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동분서주 (2)
“고구려가 개입하는 것만으로 전세가 이리도 쉬이 역전이 될 줄이야. 천하의 김유신과 그 아우도 바다를 이용한 공격에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일세!”
“지난번 가야를 잃은 것이 컸네. 가야가 아니었다면 굳이 김유신이 북쪽 전선에서 남으로 갈 일이 무에 있던가. 가야에 대한 그의 집착이 신라의 기세를 누그러뜨린 걸세.”
“고구려든, 가야에 대한 김유신이의 집착이든, 덕분에 의직 장군이 서변인 요거(腰車) 등 10여 성을 도로 되찾았다 하네. 드디어 한숨을 쉴 수 있게 되었으이.”
“그거 다행이구만.”
“한데 성충, 이 기쁜 소식에도 자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구만. 무슨 일 있는가?”
흥수가 주름이 깊어진 성충을 보고 의아해했다. 고구려를 이용해 당장의 위기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빼앗긴 국경의 성을 일부 도로 되찾았다. 요충지인 대야성과 가잠성을 잃은 일은 여전히 뼈아픈 일이나 군을 정비해 나아간다면 올해가 지나기 전에 다시 빼앗을 수 있다.
“옛 백제의 한성을 고구려와 신라가 양분하고 있으니 한고비를 넘겼다고 어찌 기분이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욱리하(郁利河) 일대는 본디 우리 백제의 땅으로 우리가 나서서 수복해야 할 온조왕의 기운이 가득한 터이거늘.”
“…그건 그렇지. 이게 다 명색이 백제의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이 마한 땅에서 안주하며 제 권력이나 움켜쥐려고 하니 고구려나 신라에 다 빼앗기는 게 아닌가. 어라하께서도 이번 사태로 북쪽으로는 관심을 끊으셨으니 원.”
정확히는 고구려 사신이 사비에 이르렀을 때부터였다. 연개소문의 막내아들 연남산이 백제 군사들이 움츠릴 만한 거대한 누선을 몰고 백강(白江) 하구에 이르렀을 때 간담이 서늘해진 의자왕은 결심했다. 저 북쪽의 고구려와는 절대로 영토를 접하지 않을 것이라고. 기존에 군대부인의 편에 선 귀족들의 입장과 동일시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약화될 여지를 남겨 두려 하지 않았다.
과거 성왕이 한성 백제의 꽃을 피운 욱리하(郁利河) 일대를 되찾고 왕권을 공고히 하려 했으나 귀족들은 그곳을 방비할 사병을 내어놓지 않았다. 그사이 고구려의 대병이 칠중하(七重河)에 당도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졌고 잠시 군사를 물린 사이 신라의 심맥부(深麥夫)가 훔친 것이다.
그렇게 한성 백제의 이름이 삼한에서 점차 잊힐 무렵이었다.
“효 황자께서 돌아오셨다!”
고구려의 연남산과 함께 옛 백제의 터를 정벌한 부여효가 돌아왔다.
“효 황제께서 온조왕의 기운을 받고 오셨다!”
“아니, 그게 사실이야?”
“우리 정복 군주이신 어라하의 기백을 물려받으셨다고 하구먼.”
아니나 다를까, 군대부인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여론에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개선장군인 양 사비수(泗沘水)를 따라 왕성에 도착한 부여효를 위해 적지 않은 귀족들이 마중 나갔다. 이번 일을 빌미로 태자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정사암(政事巖) 내에서도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우리도 마중을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수야 없지.”
“그럴 수 없다니?”
“우리까지 간다면 정녕 군대부인의 의중대로 되는 일이 아닌가. 백제의 태자는 융 태자 한 분뿐이야. 어설픈 가짜 소문에 휘말려 백제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지. 자네도 정신 똑바로 차리시게.”
“이거 참…….”
성충의 고집에 흥수는 답답한 표정으로 집무실 내의 고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자가 바뀔지 모른다니, 백제 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큰 광풍이 불어닥칠 것만 같았다.
* * *
“집중하자! 이만큼은 내일까지 끝내야 해!”
