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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137화 (137/335)

137화 검이불루 화이불치 (1)

정사암 견학에서 뜻하지 않게 회의마저 참여하게 된 나는 은고를 향해 백제왕과 그의 신하들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대명궁의 함원전에서 당나라 황제의 질책을 받은 우리 사신들의 일로 고구려와 백제, 왜가 친밀하다는 것을 이제는 온 천하가 알게 되었습니다. 당나라는 우리의 적국이요, 나아가 저들은 이 땅에서 오직 신라만을 지지하여 백제에도 부담이 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신라 사신 김법민 요사스러운 혀를 놀리길, 당나라 황제에게 고구려와 백제에 빼앗긴 땅을 돌려달라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을 것같이 말하고는 우리 고구려와 백제 사신을 많은 외국의 사신들 앞에 우롱하기까지 하였으니 여기서 양국의 동맹이 흔들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대장산도에 당도한 왕건위가 장안의 대명궁에서 고구려·백제·왜 사신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에 관해 소상히 기록한 일화를 내게 따로 전하도록 하면서 이런 주장에 신빙성을 더했다.

지금쯤이면 왕건위는 고사계와 함께 평양에 도착해 연개소문을 만나고 있겠지만, 내가 갑비고차 인근의 고구려 연해를 벗어나기 직전에 설인귀가 보낸 그의 서신을 실은 첨저선 판옥선이 빠른 속도로 항해하여 내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에 당나라를 다녀온 백제 사신 역시 내가 백강에 이르기 직전에 사비궁에 당도했으니 지금쯤 의자왕이나 이곳 정사암에 모인 백제 신하들도 마찬가지의 소식을 접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와 당나라라는 줄에서 아직도 갈팡질팡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는 저 은고라는 여인도 분명 그러할 것이고.

“과연 듣던 대로 고구려의 대막리지께서는 꾀가 많으십니다. 우리 앞바다에 고구려 배가 가득 메우고 있다니, 이 소식이 혹여 당나라 황제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필경 우리 백제를 고구려와 같이 원수로서 대하질 않겠습니까?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지요.”

나는 은고의 예리함에 솔직히 감탄했다. 은고는 그저 정치에 관심을 갖는 수준이 아니라 내 의도를 완벽하게 읽어냈다. 그걸 연개소문의 계책이라 착각하곤 있으나 어찌 됐건 그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그랬다. 백제 해역에 걸걸중상과 옥소가 통제하는 연개소문의 군사를 주둔시킨 이유는 단순히 한 가지 때문만이 아니었다.

최소 두 수 정도를 생각한 나는 신라의 김유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직 고구려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의자왕과 백제 조정에 고구려만이 유일한 우방임을 반강제적으로라도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의도를 치밀하게 깔아 놓았다.

서로가 철석같이 믿던 백제와 신라의 100년 혼인 동맹이 깨진 것이 아주 옛일이 아니다. 그보다 조금 전으로 돌아가면 신라는 고구려를 먼저 배신했다. 또 신라는 연이은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았고 삼한의 패권을 거머쥐며 전례 없는 전성기를 누렸다. 배신하는 나라가 승승장구한다는 역사는 졸본에서 주몽과 소서노가 이별한 이후 거의 최초나 다름없는 고구려와 백제 동맹에 그리 좋은 교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당장의 우방국일지라도 어떠한 신의도 있을 수 없으니 적의 적은 곧 우방이라는 반강제적인 조치가 필요했다.

북녘과 동녘이라는 두 전선을 둘러싸고 신라와 첨예하게 국지전을 이어가는 백제로서는 서쪽의 당나라는 무시무시한 적과 등을 돌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과 적대관계가 된다면 고구려의 손을 더욱 꽉 잡지 않고서는 안심하지 못하겠지.’

물론, 지금의 고구려는 본래 역사보다 더 견고한 천리장성과 하늘이 내린 바다 요새를 지키며 삼한의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내고 있었다.

불과 지난해 대장산도와 석성에서의 대승으로 묘도군도를 상실하지 않게 되면서 당나라가 본래 역사대로 백제에 상륙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이세민이 마음만 먹으면 또 불가능할 일도 아니나 고대의 항해술로 먼 남쪽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는 전략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 만일을 대비해 그에 상응하는 차원의 일을 벌여 놓기도 했다.

바로 중국 동남에 펼쳐진 열도를 장악하는 것.

‘걸사비우가 정말 큰일을 해 주었어.’

