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127화 (127/335)

127화 요동 치는 판도 (4)

“기껏 얻은 금은광을 왜의 새 지배 세력에게 진상하시겠다고요?”

내가 왜 사신을 접견한 하루 뒤 선도해는 확인차 사신들의 요구를 듣고 기록하다 한참 궁 안 서고에서 보장왕에게 보낼 문서를 정리하고 있는 나를 찾았다.

“다는 아니고 반만 떼어주겠다는 겁니다. 왜요? 저들의 비열한 웃음을 보고 오니 선 공께서도 아깝다 보셨습니까?”

“에취!”

그때 서고 문밖에서 망을 보던 걸걸중상이 대뜸 재채기를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은광산의 채광권을 왜인들에게 양도했다는 말을 듣고는 한참이나 구시렁대던 녀석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나와 함께 가야 원정에 참전한 걸걸중상 역시 대마도 광산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또 금덩이 맛도 제대로 보았을 거고.’

그야 내가 직접 가야를 정벌한 논공행상의 하이라이트로 삼기군의 각 장에게 큼지막한 대마도 금괴 하나씩을 손에 쥐여주었으니까.

-내가 더 커!

-아니야! 내 반짝이가 더 커!

얼마 전까지 동부가에서 조영이와 설눌이가 번쩍이는 금덩이를 사이좋게 가지고 노는 곳을 보았으니 틀림이 없다.

고개를 들자 지그시 부채를 내린 선도해가 할 말이 무척이나 많은 것 같았다.

“그거야 남산 중리대형이 발견하였으니 금은광 문제는 제 손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 조정에 그간 남쪽에서 올라온 금과 은, 구리, 천연진주, 견면을 기쁘게 받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이 모두 대마도에서 왔음을 알고 있지요. 대마도는 물이 맑고 잔잔하다는 상인들의 평으로 예로부터 광택 좋은 천연진주가 많이 난다는 소문이 있으니까요. 하여 이것이 귀족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리 좋지 못한 소릴 들으실 겝니다. 한 성정 하시는 대막리지께서도 한 말씀하실지 모르고요.”

하여간 욕심 많은 귀족들 같으니, 연개소문의 당근책으로 제물을 처먹을 대로 처드셨으면 좀 나라에 환원이라는 걸 해야지 남이 고생해서 얻어온 걸 곱게 받아먹으면서도 잃지 않을까 불만을 내뱉을 생각이나 하다니.

가만 보면 연개소문도 그간 정권을 지키고자 적지않이 공을 들였을 것이다.

“당분간 조정에 올라가는 품목에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그리하지 않았다면 저들은 지금 왜에 머물고 있는 김춘추의 손을 잡아 신라와 당에 붙으려 할 겁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손해를 본다 해도요.”

“으음, 그거라면 대막리지께서도 납득은 하시겠습니다.”

어차피 당장 왜가 금은을 채광한들 군사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당분간 새 수도를 정비하는 데에만 억만금이 들어갈 예정이다. 무엇보다 고대 일본이라는 나라는 기이한 전통이 있어 왕이 교체될 때마다 궁을 허물고 다시 짓는데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예산을 그들 왕실에서 자체적으로 소모하고 있었다.

거기다 새 실권자인 카마타리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새 도읍지에서 나카토미씨(中臣氏) 신당을 세우고 노역을 일삼는 바람에 사후에 백성들로부터 소가씨에게 천벌을 받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전내진이 보내온 대마도에 관한 기록과 왜 사신들의 약조를 함께 선도해에게 보였다.

“우리 고구려가 금과 은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서문(誓文)입니다.”

“금은보화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런 게 있습니까?”

“예. 보시지요. 금은광 반을 떼어주는 대가로 왜 섬 곳곳에 흩어진 한인들의 합세로 4만5천의 백성이 모인 대마도는 우리 고구려의 관할 안에 들어올 겁니다. 그들의 재능과 인력은 능히 금은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겁니다. 왜와의 최종 협상은 반드시 그리될 것이고요. 선 공께서 이를 아버님께 잘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요.”

조금 전까지 탐탁지 않아 하던 선도해는 내 설명을 듣고서야 안정을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일본 최초의 은광이 대마도에서 활발히 채광이 이루어질 때의 인구는 현대의 인구보다 1.5배 이상 높은 4만5천에 육박한다 하였다.

여러 무역선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은광 개발이 실시된 지 불과 3년 만에 가야계 유민과 한인들의 합류로 대마도는 유례없는 인구 증가가 발생했다.

