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요동 치는 판도 (2)
삼국시대 의학 서적은 내가 기대하지도 않은 수백 가지 처방법들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었다.
긁어모은다고 모아 봤는데 고대 한반도 국가의 의사 이름과 처방전, 질병, 약재의 기록까지 이렇게 대규모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현대까지 남길 수만 있다면 틀림없는 세계기록유산(世界記錄遺産)이 될 것은 분명하다.
태학에서 소장하는 고대 의학서적에만 해도 실제 신라 의원인 임원무(林元武), 양공명(楊公明), 임경명(林敬明)의 약재 처방전이나 근초고왕 때 일본으로 파견된 백제 박사 왕인(王仁)의 복통 처방전, 고구려와 가야계 의원들의 몽정병과 천연두로 추정되는 돌림병 처방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 외에도 삼국의 의원들이 두루두루 기록하는 고뿔(감기), 소갈증(당뇨), 변독에 관한 처방도 상세했다.
‘내가 너무 고대 조상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동요로 퍼뜨린 천연두에 관한 여론이 이렇게나 쉽게 형성된 것이 못내 찜찜했는데, 이미 알게 모르게 돌림병은 삼국의 민간 사이에서 강하게 각인돼 있었다.
다만 그러한 질병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왜 걸려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 고대 의원들 사이에서는 벌써 두창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길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다.
“무모합니다. 그러한 치료는 전례를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중원에 기록된 서적에서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의술은 생명을 다루는 일이므로 신중해야 합니다.”
“민간 예방요법으로 완두창 딱지를 가루로 갈아 코로 들이마시는 것이 있습니다만, 이로 인해 목숨을 잃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고요.”
의학을 연구하는 태학의 조교들과 궁의 의원들은 각자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우두침 접종을 이처럼 결사반대했다.
이 중 돌림병 치료 경험이 많은 한 의원은 인두법 가운데 하나인 수묘법을 말하고 있었는데, 돌림병이 돈 가정 내에서도 생존한 이들을 보고 조선 후기에나 본격적으로 시행될 인두법을 적용하였나 보다. 그러나 실제로 인두법은 기본 면역력이 약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천연두가 이제 막 유입되기 시작한 고대인의 면역은 그야말로 새하얀 백지와도 같은 무방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시대의 인두법 시행은 조선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희생을 치르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창 바이러스에 걸린 소에게 면역물질을 뽑아 접종하는 우두법뿐이었다.
기왕에 맞는 백신이라면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더 안전하고 부작용이 적은 후대의 방식으로 하는 편이 훨씬 나은 법이다.
“내가 최초로 접종할 겁니다. 제 아버님이신 대막리지께서는 우선으로 접종을 한 이들을 가려 태왕 폐하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에?!”
“아니……!”
“그런……!”
솔선수범과 막무가내 경고로 나는 예방을 서두르고자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기회가 올 때 서둘러 집행하지 않으면 반대파들과 궁 의원들처럼 어쭙잖은 지식을 가진 이들이 여론을 형성하게 되어 골치 아파질 것이다.
두 번의 원정으로 영토를 넓히고 당나라 전선을 대파한 지금, 이 기세를 몰아 가장 번거로운 정책들을 최우선순위로 시행해야 한다.
다행히 접종을 위한 준비는 이들에게 발표하기에 앞서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육포 수급으로 목장을 설치한 부분이 컸다.
재작년부터 도성 인근에 국영과 사영 목장을 설치하기 시작하면서 백신을 추출할 마땅한 후보군이 늘어난 것이다.
두창이 발생한 지역으로 추정되는 고을 인근의 목장을 주로 조사한다면 두창에 걸린 소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찾았습니다! 작은 막리지.”
“정말 젖통에 요상한 반점이 있었습니다요!”
“그 소들이 정말 돌림병에 걸린 거란 말입니까?”
기마에 특출난 걸걸중상과 도성에 머물던 그 아우들이 힘을 써 줬다.
