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아리수 (11)
“아서라, 지금 나가 보아야겠다.”
“하오나 폐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어머머, 아직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사온데.”
진덕여왕은 김춘추의 귀환 소식에 왕궁의 시녀들로부터 대수포(大袖袍), 중단(中單), 치마, 저고리, 폐슬(蔽膝) 등의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가다듬게 하는 것조차 마다하고 궁 밖으로 마중 나갔다.
“내 이찬간과 그 자제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기 위해 동쪽의 아등변(阿等邊), 남쪽의 형변(兄邊), 서쪽의 미릉변(未陵邊), 북쪽의 비례산(非禮山)에 각각 수신(水神)과 해신(海神)에게 기원하는 의례를 치르라 하였습니다.”
오직 김춘추와 그 자식만을 위한 원거리 항해의 안전 의례 의식이 사방에서 행해졌다. 심지어 서쪽의 미릉변(未陵邊)은 백제 해협에 인접해 있었다.
“남쪽의 황산하(黃山河: 낙동강)에서 사독(四瀆)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것도 들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신과 자식을 생각해 주시어 감읍할 따릅니다. 폐하.”
고두감읍(叩頭感泣). 여왕의 배려에 김춘추는 머리를 조아리며 감격하여 눈물을 보일 뿐이었다.
덕을 쌓는 일이 날마다 새로워 사방 천지를 아우른다는 신라 국호의 의미가 온전히 그에게 임했다. 그야말로 덕업일신망라사방(德業日新網羅四方)의 김춘추였다.
“보잘것없다니요? 그대의 노고에 당나라 황제로부터 고구려와 백제를 응징하겠다는 약조를 받아 내었습니다. 이번에 왜가 백제에 군사 협력 요청에 따르지 않으려는 것도 다 이찬간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진덕여왕은 어느덧 뒤에 모인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려 묻고 있었다.
“폐하의 말씀대로이옵니다!”
“이찬간께서 왜에 가시지 않았더라면 저 간악한 섬에서 온 종자들은 틀림없이 옛적과 같이 백제를 도와 우리 신라의 배후를 공격하려 들었을 것입니다!”
술종과 임종을 필두로 한 화백회의의 구성원들이 뜻밖의 지지를 해 주고 있었다.
김춘추는 사실 왜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말이 통하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왜의 왕족들과 잘 협상하여 백제는 몰라도 고구려에 적대감을 가지도록 견제하려 했으나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해 봐야 왜가 삼국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었고, 화백회의는 그것이 김춘추의 공이었다며 입을 모아 칭송하고 있었다.
‘대장군과 상대등의 짓인가.’
상주행군대총관 김유신과 상대등 알천을 중심으로 화백회의에서 차기 신국의 왕위 계승에 대한 이야기를 암암리에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일 여주가 승하하고 나면 성골로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더는 성골이 없는 신라의 골품제는 크게 흔들리고 말 것이다.
진골 출신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다른 마음을 품기 전에 신라의 제25대 임금인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를 미리 낙점한 두 인물이 나라의 위기에 앞서 출정하기 전 지지기반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
‘어림도 없는 일!’
그러나 김춘추는 자신이 서라벌을 비운 사이 별도의 군사 행동을 일으킨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는 김유신의 정치적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것보다 조금 전 대장군에게 급히 군사를 물리라 황산하(黃山河)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신의 충고를 듣지 않으시고 대장군의 의견을 따르셨습니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김춘추의 물음에 진덕여왕은 살며시 시선을 피해 허공으로 돌렸다. 누구의 탓을 하나 무슨 말을 해도 핑계였기에 미안한 감정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이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개입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신국을 위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여왕이 고구려, 왜, 당나라를 다녀온 김춘추에게 고견을 묻고자 했다.
* * *
“네 이놈들! 내가 바로 북한산성의 성주이자 사방 천지를 아우를 위대한 신국의 장수 동타천이니라! 어찌 한 놈도 오지 않는 게냐! 겁을 먹었느냐!”
큰 산 위에 쩌렁쩌렁 울리는 동타천의 고함 소리에 성에 이른 군사들이 움츠러들었다.
단신으로 대도를 휘두르며 성문에 진입하려는 고구려 군사 넷을 쓰러뜨렸고 흑치상지가 나섰으나 백제 병사 일곱이 죽거나 다쳤다.