‘그들을 온전히 가야로 불러들여 김유신을 막을지, 그곳에 남겨 일본을 장악할 교두보로 삼을지 선택의 기로인가.’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치열한 역사와 국익을 생각했을 때 고구려는 당나라 하나만 보는 것만으로 무척이나 벅찰 것이다.

거기다 지금도 성을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판도 하에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다루면서 고구려의 내정을 키우고 나아가 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찌 됐건 후방이 안정화되어야 한다.

왜에 대마도 금은광의 반을 양도하겠다는 파격적인 결정에 재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선도해와 이제 막 금 맛을 알기 시작한 걸걸중상이 오늘처럼 아쉬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일종의 외교적 투자였다.

또 하나는 대마도 은광이 비록 일본 최초의 은광으로 널리 알려져 왜가 이것으로 은전을 만들어 당나라와의 무역용 화폐로 사용할 정도로 번창할지라도, 세계 생산량 30% 이상의 은을 확보할 수 있는 섬나라 최대 규모의 은광이 대마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동쪽 일본 본토에 잠자고 있었다.

현재 대마도에 있는 은의 매장량은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후일 그것에 반을 얻는다면, 왜 조정은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애초에 대마도 광산이야 가야를 재건하기 위해 자급자족하거나 백제와 탐라로부터 황칠을 구입하고 무역로를 개척하는 용도로 쓸 예정이었다. 초기 채광량이 예상보다 많아 조정에 진상하기도 하고 있으나 이 추세라면 기존의 역사보다 더 빨리 고갈될지도 모르겠다.

식량 형편도 나아진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남서쪽 섬에 사탕 사업이었다.

-달달한 것이 꼭 꿀을 먹는 것 같사옵니다.

이슬람 왕국인 대식국으로부터 들여온 사탕이 한창 유구열도에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사비우의 서신을 받은 지가 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다.

이세민이 탐내하는 흑당을 해상 국가와 왜에 본격적으로 수출을 시작한다면 저들이 가져갈 금·은·구리는 순식간에 다시 고구려의 국고로 돌아올 것이다.

‘삼한의 뿌리가 깊은 왜 역시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대상이겠지.’

지금은 수나라를 선제공격했던 영양태왕의 외교처럼 적당히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며 한발 물러서고 있으나 반드시 때가 온다.

일단은 후방을 안정화하고 후일을 도모할 때다.

연개소문은 늘상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백제나 신라를 정벌할 수 있다며 서토를 봐야 한다고 큰소리치며 떠들고 다녔으나 오히려 그들보다 수월한 나라는 의외로 왜가 될지도 모른다.

“뭘 그리 골똘히 보고 계십니까?”

선도해가 지도를 보며 숙고하는 내게 묻고 있었다. 국제 정세를 생각하느라 너무 오래 생각에 빠진 모양이다.

나는 얼른 지도에 손을 뻗어 도성 동쪽 인근의 한 지역을 가리켰다.

“선 공께선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선도해가 지도를 보다 이내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은 다물군(多勿郡)이 아닙니까? 다물군(多勿郡)이라면 어디 보자, 본디 송양국(松讓國)의 고도(古都)로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께서 송양왕(松讓王)의 항복을 받고 명명한 땅일 것입니다.”

“예. 역시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이 다물의 뜻도 혹시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아주 예전에 들은 것 같사옵니다만 글자만 보아서는 도무지 뜻을 유추하기가 어렵습니다.”

“그야 한자가 아니니까요. ‘다물’이란 본디 ‘다믈’로,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의 옛 조선의 말입니다. 조선의 유민들이 한(漢)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자 하는 데서 이러한 말을 썼다고 합니다. 한자로 본다면 다물의 ‘多(다)’는 ‘많다’는 뜻이고, ‘勿(물)’은 ‘고대(古代)에 사대부(士大夫)가 백성을 불러 모을 때 세웠던 기(旗)를 본 떠 만든 글자’이므로, 이 둘을 합하면 ‘깃발 아래 많은 백성이 모인다’, ‘한(漢)나라에 빼앗겼던 옛 고토를 되찾고자 모여든 백성’이 됩니다.”

“호오, 그러고 보니 고구려의 사직이 햇수로 어연 70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간 옛 조선의 고토를 모두 회복한 고구려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아직 모두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옛 조선인들이 진출한 저 중원을 되찾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주인은 한(漢)나라에 이어 옛 조선의 영토를 넘보는 당(唐)나라입니다.”

