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아리수 (1)
“북녘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아들이 미추홀을 기습하여 취하였다고 한다. 경들은 그들의 이번 공략에 짐의 결단이 있었음을 새기라!”
무게감 있는 의자왕의 외침에 몇몇 귀족들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읍했다.
“그렇사옵니다! 어라하. 바다를 이용한 계책은 실로 신라의 허를 찌른 대단한 작전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어라하의 장렬한 결단이 있었으며 보급을 담당한 우리 효 왕자님께도 마땅히 큰 상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아들이 있다면 백제에는 효 왕자님이 계십니다! 흐흐.”
“효 왕자님을 보내신 군대부인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지요!”
대성팔족의 사타천복, 사타상여, 국변성이 연이어 부여효과 그 어머니를 칭송하자 흡족한 표정을 짓는 의자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효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지! 내 듣자니, 비밀리에 달솔의 아들 흑치상지에게 지시하여 고구려가 미추성을 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들었다. 소식대로라면 미추홀의 반은 우리 백제가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의자왕의 물음에 귀족들이 거의 동시에 수긍했고 은고가 나섰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나 미추홀은 그 옛적 비류국 시절부터 사람이 살기 그리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땅을 요구하는 것보다 과거 우리 백제의 도읍이었던 욱리하(郁利河)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고구려에 분명히 하시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전령을 매수해 흑치상지의 공을 부여효로 바꾸며 정사를 논하는 은고의 입이 귀에 걸렸다. 연남산은 연개소문의 아들답게 무례했으나 알아서 굴러들어온 복이었다. 백제의 복, 아니 나아가 새 태자를 만들어 줄 복이었다.
“은고의 말이 옳다! 척박한 미추홀(彌鄒忽)보다야 옛 위례성(慰禮城)과 그 아래 당항성(黨項城) 일대를 우리 백제가 가져가는 편이 낫겠지. 내 성명(聖明) 어라하의 염원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탁탁, 어좌 팔 받침대를 서너 차례 두들긴 의자왕은 은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아리수(阿利水), 백제 말로 욱리하(郁利河)라고도 불리는 강 이름과 그 일대에 세워진 백제 초기 도읍 위례성(慰禮城)은 현 백제의 왕을 가리키는 호칭인 어라하(於羅瑕)와도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한성 백제의 눈부신 문명을 꽃피우던 중심지와 그 일대를 다시 수복하는 것만으로 그 옛날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와 같이 삼한(三韓)에 어라하(於羅瑕)의 위세를 크게 떨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고구려가 미추홀을 칠 때 계백 장군께서는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북을 자원하여 가셨으면 당항성은 몰라도 김유신에게 빼앗긴 가잠성은 도로 되찾아 와야 하지 않습니까?”
기세를 탄 은고의 시선이 계백을 북으로 올려보낸 성충과 흥수에게 향했다. 어떻게든 자기 사람을 키워 보겠다고 계백을 끈질기게 국경으로 보내려 했던 두 좌평이었다.
“군대부인의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그 가잠성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전쟁 경험도 변변치 않은 그 위사좌평이 아닙니까?”
“그 위사좌평이었기에 도살성에서 김유신을 고립시켰음을 모르십니까?”
“허, 우리 백제의 성을 빼앗긴 마당에 대체 누가 누굴 고립시켰다는 건지 원.”
“거기까지.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끼리 싸워선 안 되네.”
성충이 흥분한 흥수를 위로하였고 반박을 하려는 은고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의자왕에게 직접 말하고자 했다.
어전에서 은고와 입씨름을 해봐야 백제에 이로울 것이 하나도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바뀌는 전황에 성충은 국익을 위해 내부 갈등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변경에 있는 군사들을 국경 지역으로 배치시킨 결단은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어라하.”
“내신좌평이 내게 그리 말해 주는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군.”
“이번 계책으로 고구려가 미추홀을 점령하여 김유신의 허를 찌른 것은 맞사옵니다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고구려로서는 새 영토를 얻은 셈이나 우리 백제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 기뻐할 순간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고구려의 전략으로 신라의 군세를 분산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성충은 백제가 아직 축배를 들기엔 이르다고 판단했다.
“빼앗긴 성이야 도로 되찾으면 그만이다. 짐이 당장이라도 친정에 나선다면 신라의 성은 내게 백기를 들고 투항할 게야.”
“그리될 것입니다. 어라하. 고구려가 참전한 이상 신라는 기세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의자왕의 자신에 은고가 부추겼고 성충은 냉정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지난날 신라의 왕이 우리 백제로부터 욱리하(郁利河) 일대를 빼앗고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100년간 저들의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동쪽 전선이 어수선해진 지금 빼앗겼던 땅을 다시 얻기 위해서는 고구려와 협공을 해야 합니다.”
