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55화 (155/335)

155화 아리수 (8)

“신라와 전쟁이라, 그 범 같은 연개소문이 제 아들을 다시 사지에 내몬 것이냐?”

요하 서편, 요서 지역의 유목민들을 통솔하기 위해 도성에서 온 말갈 장군 생해로부터 그간의 소식을 전해 받은 양만춘은 사나운 눈초리를 치켜세웠다.

“사지라니요? 그런 것이 아니외다! 그간 도성과 인근 지역에 여러 정책 시행으로 나라가 정신이 없었고 대막리지께선 막내 공자의 뜻대로 해주었을 뿐입니다. 대모달.”

“아무리 그러해도 과하다! 아직 성년에 이르지 않은 자식을 한 해에 대체 몇 번이나 전장에 내보낸단 말이냐? 아무래도 내 연개소문에게 서찰을 하나 써 보내야겠다.”

다른 이는 몰라도 양만춘은 안시성에서의 인연으로 남산에 대한 행적을 계속해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을 대모달로 삼아 요동과 요서를 아우라는 요하의 군권을 맡긴 남산이 도성의 파벌 싸움에 휘말려 적지않이 곤욕을 치를 수도 있겠다는 근심이 든 이후부터였다. 또 하나는 남산이 옆을 따라다니는 그 아이가 신경 쓰이는 탓도 있었다.

‘옥은 흙에 묻혀도 옥이지.’

좋은 바탕을 가진 훌륭한 것은 아무리 나쁘고 험한 곳에 놓여도 자기의 바탕을 잃지 아니한다.

남산이 전장에 나가면 그 아이도 덩달아 따라가니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 수영이의 마음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남산과 옥소의 생각을 한 양만춘의 시선이 일순 남쪽으로 향했다.

‘도성 귀족들의 파벌 때문에 수영이도 마음고생이 심했지.’

연개소문의 정변 이후 고초를 겪은 수영이는 요동만에서 끊임없이 적과 싸우는 도구가 되어 충성을 보여야 했다.

그러다 요전에 이세민의 칼날이 요동 바다로 향하면서 위기를 맞을 뻔한 걸 남산이가 구해주었으니 여러모로 고마울 따름이긴 했다.

“대모달의 의견이 일리가 있습니다만, 너무 심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려할 필요가 없다니?”

“이번에는 도성의 최정예병을 맡기어 남쪽으로 향한 막내 공자께 거닐도록 하셨습니다. 대막리지께서 그만큼 믿고 맡기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믿고 맡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생해의 말은 그리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이리 공을 세웠으면 마땅히 합당한 상을 내리고 좀 쉬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다시 전쟁이라니, 보통의 성년 장수들도 불만을 가질법한 빠듯한 일정이었다.

“남쪽에 보낼 군사가 있다면 요동에다 보내라는 말도 덧붙어야겠군.”

연개소문에게 보낼 서찰을 쓰는 양만춘의 손이 빨라졌다.

양만춘의 눈에 도성 사람들은 이곳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탈을 일삼는 당나라 별동대의 눈을 피해 성과 산에만 틀어박혀 지내야 했던 요동 백성들이었다. 청야전술은 적이 이 땅에서 나고 자라는 것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가옥 등 성 밖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것을 뜻한다. 즉 요동 백성들은 성 밖에 자신들이 가진 토지와 생산물을 모두 불태워야 했다.

본래라면 민생의 파탄이 났겠으나 미리 천산산맥 곳곳에 구황작물을 심어서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역시 남산이 주도한 태학과 추모 사당의 신녀가 나서주면서 백성들이 굶어 죽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이거 누구 얘기를 하나 했더니, 두 분께서 남산 공자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계셨구려. 그러고 보니 내 이번에 평양을 다녀온 우리 상인들로부터 남산 공자의 활약을 아주 많이 들었소이다. 얼마 전에 수군을 거닐고 당나라 황제가 보낸 병선을 괴멸시켰지요? 또 이번에는 백제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를 정벌하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내 듣고 또 들어도 참으로 신출귀몰한 분입니다. 허허.”

바깥 동태를 살피고 온 이는 차기 거란의 후계자 이진충이었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려던 그는 유목민에 대한 연개소문의 유화책을 듣고 일단은 고구려를 믿어보기로 했다. 실상 믿어 본다는 말이 무색하게 현 고구려는 당나라 못지않게 번성하고 있었다.

