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요동 치는 판도 (8)
“고구려와 백제는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저들은 감히 서로 결탁하여 당과 대항하고자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힌 정신 나간 나라들이 아닙니까? 이번에 당나라 율령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체제를 천명한 왜는 보다 신중한 선택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직 말씀드린 시일이 다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황자께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고요.”
“이미 대마도 은광 얘기가 당신들 조정에서 파다하게 논의 중이라 하였소이다. 덴노의 귀에도 이미 들어갔을 테지요.”
“예. 나카노오에 황자께서 이미 조정에서 덴노께 아뢰신 걸로 아옵니다.”
시종일관 무표정인 카마타리와 달리 고구려에 파견한 왜 사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김춘추로 하여금 조급하게 만들었다. 왜가 당이 아니라 고구려 세력을 자처한다면 신라로서는 정녕 사위가 적으로 둘러싸인 형국이 되고 만다. 그들 간에 무슨 조약을 맺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대마도 은광 얘기가 나온 것은 틀림이 없었다.
새 수도에서 당장 새 궁궐을 짓고 사찰을 짓는데 막대한 자금을 들이는 왜 왕실과 조정에서 대마도의 광물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가야의 반을 우리 왜에게 주시겠습니까?”
그때 카마타리의 요구에 김춘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신라로서는 응당 그만한 조건을 내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구려는 우리 왜를 신뢰하여 대마도에서 찾은 은광의 반을 거저 주겠다 하는걸요.”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까? 가야는 진흥제 이래 우리 신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마치 안학궁의 연개소문이 죽령 이북의 영토를 내놓으라고 겁박을 하는 것과 같은 화법에 김춘추는 크게 당황했다.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의 아들이 말한 대로구나.’
카마타리는 연개소문의 아들이 일러준 대로 김춘추를 떠보고 있었다.
-우리의 태왕께서는 대마도에서 찾은 은광의 반을 그대들에게 내겠다 응하시면서 동맹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하온데 신라가 과연 그만한 신의가 있겠습니까?
과거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신라를 떠보기 절묘한 방책.
“이 시기의 은자는 우리 백성뿐만 아니라 중원의 백성들 가운데서도 9할 이상이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지배계층과 부유층만의 자산입니다. 그런 귀중한 것을 선뜻 내주겠다는 고구려를 적대하기란 쉽지 않지요. 가야의 절반 정도는 되어야 그들의 신의를 거역하기에 맞지 않겠습니까?”
김춘추는 차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설마 그 욕심 많은 연개소문의 고구려가 굴러들어온 은광을 떼어줄 생각을 하다니.
‘아니, 이는 연개소문이 내어주는 것이 아니야.’
김춘추는 어쩌면 가야로 내려왔던 그 아들이 꾸민 계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야는 우리 신국의 여주께서 주관하시는 영역입니다. 제가 섣불리 결정할 수 없음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겠군요.”
“카마타리 공!”
“하면 서벌(徐伐)의 여주께 서신이라도 한번 보내어 물어보시지요. 그동안 저는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백제의 사비로 갈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김춘추는 차마 막을 수 없었다. 고구려보다 더 나은 제안을 할 수 없다면 이 외교는 필패였다.
* * *
헐떡이는 숨을 가라앉히고 후들거리던 다리가 진정이 됐을 무렵 왕건위는 장안을 한참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대명궁에 입궁하였을 때의 표정에 비해 지금은 한껏 웃음이 만연했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당나라 땅에서 당당하게 자주적인 고구려 사신의 입장을 대변한 뿌듯함을 동시에 느낀 것이다.
“당나라 황제를 앞에 두고 엿이나 먹으라고 할 만한 고구려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군.”
“다 보셨어요?”
“중간부터. 그 송충이 눈썹을 한 당나라 관리 놈이 괜한 핑계로 나를 현무문(玄武門)에서 들여 보내주지 않다가 말 고삐를 돌려 남쪽의 단봉문(丹鳳門)을 통해 늦게야 함원전(含元殿)에 이른 게 아니겠냐? 내 이세민과 그 졸개들이 건위 너를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당나라 놈들의 심보야 이미 작은 막리지께 지겹도록 들어서 알고 온걸요. 그렇지만 당의 황제는 문무를 갖추었고 명분 또한 중히 여기니 저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미리 말한 것도 있었으니 만일 제가 해를 당한다면 그릇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일 거고요.”