신라의 최우선 방어진은 결국 서라벌의 길목인 압독주와 낙동강 방어선이 일차적이었다. 당항성이든 신주든 제아무리 중요한 지역이라 한들 왕성을 방어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유신이 다시 그곳으로 내려간 것이다.
“고구려와의 협공은 찬성할 수 없습니다.”
“찬성할 수 없다니요?”
성충은 느닷없이 반대하는 은고를 향해 의문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효 왕자가 군공을 세운답시고 나서는 기이한 모양새를 주도한 이가 그녀임을 알고 있음에도 번영했던 옛 고토 수복이라는 명분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신좌평께서는 벌써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한때 신라와 협공하며 되찾은 땅을 불과 한 해 만에 상실했습니다. 또 고구려를 어찌 믿는단 말입니까?”
“백제가 과거 욱리하(郁利河) 하류의 6군을 신라에 빼앗긴 것은 우리 백제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는 신라와 사정이 다릅니다. 저들은 당나라를 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쪽에 주도적으로 신경 쓸 겨를이 되지 못합니다.”
과거 성왕(聖旺) 시절, 욱리하(郁利河) 하류 6군을 차지한 백제와 상류 10군을 편입시킨 신라. 하류는 비옥한 땅이나 저지대여서 고지대인 상류를 차지한 신라에 비해 방어적 측면에서 불리했다.
저지대인 하류를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터전을 꾸려 부여씨 일족의 왕권 강화를 원치 않았던 사비의 귀족들이 사병을 내어놓기를 주저했으니 백제가 내부갈등으로 주저하는 사이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와 밀약을 맺었다. 그렇게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옛 수도가 있는 고토를 신라에 거저 내어주게 된 것이다.
“이는 은고의 말이 옳다! 우리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전투가 격해질 때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야. 아주 천천히 말이야.”
이어진 의자왕의 수긍에 성충의 수심이 깊어졌다. 말과는 다르게 그 옛날 귀족들이 고토 수복을 원치 않았던 것처럼 은고와 다른 대성팔족도 여전히 그러하지 않는가였다.
* * *
“약탈은 금물이다. 이곳은 추모성왕(鄒牟聖王)의 아들인 비류 왕자가 개척한 땅으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께서도 이곳의 백제인들을 자신의 태왕릉의 수묘인으로 삼아 우리 고구려 백성으로 품으셨다. 하여 너희가 이 땅의 백성들은 함부로 할 수는 없다. 내 성을 함락한 너희들의 공로에 따라 차등을 두어 은자를 내어줄 것이며, 흑당으로 달인 대추차를 하사할 것이다. 또한, 태왕 폐하께서도 마땅히 상을 내리실 것이니 군율을 어기지 말라! 경거망동하지 말라!”
그날 밤 밀물과 함께 옥소와 부여효로부터 군량과 각종 보급품을 조달받은 나는 매소홀 일대 장악을 완료한 군사들을 한곳에 소집해 명료한 지시를 내렸다.
남쪽을 정복했다 하여 일부 군사들이 민가로 내려가 소와 철제 농기구를 약탈하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적조 현상으로 얼마 되지도 않는 어부들의 물고기마저 빼앗아 강제로 취하자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혈기왕성한 놈들을 통제하기란 쉽지가 않군.’
아주 온몸을 금으로 도배한 군사들의 면면을 본다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우산국은 무혈로 점거하였고 가야 때야 왜에 건너간 옛 가야인들의 도움이 있어 민심과 치안 안정에 그리 어려움이 없었지만, 매소홀 점령은 그야말로 내가 진두지휘해 얻은 첫 영토였다.
군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낯선 곳을 제힘으로 꺾고 지배하게 된 것이다.
아마 이 정도쯤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심정이 깔려 있을 것이다.
또 본디 아랫사람은 주인의 성정을 닮는다고 연개소문 직속 군사들의 용맹함은 가히 고구려 제일이라 할만했으나 거친 말을 통제하기 어렵듯 내 지시에 불응하는 이들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읍참마속(泣斬馬謖). 제갈량은 군율의 지엄함을 보이기 위해 가장 아끼는 제 장수의 목을 베었다. 나 중리대형 연남산은 아버님이신 대막리지께 너희들을 통솔할 전권을 위임받았으며 감히 명을 어기는 자들을 베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를 두고두고 명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정신을 차린 군사들이 일제히 그렇게 외쳤다.
그들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두었다.
“참하라!”
일부러 매소홀 일대에서 끝까지 저항해 사로잡은 신라 잔당들을 참수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가야인은 가야로, 백제인은 백제로, 고구려인은 고구려로.”