백제가 자랑하는 무사가 속속들이 쓰러지자 내 옆에 누군가 마찬가지로 욱하며 소리쳤다.
“흑치상지 너 뭐 하는 거야!”
원수 신라의 장수는 반드시 백제인이 거두어야 한다며 주장했던 부여효로 말미암아 고구려 군사는 더는 성문 쪽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아리수 이북 수복을 위해 백제가 알아서 희생을 치르겠다니 나는 기꺼이 마다하지 않았다.
“겨우 한 놈을 상대로 우리 백제 병사가 몇이나 당하는 거냐고!”
그런데 막상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역정을 내고 있다. 누구는 뒤에서 편하게 구경만 하고 소리만 치니 그야말로 입만 산 백제 망나니라 할 수 있겠다.
-산기의 우측을 맡은 옥소는 사내다운 사내를 좋아한다오. 그러니 신주 공략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셔야 하지 않겠소?
조금 전에 내가 괜스레 그런 말을 해서 그런지 그 시간부로 흑치상지를 더욱 닦달하는 백제 왕자였다. 그 때문에 흑치상지는 직접 동타천과 대적해야 했다.
“쳇!”
살짝 현타가 온 흑치상지를 보자 백제를 향한 충성심이 무척이나 의심스러워 보였다. 어느 사람이나 다 그렇듯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명분이 있어야 하며 그저 고구려를 돕기엔 그 명분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미추성 점령이 끝나고 포로들을 수습하자마자 현명한 흑치상지는 보급 이외의 임무에서 발을 빼려 했었다.
그러나 옥소가 부여효를 끌고 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부여효는 서해에서 무슨 감동을 받은 건지 백제의 선전을 우리 고구려와 신라에게 보여 주겠다는 허세를 부리려 했다.
물론, 고구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으니 나는 마다하지 않은 거고.
“젠장! 빌어먹을!”
하지만 그것이 뜻하지 않게 흑치상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저 백제 병사 수십이 쓰러진 것이 지배계층인 부여효에 입장에선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저 흑치상지에게는 집안 대대로 함께 해온 충직한 부하들의 희생이었다. 이번에 내가 백제왕을 꼬드겨 그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훗날 명성을 크게 날릴 흑치상지의 가신이 되었을 자들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챙창!
“빨리 해치우지 않고 뭘 하는 거냐고 이 멍청아!”
거기다 만만치 않은 신라 장수와 맞서서 일기토와 다름없는 단기접전(單騎接戰)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싸움에 싸 자도 모르는 왕자의 고함이라니, 방해라도 안 되면 다행일 것이다.
“어딜 가시렵니까? 군사들을 대동하시지요.”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자 예민한 옥소가 고개를 돌렸다.
“옥소, 너는 여기서 군사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거라. 신라 장수가 명예롭고 죽고자 홀로 싸우려 하는데 우리가 대병을 끌고 가서야 의미가 있겠느냐.”
“하지만 저자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닙니다! 도련님.”
옥소의 근심은 십분 이해한다. 성을 이토록이나 철저히 방비하려던 동타천이 제 무예를 얼마나 완벽하게 하려고 그간 열심히 갈고닦아 왔을까. 두꺼운 갑주 안에 숨겨진 근육이라도 직접 본다면 나도 생각을 달리 먹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장수다. 그리고 너 여기서 도련님이 아니잖아.”
“앗, 죄송… 잠깐만요!”
옥소가 당황스러워할 때 나는 몇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자그작. 성벽 아래 신라인들이 설치한 마름쇠를 금동 못신으로 납작하게 밟으며 동타천과 일대일 승부를 벌이고 있는 흑치상지에게 다가갔다.
“큭!”
7척에 달하는 키에 두 자루의 칼날을 양손에 움켜쥔 흑치상지는 날래고 용감했으며 출중한 실력의 무예뿐만 아니라 지략을 겸비했으나 아직 약관에 이르지 못한 나이로 전투 경험이 짧았다.
휘우웅!
저 큼지막한 대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를 만큼 일평생을 무예 단련에 힘써 온 동타천을 홀로 이기자면 아직은 역부족일 것이라는 의미였다.
“윽!”
점차 밀리고 있던 흑치상지가 무언가를 보고 중얼거렸다.
“…남산 중리대형?”
흑치상지의 예리한 눈매가 사거리를 확보한 나를 발견한 것이다.
“……?”
짐승만 한 상체를 가진 동타천 역시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려 했다.