“녀석 참, 말도 잘하긴. 남산 중리대형께서 딱 건위 너를 가리켜 사신으로 보내라 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구나.”
변경의 경당 출신임에도 또박또박 할 말을 하는 왕건위를 보며 고사계는 짧게 감탄했다. 당나라 관리가 현무문에서 막은 이가 자신이 아니라 그였다면 고사계는 결코 왕건위가 했던 것처럼 당나라 황제와 대신들, 그리고 각국의 사신들이 보는 자리에서 당당히 고구려의 입장을 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닙니다. 사계 형님이야말로 태학에서 저보다 병서(兵書)도 많이 읽으시고 항해(航海)와 지리(地利)에도 능통하지 않습니까? 작은 막리지께서 형님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저 혼자 대임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하였습니다.”
“겸손하긴, 한데 네 말도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구나.”
서로를 평하는 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이 당나라 사신으로 오게 된 이유를 알아차렸다. 서로의 장점이 어울려져 중요한 임무 수행을 함에 있어 공동 작용과 협동으로 나타나 상승효과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난관 또한 적지 않았다.
“장안까지 가는 길목과 지형을 종이에 틈틈이 그렸다만 혹여 당나라 놈들의 불시 검문에 걸릴까 두려워 성에 들기 전에 모두 삼켰다. 이제는 돌아가는 길이니 슬슬 다시 그려도 되지 않을까?”
고사계는 왕건위를 보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다.
사신으로서 할 일은 모두 했으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중원의 지형을 기록해야 하는 일이 남았다.
그러나 당나라 땅에서 이를 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산동에서 장안까지의 여정도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었고, 당나라 땅은 이세민이 가히 천하의 중심이라 선포한 만큼 방대하고 넓었다.
이를 세세히 기록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중간중간 검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잦은 것도 일을 어렵게 만드는데 한몫을 했다. 특히나 다른 외국 사신들에 비해 고구려 사신에 한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짐부터 뒤지는 당나라 관리가 많아 섣부른 행동을 하기란 어려웠다.
이를 잘 아는 왕건위가 고사계를 향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형님께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우리 고구려의 해역에 들어설 때까진 지금처럼 머리로만 그리셔야겠습니다.”
“뭐어? 야 나 빨리 그리지 않으면 까먹을 거라고. 지금이 딱 좋은…….”
“쉿!”
그때 왕건위가 슬며시 눈치를 주었고, 어느새 당나라 군졸들이 사신 행렬에 뒤따르고 있었다.
“뭐야? 저거, 우릴 해치려고 오는 거 아니냐?”
갑작스러운 당군의 출현에 고사계가 당황했으나 왕건위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한 척했다.
“당황하지 마시고 앞만 보고 가십시오. 저들은 결코 우릴 해하려 온 게 아닙니다.”
“저렇게나 무장하고 오는데 해하려 온 게 아니라니? 너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
“고구려에 반감을 갖는 이들이 어찌 당나라 황제와 그 신하들뿐이겠습니까? 저 군사들은 우리가 당주(唐主)의 뜻을 태왕 폐하께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이 땅에서 변고를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게 하려는 이세민의 배렵니다.”
왕건위가 그렇게 말할 때, 때마침 어디선가 군중들이 몰려왔다.
성난 얼굴을 한 이들은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았다.
“이 더러운 오랑캐 놈들!”
“우리 집 장손을 돌려주거라!”
“우리 아들을 무참히 죽인 이 동이족 놈들!”
고구려 원정으로 계속되는 징발과 강제징용에 화를 입은 당나라 백성들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 당나라 장안의 대명궁에서 떵떵거리며 소리치고 있었으나, 저들이 가지는 분노의 대상은 모두 고구려로 향해 있었다.
“배려는 얼어 죽을, 우리가 해를 당하면 제 명성이 깎이니 뒤를 봐주는 척 선심 쓰는 척하는 거겠지. 하여튼 잘못된 군주를 섬기고 있으니 참으로 아둔하고 딱한 이들이야.”
“서두릅시다. 사계 형님. 계속 여기 오래 머물다간 화를 당하겠습니다.”
“그러자고.”
군중들의 곡소리가 울릴수록 고사계와 왕건위는 말고삐를 재촉하며 서둘러 당나라 땅을 벗어나고자 했다.
* * *
“환웅교와 도교가 미물의 종기를 백성들에게 맞으라 현혹시킨 것이니 사찰은 즉시 요사스러운 시술을 중단해야 한다!”