한편 미추성에서 사로잡은 포로에 대한 처우는 이처럼 간단했다. 강제징용이나 다름없이 신라군으로 편입되어 불과 몇십의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지역을 온전히 장악하면서 변경에 성을 쌓고, 목책을 쌓고, 광물을 캐는 등 노역에 시달리는 이들까지 쳐서 수백까지 불어났다.
“도성에 새롭게 시행 중인 호패다. 고구려 백성들인 그대들에게 호패를 내리겠다. 너희가 고구려를 위해 공을 세우면 죽더라도 유족이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태왕 폐하께서 약조하신 것이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새기며 직접 호패를 건넨 나는 최대한 그들의 자발적 자원을 유도했다. 아리수까지 가는 인근 지형을 훤히 꿰뚫고 있거나 포노와 같이 신라의 대표 궁시류를 다룰 줄 아는 쓸 만한 이들이 몇몇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흑치상지에게 내어주는 백제인 포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구려의 관할하에 있는 소중한 인력이었다. 징집된 군사들에게 보훈체계를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 사기를 크게 올릴 수 있다.
성을 점령하며 얻는 군사들의 희생이 포로가 된 고구려인들을 다시 얻으면서 복구가 되는 셈이다.
‘저 흑치상지만 포섭된다면 백제 포로들까지도 고구려의 인력으로 삼는 게 가능할 텐데.’
여기서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지만 탐이 나긴 했다. 뱃길을 잘 아는 뱃사공 출신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곳 포로들에게 듣기로 신라는 백제 쪽에서 잡은 포로들을 매소홀과 같은 후방이나 아예 한강 이북의 고구려 쪽 국경에 배치하면서 탈영할 가능성을 끊어두었다. 그러나 백제인 흑치상지가 함께한다면 국경 쪽 백제인 포로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지금은 얼마 안 되는 수일지라도 모이면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특히나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당나라에 대적하기 위해선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인력이 될 것이다.
또 한강 유역은 무려 500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던 만큼 그들만 한 명분이 없다. 고구려가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 때 한강 유역을 장악했으나 지키지 못한 것은 그 땅의 백성들을 온전히 고구려 백성으로 품지 못한 명분의 부족도 있었다.
“한 번 더 꼬셔 볼까?”
나는 백제인 포로들을 대우하는 흑치상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아, 아니지.”
그러나 곧 생각을 거두었다.
남생, 남산 형제와 함께 북망산에 묻힌 흑치상지. 욕망을 가볍게 여기면서 명예, 가르침을 중하게 여겼다는 그의 비문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항복한 이유는 백제가 멸망했기 때문일 테니, 아직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그러나 적임자를 국경에 파견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백제 상황을 본다면 또 그렇게 이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흘간 매소홀의 내정을 살피는 한편, 나는 주변 상황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저 강 이북에서 한바탕 날뛰는 온사문과 뇌음신을 만날 예정이다.
도성의 연개소문도 지금쯤 이곳 상황을 알았을 거고 사비와 그보다 먼 서라벌에도 알려졌을 것이다.
가깝게는 여기서 불과 100리 안팎의 김흠순과 다시 거기서 100리 남쪽의 계백에게도 전해졌을 터.
그들의 대처에 따라 삼국의 판도는 전혀 다른 양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 *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대막리지 아드님의 활약이 참으로 놀랍소이다. 어제에는 요동에 그다음에는 가야에 또 그다음에는 다시 요동에 오늘날에는 광개토태왕께서 친정하신 미추성에 이르렀으니 이러다 옛 영토를 다시 확장하는 게 아니겠소이까?”
연개소문을 포함한 제가회의의 귀족들을 어전에 소집한 보장왕은 크게 기뻐했다.
연개소문의 군대가 배를 타고 남하한 지 보름 만에 미추성 점령 소식이 안학궁에 당도한 것이다.
그간 바다를 통해 진상해 올린 명물들이 대막리지 막내아들의 고구려 수군에서 시작되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칠중하(七重河) 방어선을 이번에야말로 뚫을 수 있겠사옵니다! 태왕 폐하.”
첫 집권 후 남진(南進)에서 겨우 성 2개라는 변변치 못한 활약을 거둔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개입을 두고두고 화를 품으며 군사를 돌렸으나 이번에야말로 장수태왕 때의 영토 수복을 노릴 수 있겠다 싶었다.
-아리수를 대막리지께 바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선도해로부터의 남산의 전언.
가야 정벌로 과거 낭비성(娘臂城)에서 고구려군 5천을 참살한 김유신에게 수모를 안겨 준 막내아들이 이번에는 아리수(阿利水)를 점령해 김유신의 조부가 신라를 위해 세운 명예마저 아예 날려 버리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