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40화 (140/335)

140화 파죽지세 (1)

“와아아아!”

“여왕 폐하 만세!”

“대장군 만세!”

천존, 진춘, 죽지가 위사좌평과 대치하여 도살성을 지키는 사이, 아우 흠순과 함께 야밤에 정예병 6천을 거닐고 우회하여 가잠성을 공략한 김유신은 백제에 빼앗긴 주요 요충지를 모두 수복하였음에 군사들과 함께 함성을 내지르며 크게 기뻐했다.

“대야성과 북가야에 이어 가잠성을 우리가 되찾았으니, 이제 백제가 섣불리 당항성으로 오기에는 어렵겠습니다요! 유신 형님.”

대야성에 이어 백제가 점거한 북가야와 남아리수 유역의 요충지인 가잠성마저 수복하자 김흠순은 자신감을 가지며 그렇게 외쳤다.

세 요충지는 지난번 백제에 빼앗긴 40여 개의 성의 핵심 지역이었다. 대야성은 서라벌로 통하는 입구였고, 백제가 가져간 북가야는 낙동강 중상류였으며 가잠성은 신라가 당으로 통하는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아직 수복하지 못한 변경의 다른 자잘한 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계백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구나. 지난날에 치욕을 이번에야말로 갚아주려 하였거늘.”

가잠성 성벽에 올라서며 손수 흙먼지로 덥힌 백제 깃발을 내리고는 깨끗한 신라 깃발을 꽂은 김유신은 승리에 기뻐하는 한편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가잠성 전투에 이어 지난번 고구려가 개입한 가야에서까지 계백에게 2번이나 당했는데 제대로 갚아주질 못했다.

“이 아우도 유신 형님의 마음처럼 아쉽습니다만, 그보다 이제 고구려가 앗아간 저희의 고향을 되찾아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해야지.”

김유신은 아우 흠순의 생각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김춘추의 충고에도 무리하면서까지 출전해 요충지 공략에 사활을 걸었던 것은 오로지 고구려에 빼앗긴 본관 금관군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백제로부터 되찾은 가야라고 해봐야 기껏 고구려가 훔친 가야의 반의반도 되지 못했다. 김유신 형제의 고향은 여전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다.

“알아보라는 고구려 수군의 동태는 살펴보았느냐?”

그러나 이내 미간을 좁히며 묻는 김유신은 여기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느닷없이 서해를 가로지른 고구려 수군의 행로를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하한 고구려 수군을 지휘하는 이가 개소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더욱 신중해졌다.

“큰물섬을 지나 백제 해협에 들어선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가야로 향했다면 지금쯤 남쪽에서 무슨 연통이 왔을 텐데 말입니다. 이거 바다가 이리도 불안할 수 있다니 원.”

크게 한숨을 내쉰 김흠순은 고구려 수군의 행로를 알 수 없어 우려를 나타냈다. 그들이 다시 북으로 올라선다면 당항성과 한수 유역의 방비를 해야 할 것이고 그대로 남으로 향해 가야에 이른다면 남쪽에 대한 방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번처럼 또 서라벌이 위험할 수도 있다.

비담의 반군과 더불어 갑작스레 서라벌에 상륙한 고구려군의 출현은 일생을 전장에서만 보낸 김유신 형제마저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백제에 심어 놓은 우리 세작들이 보내온 연통에 의하면 연남산이 사비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구나. 지금쯤 의자와 만나고 있을 게다.”

“사신이요? 하면 볼일을 본 놈들의 해선이 다시 고구려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한심하긴, 그 연개소문의 아들이 겨우 사신 노릇을 하겠다고 100척에 가까운 누선을 남쪽으로 보냈겠느냐?”

지난날 고구려의 습격으로 호되게 당한 김유신은 모종의 계책이 있음을 늘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있었다.

* * *

“서둘러 움직여라!”

“왕궁의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

“빈틈을 보이지 마라!”

사비 왕궁 입구에서 의자왕이 상주하는 대전에 이르는 동안 도성과 왕궁을 방어하는 위사부(衛士部)와 사군부(司軍部)의 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또 전쟁이 터졌구만.”

“전쟁이야 국경에서 항상 있는 거 같은데, 꼭 밀리고 있을 때만 저렇단 말이지.”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거 아니야?”

웅성웅성. 경계 태세가 강화되는 사비의 모습이란 백제 백성뿐만 아니라 백강에 막 당도한 외국 상인마저도 백제에 전쟁이 일어났음을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신호였다.

‘도성과 왕궁을 지키는 군사가 국경을 지키는 군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군.’