음메에─
건강한 소와 달리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 모양을 가지고 있었으니 눈에 띈 것이다.
“돌림병에 걸린 소의 면역물질인지 뭔지를 침으로 추출해 백성들에게 주입을 한다고요?”
“그런 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것입니까? 저는 두렵습니다. 도련님.”
침을 소독하며 접종 준비를 마친 나를 보고 걱정스러워하는 걸걸중상과 옥소였다.
여태껏 누구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건 나와 함께 전장을 누벼온 강인한 그들조차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게 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언제 허투루 하는 일이 있었느냐?”
그들을 안심시킨 나는 태학박사와 조교들뿐만 아니라 다른 궁중의 의원들과 태학에서 수학하는 다른 귀족자제들을 모두 모이라 했다.
그들 앞에 시범을 보여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남산이 네가 정녕 미친 게 아니냐?”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구나…….”
못마땅해하는 남생과 미리 설명을 들었어도 별로 탐탁스럽지 않은 남건은 여전했다.
그러나 남생이야 언제고 대세를 따를 거고 사찰 보수를 담당하는 남건은 본격적인 접종을 위해 아직 쓸모가 있다. 그 신성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 못내 찝찝하지만,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넘겨야 한다.
두 사람 외에도 태학박사와 궁중의 의원들은 지금이라도 멈추라고 나를 설득하려 했으나 나는 대뜸 시술을 감행했다.
“보십시오. 멀쩡하지 않습니까? 뭐 우두의 고름인지라 시술한 어깨에 종기도 나고 며칠간 열이 나기는 하겠습니다만, 더는 중원의 돌림병에 걸리는 몸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웅성웅성. 내 시범과 태연함에 모두가 동요했다. 곧바로 이어진 걸걸중상과 옥소의 시술 이후 미리 경고를 받은 의원들부터 차례로 시술을 받겠다고 하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곧 뜻밖에 인물이 앞으로 나오면서 귀족들마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도 시술이라는 걸 받겠습니다.”
최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달하였다는 칭찬이 자자한 숙영 공주였다.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며칠간 앓으실 수도 있습니다.”
“위인모이불출후(爲人謀而不忠乎)라 하였습니다.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면서 충심으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요. 남산 중리대형께서 백성들이 걸리는 돌림병을 몸소 겪고자 하시는 것은 질병을 이겨내고자 하는 그들과 함께 싸우고자 하심이 아닙니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명분이야 나쁘지 않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하지 않는가.
“아니 됩니다! 공주님. 그런 더러운 미물의 고름을 어찌……!”
“태왕 폐하와 태왕후 마마께서 염려하실 것입니다!”
“당장 그만두셔야……! 아니……!”
태학박사와 어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영 공주는 용기를 내며 두 눈 딱 감고 시술을 마쳤다.
그러자 남건을 포함해 시술을 받겠다는 이들과 남생과 태학박사와 같이 눈치를 보는 이들로 나뉘었고, 나는 남은 이들을 향해 물었다.
“대막리지께서 제게 몸소 시술을 받겠다 하셨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찌하시겠습니까?”
* * *
“무례합니다! 사신으로 온 우리를 이리도 문전박대하다니요?!”
“아무리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해도 우릴 이리 대하시면 아니 됩니다! 우리 덴노를 업신여기는 겁니까?”
태학을 중심으로 한창 접종이 시행되는 한편 사신 접견실에는 아직 태왕을 알현조차 하지 못한 왜의 두 사신이 성난 얼굴로 대기하고 있었다.
구레나룻과 턱까지 수북수북하게 난 털이 산적처럼 지저분하게 연결돼 있었고 맨발인 데다 배와 가슴 일부가 더러 보이는 촌스러운 옷차림은 100년 전 양직공도(梁職貢圖)에 그려진 왜 사신의 모습과 판박이였다. 그나마 지금은 100년 정도가 지나 온전히 섬나라 토착 의상이 아닌 푸르스름한 백제 관복을 변형한 듯 보였다.
