 말갈 기병들이 말발굽 소리를 내며 물러서려 했다.

쉬이이잉-

저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 무사히 퇴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슈우우-

공중을 덮은 수백 발의 화살이 중력을 싣고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퍼퍼퍼퍽!

이내 적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고 떨어지는 화살 세례. 치우와 오색 그림이 새겨진 장방패들이 나를 감쌌다. 눈앞의 승리를 잡고자 나까지 나서지 않기를 다행이었다. 조금 전 이근행을 끝장내겠다 하여 전력을 투입했다간 이도종의 화살 공격에 휘말렸을 것이다.

“쏴라!”

성 밖에 나온 이도종이 멀리서 직접 궁수들을 독려하며 어지럽게 화살을 쏘아 대고 있었다.

‘화살을 아낄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임유관은 보급이 지나치는 통로답게 화살 하나는 완벽하게 준비돼 있는 모양이다.

“작은 막리지!”

방패병을 통솔하는 옥소가 엄호하자 곧바로 선기군의 기병을 뒤로 물린 걸걸중상이었다.

으아아아!

한편 앞뒤로 받는 공세에 사면초가에 빠진 이근행의 말갈군이 고슴도치가 되고 있었다. 내가 걸걸중상과 그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걸걸이 네가 저들을 배신자라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한 번쯤 용서해 주는 것은 어떠냐?”

“저것이 배신자의 말로입니다! 어찌 은혜를 베푸시려 하십니까?”

“놈이 배신자일지는 모르나 그중에는 억울하게 끌려간 이들도 반드시 있을 거다. 저들을 포섭한다면 중원과 북방에 널리 유랑하고 있는 말갈인들을 회유할 수도 있다.”

“자, 작은 막리지!”

“그들의 뿌리는 결국 걸걸이 너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그들을 모두 죽이겠느냐?”

배신자라고 무턱대고 다 죽였다간 중원에 복속한 이민족들뿐만 아니라 고구려에 복속하려 하는 이민족들 역시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다. 당나라와 이민족 간에 틈이 생겼다면 주저 없이 고구려가 그 속을 파고들어야 한다.

손대음 같은 고구려 배신자로 득을 보았던 이세민의 경우도 있고 바로 얼마 전 칠중성 배신자 덕택에 고구려가 무사히 한강 이북을 장악하기도 했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아군의 피해를 하나라도 더 줄이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받아들여야 한다.

다양한 부족과 다른 환경의 말갈 부족을 하나로 통합시키기 위해서는 빌어먹게도 유교의 그 자비라는 인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시간이 없다. 어찌하겠느냐?”

나는 그것을 앞으로 말갈인들의 가장 큰 구심점 역할을 수행할 걸걸중상에게 선택권을 주듯 묻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 뒤를 이어 말갈의 지배자 될 대조영의 미래도 함께 보고 있었다.

“으윽!”

“아악!”

“사, 살려!”

좌우로 허둥지둥 오갈 곳 없는 말갈인들은 그야말로 죽음을 앞둔 유목민들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짧게 탄식한 걸걸중상이 말했다.

“살리겠습니다.”

* * *

“이도종 이놈!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

자신을 앞세워 고구려를 막으라 할 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했다.

특히나 이민족 출신이라면 치를 떠는 방유애가 임유관에 당도하기 전에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라도 빠졌어야 했다.

“빌어먹을!”

뒤를 따르는 부하들의 죽음에 피가 주륵 흘러내릴 만큼 입술을 꽉 깨문 이근행은 아버지에 이어 당나라에 충성을 바친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이리도 허무하게!”

고립무원의 상태에 주먹을 불끈 쥔 이근행이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터뜨리려 할 때.

“적의 화살을 막아라! 형제들을 지켜라!”

탕탕. 조금 전까지 싸웠던 걸걸중상의 군사들이 사위에 기다란 방패를 세우며 호위를 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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