옥소가 확인하고 온 사비 동문과 북문의 군사 수까지 합한다면 어림잡아도 3만이 넘는 병력이 이곳 사비성과 왕궁을 지키고 있다.

정확히는 의자왕 자신을 지키는 호위 군사라 보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바로 요전에 2만에 달하는 백제 군사 수급을 베며 별도로 9천을 포로로 잡은 김유신이 파죽지세로 북상한 이때에 국경에 군사를 보강하지 않는 결정은 커다란 실책이다.

이러한 위기에 국경을 지키는 군사보다 왕궁을 지키는 군사가 더 많다니, 나는 이 부분에서 의자왕의 지나친 왕권 강화의 폐해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번에는 의자왕이 몸소 동쪽의 낙동강 상류까지 나오면서 상황이 달랐지만 넓어진 국토를 순행하며 안심한 건지 이후 왕궁에 틀어박히고는 국경에 대한 느슨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 탓에 얼마간은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군에 밀리며 여러 성을 빼앗기고는 한 6, 7년쯤 지나서야 고구려, 말갈의 도움을 받으며 간신히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달라진 역사인 지금은 가야를 되찾기 위해 백제부터 치겠다 마음먹은 김유신이 이 시기 백제 국경을 마음껏 유린하니 이듬해 당에 승전보고까지 올리게 된 계기가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실책은 적임자 배정 문제인가.’

이내 의자왕이 기다리는 왕궁 대전에 들어 망부석처럼 말석에 멍하니 서 있는 계백과 윤충, 흑치사차를 보고서야 현재 백제가 밀리는 명확한 이유가 판명되었다.

핵심만 말한다면 국경을 지킬 적임자를 후방이나 왕궁을 지키게 하고 있으니 김유신의 파죽지세와 같은 반격에 호되게 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치가 잘못되면 이렇게 어렵게 얻은 성을 도로 내주게 된다.

‘뭐 고구려로서는 나설 명분이 주어진 격이지.’

내가 백제의 연회장에서 의자왕의 면전에 대고 대놓고 도림의 얘기를 꺼낼 수 있던 것은 이처럼 김유신의 반격에 신라가 백제에 빼앗긴 성 40여 곳 중 상당수를 도로 회복하는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왕과 무왕이 시도했던 근초고왕 때의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 회복의 숙원을 즉위 초기에 이룬 의자왕은 이처럼 짧은 시간에 몇 가지 악수를 두며 신라의 반격을 허용하고 만다.

“우리 백제는 고구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전에 든 나를 향해 의자왕이 대뜸 그렇게 요구했다.

말을 삥 돌리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 백제가 완벽히 압도했던 신라에 당하는 현황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자왕의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고구려가 백제를 구원하는 일은 같은 부여계를 보살피고자 하시는 태왕 폐하의 은덕이요, 나아가 고구려 사람으로서의 인지상정입니다. 하나 그 전에 몇 가지 요구를 들어주십시오.”

“요구라니?”

“백제는 낙동강 이서(以西)의 가야 지역을 확보해 놓고도 이리 허무하게 상실했습니다. 이번에 고구려가 백제를 돕는다 한들 다시 상실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구려는 우리 백제가 그리도 허술하다 여기는가!”

두 주먹을 움켜쥔 의자왕은 언성을 높였지만 내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고구려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땅을 넓힌들 이리 쉽게 잃어서야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어진 성충과 흥수의 핀잔에 부르르 팔을 떤 의자왕이 못내 수긍하듯 내게 말했다.

“말해 보시오.”

“첫 번째는 보급품을 지원해 주십시오. 우리 고구려가 백제를 지원하고자 남쪽에 투입된 군사들은 어라하께서 책임지고 굶지 않게 해주셔야 합니다.”

“보급품 지원이라면 이미 내신좌평을 통해 요동에 전달하였다 들었거늘, 그새 또 요구한단 말인가?”

“아시다시피 우리 고구려는 당나라의 지겨운 소모전으로 군량에 대한 대비가 그리 넉넉지 못합니다.”

거짓말이다. 나름 그간 공들인 덕에 당나라의 소모전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창고에 군량미는 부족함이 없이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러나 마냥 여유가 있다고 자만할 군번이 아니었다. 우두침 접종으로 인해 조기 사망률 감소로 해마다 늘어나는 인구, 지난 전쟁으로 본래 죽거나 당의 포로가 되었을 수십만 고구려 인력의 활용,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뻗친 광활한 고구려 영토의 국경을 지키는 일로 매우 빠듯한 형편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번처럼 정예를 꾸려 외부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보급품의 현지 조달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미 고구려에 올려보낸 군수 물자가 적지 않거늘, 또 달라니요?”