스윽, 내 왼손이 등 뒤에 꽂힌 세 자루의 비도 가운데 한 자루의 손잡이에 이르자 눈치 빠른 흑치상지가 재빨리 고개로 신호를 보냈다.
“으아아아!”
“이, 이놈이!”
상대의 시선을 돌리고자 고함을 치며 쌍도(雙刀)를 휘두르는 흑치상지의 공격. 동타천이 막기에 급급할 때 빈틈이 보였다.
휘욱! 푹!
“욱!”
내 손에서 날아간 비도가 동타천의 옆구리에 꽂혔다. 원래는 급소를 노렸으나 바람 소리에 육감을 발휘한 동타천이 본능적으로 무게중심을 낮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까.
서둘러 오른손에 잡힌 다음 비도를 날렸다.
휘욱!
“어림없다!”
챙챙챙!
작은 동작의 대도의 칼날로 흑치상지의 쌍도를 막은 동시에 아래 손잡이로 내가 던진 비도를 튕겨 냈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안시성에서 양만춘과 함께 설인귀를 포박했을 때와 같은 긴장감이 등줄기에 송골송골 맺힌 땀에서 나타났다.
동타천의 근력과 반사 신경은 가히 300년 넘게 이어온 삼국의 치열한 전쟁이 만든 괴물.
“하아, 하아.”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괴물도 지쳤다. 숙련된 무사 열을 쓰러뜨리고 날렵한 흑치상지의 쌍도를 막고 옆구리 깊숙이 박힌 비도에 철철 피를 흘리며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등에 있는 그 황금의 칼은 연개소문의 비도인가!”
잠시 후 나를 향해 묻는 동타천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마지막 비도를 눈에 담아 두고 있었다.
나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소! 내 아버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외다!”
“그 비도에 맞아 황천길에 간다면 조금은 의미가 있겠구려.”
휘우웅! 쾅!
“끄아아악!”
다시 쌍도를 잡고 일어나려는 흑치상지를 향해 대도를 날리며 쓰러뜨렸다. 무기를 버린 동타천은 피를 한 사발 토하고는 이제 준비가 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끈질긴 백제 놈이로군. 아무튼, 약조는 지켜 주시구려.”
그의 마지막 당부에 나는 기꺼이 장수로서 예를 표했다.
“알겠소. 부디 잘 가시오.”
이내 내 손을 떠난 황금의 보검이 동타천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 * *
“흐하하하! 결국 남산이 놈이 해냈구나. 해냈어! 온달 장군의 숙원을 녀석이 풀어주었구만.”
안한궁 내 대전 다음으로 널찍한 제가회의가 열리는 공간. 연개소문은 도성과 그 인근의 7할 이상의 백성들에게 우두침 접종이 완료되었다는 보고와 함께 남쪽에서의 승전을 보고받고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사옵니다! 그 손자가 대막리지께서 보내신 남산 공자와 더불어 북한산성을 점령하였으니 죽령 이서의 땅을 거의 되찾은 것이나 진배가 없사옵니다.”
“가야를 먼저 정벌한 것이 이번 승리의 지대한 공로라 하겠습니다. 우리를 괴롭혔던 그 김유신이가 북으로 올라오지 못하였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은 그때부터 남산 중리대형은 가히 고구려의 낭중지추(囊中之錐)였사옵니다.”
대로 고정의와 중외대부 미림부와 같은 고참들에 폭풍 칭찬도 이어졌다. 요동과 요서를 포괄하는 요하 전선과 왕성 평양의 방비를 해야 하는 한정된 지원 속에서 남산은 바다를 통해 거침없이 진군하며 고구려의 군사 기지를 남쪽에 설치하기 시작했고 옛 고구려의 영광을 다시금 삼한에 재현하려 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집권 초기까지만 해도 신라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해 백제의 의자왕이 제아무리 신라와의 초기 싸움에서 승승장구를 한다 해도 달팽이의 촉각 위에서 싸운다 하여 작은 나라끼리의 싸움이라며 신라와 백제를 두고 와각지쟁(蝸角之爭)이라 폄하하곤 했었다.
“자네들이 인정하니, 내 아들이 정녕 고구려의 대들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막상 막내아들이 성과를 세우자 생각을 달리 먹게 되었다. 남쪽 전선의 안정화는 곧 서토를 대하는 고구려의 안정화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했다.
이세민과 다시 싸울 그날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