“물관리를 해야 하니 높고 깊은 곳이 없도록 논 고르기를 잘해야 한다고!”
“여기 물을 얇게 대고 모춤을 가지런히 맞추라고! 삐뚤어졌잖아!”
고성이 오고 가는 하루. 관개시설과 단기간에 집중할 수 있는 노동력이 갖추어지자마자 매소홀 지역의 논지를 중심으로 모내기가 실시되었다. 1모작보다 모내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는 2모작 논의 경우에는 서둘러 모내기를 하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에 늦어도 6월 하순까지는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벼의 재배 조건이나 논의 비옥도, 심경다비(深耕多肥) 조건, 비교적 온난한 평야지 등 기후나 환경에 따라 정사각형식으로 할지 아니면 직사격형식의 병목식으로 모를 심을지를 정해야 하기에 토착민들의 적극적인 협력 없이는 모내기 시행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호패까지 만들어 주며 고구려인으로 삼겠다는 포로에 대한 처우와 신라 정복지에 대해 1년간 세금 감면, 적조 현상 해결 등 남산의 민심 수습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수확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토착 농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전쟁보다 더 어려운 걸 맡은 게 아닐는지.”
한편 오늘도 관개시설을 정비한 선도해는 식은땀을 닦으며 그렇게 푸념했다. 젊은 시절 안학궁 인근의 수리 관개시설의 확충을 맡았다는 이력 하나로 이 위험천만한 국경까지 내려와 터무니없는 농사법을 실습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남산 중리대형께서는 이미 북한산성을 떠나셨습니다!
“으잉?!”
적당히 핑계를 대고 돌아가려고 해도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당사자가 이미 북으로 올라갔단다. 그것도 무려 요동으로.
[가라달선도해(可邏達先道解)]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때마침 태왕으로부터 반년간 매소홀 지역의 가라달(可邏達)을 맡긴다는 칙서가 내려왔으니 이러한 사안이 제법 일찍부터 내정돼 있던 것이다.
“이런, 내가 당했구만!”
선도해는 얼마간 눈살을 찌푸렸으나 또 냉정히 생각해 보면 자신 말고는 이곳에 새 농사법을 실시할 인재가 딱히 없기도 했다.
누가 이런 위험천만한 변방에서 일을 벌이겠다 하겠는가.
“이거 농사법만으로 나를 이곳에 부른 것은 아니로구만.”
그때 선도해는 동쪽에서 오는 신라 사신단을 눈여겨보았다. 평양에 방문하여 살길을 도모하고자 했던 낯익은 얼굴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 * *
장산군도에 이르기까지 나흘 동안 나는 간만에 휴식이라는 것을 좀 취할 수 있었다. 많고 많은 날 중에 왜 나흘인가 하면 고구려 판옥선의 시속은 6노트로 약 11km. 아리수에서 요동만의 장산군도까지의 거리를 매소홀에서 낙동강까지의 거리보다 조금 더 긴 약 440km로 계산했을 때 하루에 10시간을 이동하면 평균 110km씩으로 나흘이면 당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요동에서 온 설인귀가 사흘하고도 반나절 정도 걸려서 아리수에 이르렀다. 고구려 수군절제사라는 나름의 직위도 맡았으니 쉬지도 않고 조금 무리를 해서 온 모양이다.
“날씨 한번 좋군.”
동해 앞바다에서 첫 출항을 했을 때 속이 울렁거리던 뱃멀미에도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고 파도도 여름 바다치고는 잔잔했으니 한강에서의 승리를 누리며 조용히 휴식 취하기 더할 나위 없는 하루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야로 마냥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던 건 아니다. 부상을 당했다는 양만춘이 중상인지 가벼운 부상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요동과 요서의 동태가 어떠한지도 걱정이 되면서 요동에 머물렀던 설인귀를 통해 정보를 최대한 모으기로 했다.
물론 지난번 일로 오해하고 있을 설인귀의 마음을 한 번 더 풀어 주기는 해야 한다. 이번에 북한산성과 아리수 일대에서 구한 구기자와 국화꽃 향이 은은하게 나는 귀한 신라주(新羅酒)를 그에게 건넸다.