-이번에 고구려 궁궐에서 사신그림을 보고 왔사온데 우주의 질서를 진호하는 커다란 신이라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번성함이 당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가한께 이리 전해주십시오.

-이번에 고구려에서 가져온 곡식을 보십시오. 당나라도 우리 거란에게 이만큼은 내어주질 못할 겁니다.

고구려의 궁궐이 당나라 대명궁보다 크고 웅장함에 놀랐고, 평양 도구의 많은 상인과 교역품 양에 또 놀랐다.

이진충은 적어도 고구려의 손을 잡으면 굶어 죽진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바깥 사정은 어떤가?”

“명주 자사 정명진이라는 자가 적진에 합류했습니다.”

“정명진?!”

명주(洺州)라면 하북 최북단, 그러니까 이곳 회원진에서 서쪽 200리 밖에 있는 당나라 최북단이었다. 현 임유관과 더불어 당의 최전방 국경 지역이었다.

“그대가 황제 폐하를 모독한 고구려의 대모달 양만춘인가?”

그때 성벽 아래에서 진한 눈썹을 치켜뜬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눈 밑에 칼자국과 웬만한 장정의 키를 압도하는 대도를 보자 양만춘은 본능적으로 그가 정명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비사성 전투에서 수천의 고구려 군사를 죽이고 8천의 백성을 생포하고는 독산진(獨山陣)마저 격파한 그는 요동 남단을 쳐들어온 악명 높은 당나라 장수였다.

* * *

“면목이 없습니다. 제 그릇된 판단으로 신국의 배를 잃었으니 이는 목숨으로 죄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소장을 죽여주십시오! 상대등.”

반파된 전선을 거닐고 간신히 당항성 포구에 당도한 시득은 고개를 숙였다. 적의 대병이 한수(漢水) 부근에 상륙하면서 조바심이 났고 적장이 어린 계집이라는 보고에 이끌려 그만 섣불리 적에게 수군의 주력을 보이고 말았다.

-저기 계집이 탄 대장선이다! 당장 쫓아라!

자연섬 해협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 대장선에 탄 이는 과연 세작들의 보고대로 여인이 맞았다. 그것도 자신보다 어린 약관도 채 되지 않는 선머슴 같은 계집 애송이였다.

-계집이 도망친다! 놓치지 마라!

그때의 시득은 마치 뭐에 홀린 듯 뱃머리를 돌려 도주하는 적의 대장선을 추격했다. 그 대장선이 서쪽으로 늘여진 자연섬 서너 개를 이상한 움직임으로 도주할 때부터 알아보았어야 했다.

마치 한자 ‘갈 지(之)’ 자 모양으로 직선을 좌우로 그어 나간 형상.

아군의 함선이 그런 고구려 대장선의 기이한 해로를 쫓아 자연섬 사이사이로 진입할 무렵.

쒜에에엑!

사방에서 바람을 가르는 대석이 날아왔다. 고구려 수군이 아군의 배가 이곳에 진입할 것을 알고 미리 자연섬 곳곳에 사거리가 긴 고정식 발석거를 설치해 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격하라!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고구려 누선이 사방에서 나타나 우왕좌왕하는 신라선을 습격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비섬에 숨은 그 백제 왕자만 잡았고 돌아왔어야 했거늘!’

오히려 그 백제 왕자가 방심을 불러일으킨 미끼였다.

결과적으로 미추홀에 상륙한 것만도 못한 참패였다. 절반이 넘는 신라선이 격침했고 나머지도 반이 반파되었다. 성한 병선이 몇 안 됐다.

“공은 고개를 들으시오.”

“상대등, 소장을 죽여… 흐흑!”

참혹한 패배에 시득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에 자신을 천거한 이 앞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알천이 시득의 등을 토닥였다.

“그대는 아직 젊소. 춘추 공과 내가 공을 신국의 바다를 지키도록 한 것은 그대의 잠재성을 높이 평가하였기에 그렇소.”

“하나 소장은 춘추 공과 상대등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이 죄를 씻겠습니까?”

“공이 아니면 누가 신국의 바다를 지키겠소?”

알천은 시득의 패배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현 신라의 현실은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 낼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시득은 신라 수군을 보존하였고 당나라와의 교역을 어떻게든 유지하게 해주었다. 변변치 못한 지원에도 이만한 성과를 이룩해 낸 것이다.

