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좌수영, 우수영 (4)
“녀석, 왔느냐?”
“예. 남산이 왔습니다. 아버님.”
연개소문과 독대하게 된 나는 예나 다름없이 깍듯하게 인사부터 시작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안학궁 집무실에 각을 잡고 앉아 있는 연개소문의 전신에서 광휘롭게 반사되는 빛살로 인해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요동성을 점거한 이세민을 찾아가던 그날, 당나라 무장들이 하나같이 나를 가리켜 개금(蓋金)의 아들이라 손가락질한 일이 생각났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고당 전쟁의 앞서 국경에서 벌어진 국지전에서 이처럼 금칠한 갑주를 착용한 연개소문을 보았거나, 혹은 안학궁을 방문한 당나라 사신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비롯되었을 것이다.
“네가 보내온 선물을 오고 가는 백성들과 외국의 장사치들이 볼 수 있도록 궁 밖 저잣거리로 가는 길목 앞에 걸어놓으라 일렀다. 보았느냐?”
“예. 마침 선 공에게 안내를 받아 보고 오는 길입니다. 잘하셨습니다. 고구려의 바다를 노리는 서토의 무리들에 경고를 하는 동시에 고구려가 해동의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천하에 보여 준 일이 될 테니까요.”
“암, 대고구려가 당 조정에 공물이나 바치며 신하를 자처하는 해동의 다른 열여섯 개 떨거지 국가들과 같을 수야 없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동해와 서해를 통해 새로운 무역 체제가 구축된 것은 정보의 확산을 뜻한다. 이세민이 아끼는 우진달과 이해안 두 당나라 장수의 수급을 확인한 외국의 상인들은 발 빠르게 이 소식을 그들 나라의 조정에 알릴 것이고 대세가 고구려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우리가 당나라보다 우위에 섰다고 믿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 고구려가 당나라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인식만이라도 전달되었다면 당장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었다.
다시 정면을 보자 나를 범처럼 노려보는 연개소문이 서 있었다.
“감히 내 명도 없이 군사를 일으킨 네놈에게 벌을 내릴지, 이세민이의 얼굴에 똥칠한 공으로 상을 내려야 할지 고민이 참으로 많았다.”
“아버님께서 제게 벌을 내릴 작정이셨다면 제가 보낸 선물을 굳이 온 나라와 외국 상인들까지 알도록 내버려 두진 않으셨을 겁니다. 고구려와 아버님의 권위를 높이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혈육을 핍박하시겠습니까? 이미 제 출정도 아버님께서 윤허하신 것으로 모두가 알고 있다 들었습니다.”
“허, 이놈이.”
내 능청스러움에 연개소문이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권력이라는 것은 혈연과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제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예외란 없을 터.
그러나 나의 활약이 연개소문의 권위를 드높이는 것이라면 그는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당장의 후계보다도 이세민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연개소문 그 자신의 것이 올라는 것이라면 더더욱.
“상을 주실 요량이라면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뭐냐? 또 지난번처럼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이라면…….”
삼략법에 정통한 연개소문의 눈치는 가히 한 수 앞을 볼 수준이었으나 그 예상대로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끊었다.
“요동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위한 군영(軍營)의 설치를 윤허하여 주십시오.”
“뭐라? 수군절도사를 위한 군영이라?”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권(海權)에 민감한 이는 다른 누구보다 연개소문이었다. 그의 영향권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군권이기 때문이다.
“석성에서 저와 삼기군과 함께 당군을 대파한 대로(對盧)와 중외대부(中畏大夫)로부터 이미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 해로로 침투하는 적군을 막고 나아가 서토의 본거지를 소탕하자면 요동 내 별도의 수군 기지가 필요합니다. 낙후한 비사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녀석아, 지난번에는 양만춘이 놈에게 요동과 요서의 군권을 내주라 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수영이에게 해권을 다 내주자는 게야? 권력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단순한 일인 줄 아느냐?”
호통을 치는 연개소문의 수염이 일순 부르르 떨렸다.
가진 것을 내놓기란 이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잘 안다.
그래서 세상에는 늘 타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지.
“누가 큰 고모님께 전부 내주라 하였습니까? 그래도 묘도군도를 이세민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낸 공이 있으니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고, 반만 내주면 아주 적당할 것입니다.”
“뭐? 반?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
“아닙니다. 남은 반은 저와 삼기군이 통솔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얼마간 요동 지도를 향한 연개소문의 시선이 다시 내게 꽂혔다.
“남산이 네놈이… 국경을 지키는 고구려 수군의 반을 통제하겠다? 하룻강아지가 범 노릇을 하랴.”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써 억양에 힘을 주고 있지만, 평상시보다 확연히 말의 속도가 빨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아버님께서는 작은 아버님과 선 공의 청을 들어주어 고구려 수군이 한 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을 막고자 하셨습니다. 제가 맡는 쪽이 다른 누구보다 안심이 되실 텐데요?”
“녀석아, 아직 너는 경험이…….”
“어리다거나 경험이 미천하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이래 봬도 동해를 아버님께 바친 접니다. 그 덕분에 탐라와 직접 교역하게 되었고 지금 입고 계신 갑주를 더욱 광채 나게 해 주는 황칠을 조공품으로 받고 계시질 않습니까?”
이 자리에서 나는 금을 좋아하는 연개소문이 그토록 바라는 고구려 정규군을 황칠 명광개로 무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과거 백제를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황칠을 이제는 가야라는 중계 무역지점을 통해 고구려가 직접 수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른 어떠한 무역품보다도 연개소문이 가장 탐내하는 으뜸은 단연 빛깔 나는 황칠이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성충이 내게 건넨 군수품은 아마 지금쯤 삼기군을 더욱 빛나고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있을 것이다.