고조선의 비파형동검과 고인돌의 흔적은 요하 문명의 터전을 지나 하북의 중원과 산동반도 일대를 망라하고 있다. 옛 조선인들은 틀림없이 저 중원에 들어가 조선의 깃발을 흩날리며 호령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가 옛 조선인들의 염원인 ‘다믈’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선도해가 장단을 맞추듯 웃었다.

“남산 중리대형께서는 역시나 대막리지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흐흐. 한데 다물군(多勿郡)을 보고 계신 것이 이리 저와 옛 역사를 논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지금쯤 우두법 시행 건으로 조정이 아주 발칵 뒤집혔을 게 아닙니까?”

“제가 어전에서 직접 보았습니다. 한데 궁금한 것이 이리 병을 먼저 앓는 게 진정 돌림병을 막는단 말입니까?”

선도해는 괜스레 딱지가 앉은 어깨를 보여주며 생색을 냈다. 누구보다 연개소문이 발 벗고 나섰으니 깐깐한 그조차 앞장서 접종을 받는 것에 별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선 공께서는 더는 돌림병으로 고생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말인데 다물군(多勿郡)의 목장에서 도성과 도성 인근 백성의 접종을 우선적으로 실시하려 합니다. 왕성과 가까우니 귀족들이라도 만 하루에 접종을 마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군요.”

후일의 성천군(成川郡)이 될 다물군(多勿郡)은 최근 태학의 식량 증산 정책과 목장 설치가 맞물려져 있는 도성 인근의 중요한 명승지였다.

쌀, 보리 따위의 농산물이 나며, 임산업, 축산업이 활발하다.

또한 고구려에게 상징적인 것은 그 옛날 송양왕이 축성한 서쪽의 흘골산성(紇骨山城) 밑 비류강가에 동명왕궁의 터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백신 접종을 그저 미물의 종기가 묻은 침을 맞는 행위로 받아들이다간 귀족들뿐만 아니라 보통의 백성조차 심이 거부감을 가질 일이다.

-동명왕궁의 신성한 기운을 받은 땅에서 중원에서 온 악질을 씻게 되리라!

이럴 때는 지난 전쟁에서 인지도를 크게 쌓은 요동성 신녀 찬스를 쓸 때였다.

지금쯤 도성에서 활발히 여론을 만들어 주고 있을 것이다.

‘동명왕궁이라니,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그만한 장소가 없지.’

착실히 진행되는 일들을 떠올리자 고구려의 미래가 참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도해가 서고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이제 일어났니?”

“예. 한데…….”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옛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

“으응?”

“그게 도련님의 꿈입니까?”

서적에서 서책을 보다 잠이 든 옥소가 언제부터 내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 눈빛 기억하는가?”

“누굴 말하는 거야? 아하! 나카토미님께서 예의주시하라 했던 그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의 아들말인가?”

“그래.”

“설마 고구려 조정이 진짜 우리의 접견을 그 어린것에게 맡길 줄이야.”

“우스운 일이라 할만하나 마치 우리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는 그 눈. 누가 진짜 왜의 주인인지 알고 있다는 말투가 아니었는가?”

“그저 어린놈의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범상치 않은 인물일세!”

“고구려의 궁궐 역시 우리가 가보았던 장안의 대명궁(大明宮)보다 크고 말이지.”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명을 받아 사신으로 급히 고구려에 파견된 코마로와 아미타는 카마타리가 천거한 인물로 정변 당시 구중궁궐에서 소가노 이루카의 숨통을 끊으며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 한인(韓人)이었다. 국제 정세와 삼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그들이 당당히 왜의 사신으로서 고구려로 보내지는 것이 결정되었고, 무사히 임무를 마치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그건 그렇지만 고구려가 이리도 순순히 나와주었으니 아무래도 대세는 당에 있는 게 아닌가?”

“자네는 지금 패강(浿江)에 정박된 저 누각선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는가? 성충과 흥수의 말이 사실이었어. 우리 섬의 배보다 배는 더 커 보일세.”

패수(浿水)의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판옥선의 웅장함은 먼저 사신으로 찾았던 성충과 흥수가 왜 그토록 고구려에 두려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서둘러 돌아가세! 이 서신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우리 왜와 고구려의 관계가 좌지우지될 것이야.”

코마로는 아직 풀어보지 못한 연남산의 서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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