한때 백제 두 좌평인 성충과 흥수가 안학궁을 방문해 이들처럼 접견실에 왔었기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일본 조정이라면 아마 이전 정치세력인 소가씨와 마찬가지로 백제 관복을 받아들여 입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대막리지를 뵈러 왔소이다.”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께서는 어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까?”
“아버님께서는 몸이 편찮으시어 제가 이리 접견을 나왔습니다.”
연개소문이 언급한 왜의 사신과의 접대는 우두접종을 마친 닷새 후였다. 몸이 건강했다면 하루 이틀만 쉬고 이들을 만날 요량도 있었지만, 어깨에 난 종기가 막 딱지가 앉기 시작했고 미열도 있어 며칠을 더 연장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
차곡차곡 해상 경제권을 확장해 가는 고구려는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이고, 신라와 마찬가지로 내란을 수습한 뒤 내정을 주로 신경 썼던 그들이 이제야 바깥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교역로와 주요 인적 자원을 우리에게 빼앗겨 가는 그들의 입장이 더 다급할 것이다.
‘김춘추가 아직도 일본에 있으려나.’
본래의 역사였다면 성충과 흥수의 계책으로 이 시기 김춘추는 거의 1년간 일본에 감금돼 있다시피 머물다 아무런 성과 없이 서라벌에 돌아가게 된다.
상황이 달라진 지금, 이들과의 협상은 아마도 김춘추를 상대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 * *
“총공격하라! 대야성을 수복하라!”
연이은 유인책의 성공으로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군 2만의 수급을 베고, 9천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린 대장군(大將軍), 이찬(伊飡),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 김유신(金庾信)은 흠순(欽純),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의 장군들과 함께 마침내 대야성(大耶城) 탈환전에 참여했다.
“형님! 대야성이 곧 무너지겠사옵니다. 성을 지키는 백제군이 전의를 잃은 것 같사옵니다!”
“듣기로 성을 지키는 위사좌평(衛士佐平)은 이미 도주하였다는 풍문입니다.”
“우리의 유인책에 걸려들었으니 성에 남아 있는 군사가 1천이 채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성을 넘는 일은 이제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대장군”
흠순, 진춘, 천존의 연이은 보고에 김유신은 대야성 수복이 눈앞에 있음을 감지했다.
“백제왕이 어리석구나. 계백이가 성을 지키고 있었다면 이리 쉽게 승기를 잡기란 어려웠을 것이거늘.”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새로 국경에 파견된 위사좌평 은상이라는 자는 전쟁 경험 하나 없는 귀족 나부랭이가 아닙니까?”
아직 지난 변고를 채 추스르지 못한 어지러운 신라 조정에서 김유신이 자신 있게 여주의 명을 받들어 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계백이 불과 달포도 채 지나지 않아 대야성에서 사비로 소환되었다는 첩보 덕분이었다.
“아직 성을 얻지 못했으니 방심하지는 말거라.”
“염려 마십시오! 동이 트면 대야성에는 다시 신국의 깃발이 날릴 것입니다!”
“그래. 저 대야성에 제단을 올려 품석, 고타소 부부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려 주도록 할 것이다. 그런 뒤 기세를 몰아 상주로 진군하도록 하자. 상주의 고령가야 수복을 시작으로 고구려에 빼앗긴 남은 가야도 모두 수복할 것이야!”
그렇게 당당히 외친 김유신은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찜찜했다.
‘서둘러야 한다. 서둘러야 해.’
과거 이 땅을 떠나 왜에 터전을 잡은 삼한의 후예들이 낙동강 앞바다에 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돌아오고 난다면 가야 부흥의 대의는 정말 연남산이 말한 고구려에 있게 되는 것이다.
순간 화를 참지 못한 김유신이 시선을 돌려 남쪽의 낙동강 물줄기로 향했다.
“개금의 아들! 가야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 결국 이런 뜻이었단 말이냐!”
시일을 끌면 끌수록 가야를 되찾는 일이 점차 어려워질 것이라는 기분이 든 김유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