“받으십시오.”
“오호, 이건 지난번 가야에서 맛본 신라의 술이로군요! 이 향을 맡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벌써부터 군침이 돕니다.”
“군침이 돌면 마셔야지요.”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주군.”
흔쾌히 술을 건네받고는 이내 술병째로 들이켜는 설인귀는 앞서 가야에서 맛본 술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라주(新羅酒)란 신라의 선덕여왕이 즐겨 마셨으며 김유신이 전장에 나가기 전마다 마셨다는 바로 그 유명한 술이다. 유래를 따진다면 신라 제3대 임금인 유리이사금 시절부터라던가. 서라벌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길쌈 경쟁을 시킨 뒤 진 쪽이 술과 음식을 장만해 이긴 쪽에게 사례하도록 하고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는 옛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술 내기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삼기군의 희생이 적은 것은 괄목한 만한 성과였습니다.”
“지난번에 주군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오히려 공성을 벌이지 않아 큰 희생이 없었던 것을요.”
구수한 신라 술이 들어간 덕분인지 설인귀는 그제야 내 진심을 알아주었다. 나는 아리수 공략에서 삼기군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북한산성 공략으로 마름쇠와 포노에 당해 중상을 당한 온사문의 군사들이나 신라의 노포 공격에 당한 청룡부대의 여러 부상자가 지금도 한참 아리수 유역의 의원을 만나 치료 중이다. 그중 일부는 다시는 전장에 나서지 못할 만큼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당나라가 아닌 삼국 간의 영토 쟁탈전에서 이러한 희생을 보는 것은 결코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닙니다. 제가 걸걸이 말고도 설 장군에게도 따로 지시를 해 두었어야 했습니다.”
“소장의 불찰이래도요!”
“이거 서로 불찰이라 하니 술잔을 나누며 깨끗이 잊읍시다.”
“좋습니다! 하하.”
벌게진 얼굴의 설인귀는 다시 술병을 들었고 나는 작은 잔을 들었다.
쨍-!
날과 어울리는 아주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잠깐,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과장된 소문일 수도 있다고요?”
“병법에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나옵니다. 적을 속이기 위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괴롭히며 쓰는 계책이지요.”
알코올이 들어가자 설인귀는 그렇게 요서에서의 전황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냈다.
“설 장군께서는 어찌 그리 보는 겁니까?”
“소장이 듣고 보았던 대모달은 고구려 사람 가운데 천하의 대막리지에게 복종하지 않은 유일한 대장부였습니다. 성과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뚝심 있는 결단을 내릴 만큼 용기와 소신 있는 인물이지요.”
“그건 저도 잘 압니다.”
“하나 지금은 당나라가 계책을 바꾸었고, 고구려의 민생을 어지럽히기 위해 장기간의 소모전을 벌이고 있으니 그에 대응하는 다른 계책을 쓰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솔직히 감탄했다. 경사가 낮은 구릉 지대의 요서를 방비하는 것을 비관적으로 보았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설인귀의 말처럼 이것이 적을 속이기 위해 아군마저 속여 꾸며진 계책이라면?
당나라는 끊임없이 고구려 내부에서 약탈을 벌이도록 우리 후방에 침투한 별동대까지 불러들여 일거에 요서 지역을 다시 장악하려 들 것이다.
그걸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시성에서 이세민 암살을 시도하려 들었던 그 아저씨는 선량한 고구려 백성들의 피해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소문을 퍼뜨리면서까지 일을 꾸민 건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게 양만춘이 누구인가.
비범한 안시성 성주의 혜택에 힘입어 내 이름도 덩달아 천하에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이세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치욕을 안긴 대고구려의 장수가 아닌가.
그가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 요하 인근에 파다하게 퍼졌다면 당나라 무장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황제에 치욕을 안긴 양만춘의 수급을 이세민에게 바치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올 무렵이었다.
두둥! 두둥!
그때 북소리와 함께 멀리 대장산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은 요동의 수군통제사 연수영의 대장선이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