중국의 남부를 견제하기 위해 유구열도를 확보하는 것은 실로 중요했다.

그저 흑당을 얻기 위함이었다면 홍기군을 따로 보내지 않고 태학에서 파견한 기술자와 호위무사를 수송하는 무역선만을 보내는 일에 그쳤을 것이다. 대마도에 모인 한인 일부를 이주시키고 우산국의 군사들을 유구열도에 주둔시키며 대만을 점령했다. 즉, 중국 남쪽의 고구려가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나라는 섣불리 전선을 우회할 생각을 갖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백제 왕조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고 있음을 부디 이 자리에 모인 백제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군대부인을 따르는 사타천복, 사타상여, 국변성, 천복, 손등과 같은 왕당파 무리와 성충, 흥수, 윤충 등의 정사암 귀족들의 대립은 나당 연합군이 결성되기에 앞서 차후 백제의 큰 혼란을 줄 것임은 자명하다.

“이런, 고구려의 계책에 말려들어 우리 백제에 선택지가 없군요. 어라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면.”

작금의 판도를 읽은 은고가 슬슬 의자왕의 진의를 내게 말하려나 보다.

“저와 지금 대전에 들르시겠습니까?”

* * *

“어라하를 뵙습니다.”

수많은 신하가 각을 세우며 도열한 가운데 진한 눈썹에 사내가 내 앞에서 덤덤하게 왕좌에 앉아 있었다. 백제 왕궁의 대전에서 보는 의자왕의 품위는 이처럼 남달랐다. 내가 주도한 회담장에서 보는 것과 의자왕의 제 앞마당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얘기였다.

“요전에 어라하께서 보내주신 군수품과 인삼, 황칠을 잘 받았습니다. 여긴 우리 태왕와 대막리지께서 보내는 답례입니다.”

“고구려에서 제법 많은 것을 보내주었습니다. 어라하. 북방에서 튼실하게 자란 숙마 20필과 최상급 모피 90개, 향신료 100병, 그리고 이건 최근 고구려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사탕이라 합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들은 거지만 내가 제조한 향신료 맛과 흑당 맛에 흠뻑 빠진 은고가 의자왕에게 고구려에서 온 선물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백제 입장에서 요부일지라도 따지고 보면 그녀를 구워삶는 것이 고구려에는 이득이었다. 그녀의 행실이 어찌 됐건 내가 파악한 은고는 의자왕의 최측근으로 백제 문화를 선도하는 인물이라는 것. 백제 문화는 곧 바다 건너 왜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터이니, 백제가 고구려에서 온 새 문화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인접한 신라는 물론 탐라와 왜에도 퍼지게 될 것이다.

‘내가 왜가 아니라 백제를 택한 이유가 다 이 때문이지.’

삼국은 4, 5세기에 중앙집권체제를 완비한 것과 비교해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일본은 백제나 당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불과 얼마 전 그들 조정이 백제 의복을 받아들인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바다를 왕래하는 상인들이 진상한 그 단맛을 내는 검은 게 대체 어디에서 왔나 무척이나 궁금하였거늘, 고구려에서 왔는가.”

“그렇사옵니다. 어라하. 신이 듣기로 저기 저 중리대형이 만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게 사실이오? 부인. 얼마 전에는 요동의 전장에 있다 하였거늘. 내 종종 자식 농사는 풍년이라 신하들 앞에 자랑삼아 말하곤 하였으나 불과 세 아들뿐인 대막리지의 자녀에게 밀리니 이제는 자랑이라도 그리 말할 수가 없겠구려.”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의자왕이 지척에 있는 은고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렇게 운을 뗐다.

풍년인 자식 농사라, 그의 40명의 아들이 머지않아 좌평에 오르게 될 터이니 이 궁 안에서만 족히 100명의 자식을 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의 왕가나 사대부들만 해도 후궁과 첩을 여럿 두는 게 관례일 정도였으니 고대시대의 왕공귀족들이 얼마나 많은 첩을 두었느냐는 그리 대수로운 질문이 아닐 것이다.

당장 가까운 고구려의 귀족들 가운데서도 열 첩을 둔 가문을 몇이고 말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왕건의 혼인 정책의 시초는 어쩌면 대성팔족에서 무수한 첩을 들인 의자왕일지도 모르겠다.

뭐 이 왕궁에서의 승자야 결국 제 아들을 차기 백제 태자로 만든 은고가 차지하겠지만.