“무리한 요굽니다! 어라하.”

“당장 거절하시옵소서!”

그때 대성팔족의 일부가 눈을 부라리며 나를 향해 불쾌한 시선을 드러냈다. 내 요구가 이루어지려면 백제 왕궁의 곳간보다야 귀족들의 곳간에서 먼저 내어놓아야 하는 일일 테니 그런가 보다.

“허가한다.”

“어, 어라하?!”

일부 귀족들의 반발에도 의자왕은 의외로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을 들어주었다. 오히려 고구려를 핑계로 귀족들의 자산을 소모할 수 있으니 왕권 강화를 위한 절묘한 기회라 여기는 걸까.

어찌 됐건 고구려로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제 백제의 군량을 지원받으며 마음껏 남쪽에서 전략을 짤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또 다른 제안은 무엇이오?”

“백제 도성과 왕궁을 방비하는 사군부(司軍部)의 군사를 국경 지역으로 재배치해 주십시오.”

“뭐라? 사군부(司軍部)의 군사를?!”

그 제안에 이번에는 의자왕의 흰자가 크게 드러났고 백제 귀족들도 눈치를 보며 당황하는 기색이 가관이었다. 군사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의자왕이 주도하지 않는 일이 없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고구려가 어라하를 지키는 백제의 군사를 오라 가라 할 자격이 있소이까?”

아 이 자리에 불청객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어제의 일로 의자왕의 눈치를 보게 되면서 한인 소리가 쏙 들어간 참이다.

내가 그를 보며 말했다.

“이 왕궁에는 어라하를 지키는 위사부의 숙위(宿衛) 부대가 별도로 있는 것으로 압니다. 중앙의 사군부(司軍部)의 군사들마저 왕궁을 지켜서야 백제를 돕겠다 출전한 애꿎은 우리 고구려 군사들의 희생만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이 역시 이치에 맞는 말입니다. 고구려만 싸우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합동 작전입니다.”

백제에 내정을 간섭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백제를 돕는 고구려 군사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해달라는 것. 그 명분에 성충과 흥수가 흔쾌히 나서며 지지해 주었다.

“고구려의 뜻대로 하라.”

나라를 위한 일이라 강조하는 그들의 말에 심사숙고한 의자왕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해동증자(海東曾子)답게 유교적 정치사상을 따르는 의자왕의 본심이 아주 조금은 남아 있었나 보다.

“그것이 전부인가?”

“아직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어라하.”

“말해 보시오.”

어려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이루어내자 의자왕은 내친김에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음은 고구려와 백제에 군사 작전이 되겠습니다만, 그전에 여기서 무관한 이들은 내보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대전에 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섬나라에서 온 이들을 향했다. 잠시 후 그들은 눈치껏 발걸음을 옮겼다.

* * *

“백제가 어찌 우리 왜에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간 쌓아온 인연이 이리도 찬밥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전부 다 그 간악한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아들의 세 치 혀 때문입니다!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 김춘추의 손을 잡으십시오!”

아미타와 코마로의 불만은 당연했다. 오랜 친분을 쌓은 백제 땅에서 무사히 한인 인재들을 돌려받기 위해 이 먼길을 나섰거늘, 협상은 채 시작하지도 못한 채 백제와 신라의 전쟁으로 일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흐허허, 평양이 아니라 사비에서 만나자고 연통을 보내올 때 비웃었던 것이 바보 같았군.”

부하들의 반응과는 달리 카마타리는 털털하게 웃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본국의 조정에서는 당의 제도를 모방해야 한다는 유학생 출신의 친당파들이 득세하는 한편, 고구려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백제를 통해 고구려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친고려 성향으로 크게 둘로 나뉘고 있다. 카마타리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중앙집권체제로 향하는 왜의 모든 정치적 방향이 결정될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어서 돌아갑시다! 다이킨칸.”

“얼른 결정해 주십시오! 나카토미노 공.”

“돌아가야 한다…….”

아미타와 코마로는 재촉하고 있으나 카마타리는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자칫하다간 한인들을 잃는 것은 물론, 한참 새 도읍지를 조성하는 데 필요한 대마도의 은광 건마저도 물거품이 될지 몰랐다.

무엇보다!

“너희는 저 백강에 들어서기 전 보았던 고구려의 누선이 무섭지 않았느냐?”

백제 바다에 나타난 고구려의 전투선은 마치 거대한 누각이 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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