“우산국을 빼앗긴 이후 서라벌 앞바다는 고구려의 교역선 통행로나 다름이 없어졌소. 이곳 당항성의 수로마저 끊긴다면 우리 신국은 정녕 고립이 되고 마오.”

“이곳은 반드시 지켜낼 것입니다. 상대등과 춘추 공의 기대에 부흥하겠습니다!”

시득을 쳐내 봐야 아군의 사기만 떨어질 뿐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알천은 김춘추나 김유신이 돌아올 때까지 최대한 지금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 김유신이 가야만 수복한다면 전세를 역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수(漢水)가 걱정이 되는군. 더는 성을 잃어서는 아니 될 터인데.”

당항성에 올라 북녘을 우러러보는 알천의 주름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 * *

동이 튼 새벽 나는 제비섬에서 건너온 옥소를 반갑게 맞이했다. 연개소문이 중외대부를 갑비고차에 파견하면서 서해의 수군을 그쪽에 무사히 인수하고 합류했다.

“신라 수군을 유인해 승리를 거두었다고?”

“아군의 배 하나를 잃었습니다.”

옥소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무지 그 시득을 상대로 승리한 개선장군의 얼굴이 아니다. 승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군의 피해를 먼저 생각할 줄이야, 과연 그 연수영과 양만춘의 핏줄답다고나 할까.

“그런 표정으로 군사를 대한다면 사기가 떨어질 거 같은데?”

“송구합니다! 아군의 희생이 너무도 분하여…….”

“아니다. 승리는 승리대로 기뻐하고 그 분함은 잊지 말거라.”

“예! 대총관.”

군사의 희생이야 전쟁에서는 필연이었다. 그러나 그 희생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계속해야 했다. 이 삼국이 하나가 된다면 더는 이 안에서 전쟁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이는 영영 없게 될 것이다.

“옥소 낭자의 기습이 아주 기가 막히게 먹혔습니다! 설마 신라 수군을 그리 유인할 줄 누가 감히 예측이라도 했겠습니까? 크하하!”

그러고 보니 딸려온 불청객이 한 사람 있었다. 전라도 지역의 쌀을 조달해 온 백제의 왕자였다. 지금쯤 그가 군공을 세웠다 백제 조정에서 여러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참, 낭자가 아니라 군두라고 했지요? 하하하.”

옥소가 고개를 들어 슬그머니 째려보자 곧바로 시정하는 부여효였다.

“들었어? 서쪽 바다에 신라 놈들이 병선을 보냈는데 옥소 장군이 모조리 수장시켰다더군.”

“정말? 이거 우리도 분발해야겠는데?”

“바다는 이기고 육지에서 질 수야 없지!”

한편 첫날 전투로 사기가 다소 저하된 청룡부대의 기세가 다시 살아났다. 바다에서 전해온 옥소의 승전보가 육전을 치르는 군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슬슬 시간도 됐고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못신을 신어라!”

끝이 송곳처럼 뾰족한 네 개의 발을 가진 쇠못 마름쇠, 철질려(鐵蒺藜)를 대비해 군사들에게 금동신발을 착용하게 했다. 신발 바닥에 금속 못이 달린 금동 고구려 못신은 고구려 무사가 의례용으로 착용하는 신으로 도성에서 출전하기 전 미리 준비해두라고 지시해 두었다.

쒜에에엑!

한편 예정대로 서쪽 진영에서 온사문이 투석기를 이용한 대석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산성의 주력 군세를 서쪽으로 유인한 뒤 이쪽에서 보병과 사다리를 이용해 공세를 가할 계획이다.

쾅! 쾅!

이어 수십 개의 돌덩이가 서문의 성벽에 직격하며 부수기 시작했다. 새로운 형태의 공격에 북한산성은 당황했을 것이고 동문에 주둔하던 북한산성의 장정들은 부서진 성벽을 보수하기 위해 서쪽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다그닥! 다그닥!

얼마 뒤 서쪽 진영에서 기병이 달려오고 있다.

“지금이다!”

이를 온사문의 신호로 받아들인 나는 거침없이 진격령을 내렸다.

와아아아!

내 명에 고함을 친 군사들이 번쩍거리는 군화를 신고 일제히 동문으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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