“어라하께서 제 아버님을 좋게 봐주신 건지, 저희 형제를 좋게 봐주신 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제가 견학한 사비궁의 위엄과 백제 왕실의 화목함에 비한다면 누구도 따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중리대형이 전날 짐의 왕궁에 들어 우리 태학의 유능한 박사들에게 안내를 받으며 교류했다 하였는데 우리 왕궁을 어찌 보았는가? 당나라 황제가 기거하는 대명궁보다 규모가 큰 고구려 왕궁에 비하면 조촐하지 않은가.”

의자왕의 물음에 일순 성충과 흥수가 당황하는 눈치가 보였다.

은고는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치고 있었고, 나는 이것이 일종의 시험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고구려가 백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돌려 묻는 것임을.

이럴 때는 내가 현대에서 배운 백제의 정신이라는 정답이 있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

나는 의문을 갖는 의자왕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어라하께서 기거하시는 사비궁은 추모의 아드님이신 온조대왕의 정신이 깃들었다 할 것입니다.”

그 대답에 마음에 들었는지 의자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군사를 운용하는 용병술뿐만 아니라 학식에도 조예가 깊구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짐을 욕보이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으음? 이거면 될 줄 알았다고 여겼는데 의자왕의 심기가 극도로 고조되었다.

“욕보이는 일이라면 백제 해안에 주둔한 우리 고구려의 일을 말씀하십니까? 그거라면 이미…….”

나는 은고를 살포시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도리어 시선을 피했고 의자왕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라고요?”

“짐이 고구려가 가야에 세운 비석의 전문(全文)을 보았다.”

그 말에 나는 아차 싶었다.

“백잔(百殘). 그 땅을 다스리는 짐을 감히 백잔주(百殘主)라 비하하여 비문을 새겼다지?”

역시 그 때문이었나.

원래라면 여기서 한 수 접고 들어갈지 모르지만, 지금 고구려가 당나라를 대신해 삼한의 상국(上國) 노릇을 하려는 중요한 시기다. 사과를 한다거나 고개를 조아릴 수는 없다.

“그것은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당연한 조치라? 고구려는 짐을 욕보인 것에 죄책감이 없다는 말인가!”

의자왕의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가 지금처럼 적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라가 신의를 저버리고 백제와의 약조를 무참히 깨며 도리어 백제를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써 잊으셨습니까? 백제는 우리와 동맹을 하겠다 해놓고 우리 수군의 통행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가야를 정벌한다는 계책을 세웠고 이를 전달하였으나 어라하께서 이를 어기셨습니다. 당시 우리 고구려는 백제에 배신감을 느꼈단 말입니다! 이것이 신라가 그대들의 신의를 저버린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이에 의자왕이 우물쭈물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 성충과 흥수가 제때 나서주었다.

“이는 십분 양보해도 우리 백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계백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자칫 고구려가 고립이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고구려의 중리대형께서는 이를 참작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충과 흥수가 제때 나서주었고, 아직 풀리지 않은 의자왕의 화를 풀어 줄 겸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 지금은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가 화목하니 제가 가야에 다시 이른다면 이를 백제로 고치라 이르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의자왕의 불편한 기색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원래 이 자리에서 할 얘기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어라하! 왜에서 오신 분들이 백강에 이르렀사옵니다.”

그때 사신 접대를 하는 내법부에서의 알림.

나는 백제를 방문한 진짜 본론인 일본의 한인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 * *

중국 남조악(南朝樂)인 청악계(淸樂系)의 영향을 받은 백제 무용수들이 다홍색 빛깔의 큰 소매의 치마저고리에 장보관(章甫冠)을 쓴 채 곡선미가 흐르는 화려한 춤사위를 이어갔다.

마한의 풍속인 제천행사가 전승된 답무(踏舞)와 변형된 백제무(百濟舞)에는 각기 4인의 악사인 ‘횡적(橫笛)·공후(箜篌)·막목(莫目)·무(舞)’가 맡으며 무대를 이끌었다.

“백제의 무용 중에는 고구려에서 전수한 기악무(伎樂舞)가 제일 흥겹사온데 이번에 어라하께서 무악(舞樂)이 뛰어난 분들을 왜에 보내주시어 저희 신당에서 배우도록 하고 있습지요. 흐흐.”

백제 왕궁에서 벌어지는 흥겨운 연회 한마당. 내 옆에 자리한 고상한 왜인 신관이 공연을 감상한 평을 그렇게 늘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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