“왕실과 귀족들이 속고 있다!”
“요사스러운 시술을 중단하라! 즉시 중단하라!”
한편 도성의 한 사찰에는 이런 해괴한 소릴 퍼뜨리며 백신 접종을 방해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특히나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 신성(信誠)과 그를 따르는 사찰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같은 무리들이 중심이었다.
“이 모든 것이 요사스러운 종교를 들여온 잘못이니라!”
불교를 국교 삼아 사찰을 왕래하며 불사를 신봉하는 백성들은 동사주(東寺主)인 신성의 이 같은 발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두침 접종에 알게 모르게 의문을 갖던 일부 귀족들 역시 이러한 몇몇 사찰의 영향을 받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우두침 접종을 피해 왔다. 가깝게는 동부가에 있는 내 어머니라는 사람도 거부했기에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일도 아니었다.
이처럼 사찰이 고구려에 갖는 영향은 지대했다.
소수림왕이 세운 고구려 최초의 절 성문사(省門寺)는 애초에 관청을 고쳐 사용한 것이기도 했으니.
“남산 중리대형이 여기까진 어인 발걸음이십니까? 대막리지께 또 이를 알리기라도 하시려고요?”
내가 찾아왔음에 살며시 다가온 신성은 빈정거리면서도 차가운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누구보다 긴장하는 이가 그일 것이다.
“불과 얼마 전 태학까지 방문하였던 동사주(東寺主)가 아닙니까? 제가 못 올 데라도 온 것도 아니고 도성 9사찰 중 하나인 동사(東寺)에 방문한 게 뭐가 어때서요?”
나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차분히 대응했다. 어차피 이들은 태왕과의 접견을 막은 나와 연개소문에게 시위하는 것이고 이쪽은 크게 반응할 필요가 없었다.
사찰의 권위,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왕실과 제가회의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으니 더 조급해진 것이다.
사실 이들보다야 기껏 우두침 접종의 긍정적인 여론을 만든 그간의 노고를 망칠까 하는 염려가 크다.
그러니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다.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이는 환웅교와 도교가 아니라 신성 스님입니다. 당장 저들을 해산시키십시오.”
“해산이라니요! 해산을 해야 할 것은 다물군에서 더러운 종기를 채취하는 시술부터 멈추셔야지요! 대막리지께 이를 시행하라 이른 이가 남산 중리대형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슬슬 사찰의 정보력에 감탄하려 한다. 이를 두고 나를 딱 꼬집어 말할 정도라면 연개소문 주변 귀족들과의 협력도 무시 못 할 수준이라는 거다.
그러나 어찌 됐건 그들은 이 명분에서 지게 되어 있었다.
“동사주(東寺主)가 이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도성의 9사찰 가운데 왕명을 거역하는 유일한 사찰이 되고 말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태왕 폐하께서 시술을 마치시고 정릉사(定陵寺)에서 요양하고 계십니다.”
“태왕께서 벌써 미물의 시술을 받았다? 그, 그럴 리가!”
고개를 치켜들며 당황하는 신성을 보자 확신할 수 있었다.
태왕이 시술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이 이처럼 나서게 된 유일한 배경이라는 것을.
태왕의 몸 상태는 고구려 민심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나는 가벼운 고뿔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는 기간에 비밀 시술을 요청했고 이에 흔쾌히 응한 보장왕은 시술을 마친 뒤 사찰에서 요양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고구려 최대 사찰인 정릉사(定陵寺)를 끌어들인 자신감에 있었다.
“태왕께서는 고구려 제일의 사찰 정릉사(定陵寺)에서 시술을 받으시어 동명왕릉 앞에서 서토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동명왕궁의 터가 있는 다물군과 장수왕의 평양 천도와 더불어 동명왕릉이 옮겨진 정릉사를 묶어 명분을 쌓은 것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동사(東寺)에 모인 무리와 백성들이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 아버님이신 대막리지께서는 서토에 대항하지 않는 사찰은 왕명을 거역하고 서토의 돌림병을 받겠다는 것이니 대역죄로 다스린다 하셨습니다!”
그 말에 탁 하며 목탁이 바닥에 떨어졌다.
명분에서도 이기는 싸움. 여기서 그들이 반발하더라도 이제는 상관없다.
9개 있는 도성의 주요 사찰 중 하나쯤은 날려 버려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