“좋아. 그리하도록 하자. 하나 서토는 곧 정벌될 것이니 내가 돌아올 무렵에 당나라가 이 세상에 없다면 굳이 요동에 수군을 위한 병영이 필요하지는 모르겠구나.”
껄껄, 이어 나를 내려다보며 조소하는 연개소문은 출정에 대한 마음을 이미 굳힌 듯 보였다. 한번 중원을 다녀왔으니 두 번이라고 가지 못할 것이 없다는 저 호쾌한 패기와 자신감. 이는 한국사에서 만리장성을 넘어 현대 북경 내의 고려촌을 세운 호태왕 이외의 아마도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아버님께서 마음을 굳히셨다면 능히 중원에 도달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내 친정을 하나 같이 반대하며 시비만 거는 귀족들은 몰라도 역시 군사를 아는 자식놈이 100배는 낫구나! 나아!”
내 반응에 연개소문은 탁자를 탁 치며 털털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었으면 한다.
“하나 점령은 어렵습니다. 지난번처럼 큰 성과 없이 다시 군사를 물리고 돌아오실 겁니다.”
“뭐라?”
나는 단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머리를 저어 버렸다. 그러자 연개소문이 실망감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쏘았다.
“중원은 무리 없이 갈 것이나 정벌하지는 못하고 허탕만 치고 돌아온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아버님께서는 지난번 이세민을 쫓고자 중원으로 가셨으나 큰 성과 없이 돌아오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핵심을 찌르듯 묻자 화를 억누르며 잠시 상념에 잠긴 연개소문이 대답했다.
“군량이 부족해서였다.”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마음만 먹으셨다면 중원의 부락들을 약탈해서라도 군량미를 얻고 군사들을 먹이셨을 겁니다.”
“으음.”
“하나 그것은 천손의 후손인 고구려 사람이 할 짓이 못됩니다. 도리가 아니니 절대로 윤허하지 않으셨을 테지요.”
“호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을 짓던 연개소문이 짧게 감탄했다.
가야에서 만난 검모잠으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이유가 고구려가 물러선 사정 가운데 하나였다.
“제법이구나. 하나 이번에는 다르다. 군사들에게 약탈을 허락할 것이다.”
“그래도 어렵습니다.”
“어찌하여?”
“중원에 간 고구려 군사들은 하루가 지나면 다시 고향 생각이 나 돌아오고 싶어 할 테니까요. 그들의 재산이 모두 이 땅에 있습니다.”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의 최대 약점은 천하의 연개소문이라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놈이, 제 놈은 1만의 군사를 거닐고 영토를 넓히고 이세민이의 군사와 싸우고 돌아왔으면서 제 아비는 15만의 군사를 일으키고도 중원의 영토 한 점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남산이 네가 전공 몇 번 세운 것 가지고 이 아비를 우롱하고 아주 기고만장하는구나!”
“가야의 경우는 특수합니다. 엄연히 그곳 토착민들이 주축이며 그곳에 파병된 우리 군사들에게 나름의 재량과 보상을 주고 있으니까요.”
“보상이라?”
연개소문에게 따로 밝히지 않았지만, 가야에 주둔한 검모잠의 고구려군과 걸사비우의 홍기군은 중매를 맺어서라도 가야의 토착민들과 엮이도록 만들었다. 그저 재물이 아니라 가정을 만들어 그들이 그 땅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이유를 주는 것. 비라부의 둘째 딸과 김흠순의 사촌 여동생을 이제 막 성년이 된 걸사비우와 혼인시킨 일이 대표적이었다.
“무역에서 얻은 이문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그 15만의 군사 가운데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장정은 얼마 되지 못할 겁니다.”
“뭐야?”
“선 공에게 모두 들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아직 성년도 되지 못한 15세 아래의 젊은 사람들을 징병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요.”
“성년이 아니나 체격이 좋으면 징집하여 병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태왕 폐하의 조서를 받아놓았다. 이를 집행하고자 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야.”
조금 전 연개소문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645년, 안시성 전투 바로 직전에 벌어진 주필산(駐蹕山)에서 고구려는 전례 없는 15만의 대병을 동원하여 이세민과 맞섰고 크게 패했다. 한국사 동원 최대의 병력이라 불리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허수가 존재한다. 바로 아직 성년도 채 되지 않은 15세 미만의 어린 소년병들과 사내로 분장한 여인네들까지 무더기로 징집되어 전장에 끌려간 것이었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서처럼 수만 단위의 고구려인 포로가 나온 것은 모두가 이 때문이었다.
이를 안 이세민이 그들을 딱하게 여겨선지 포로들을 풀어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나왔지만, 이것이 사실이듯 거짓이든 이제 실현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시 요동 전선이 동시다발적으로 무너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연개소문은 귀족들의 요구에 못 이기는 척 자신의 직속 군사들은 평양에 남기고 고구려의 미래를 던지면서까지 사활을 건 도박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1차 고당 전쟁 이후 고구려가 10년이 넘도록 당나라에 크게 반격하지 못하는 실책.
그리고 이것은 놀랍게도, 이세민 역시 마찬가지의 지시를 내리며 위징에게 크게 비판받았던 일이기도 했다.
“거두어 주십시오. 그들은 아직 징병할 대상이 아닙니다.”
내 반대에 벌게진 낯빛의 연개소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중원을 정벌하자면 그만한 희생은 감수해야지!”
“그건 희생이 아니라 고구려의 미래를 사지로 모는 행윕니다.”
“어허! 남산이 네놈도 다른 귀족들과 같이 내가 못 할 것이라는 게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징병을 많이 한다고 하여 군대가 강해지지 않으며 군대의 힘은 군인의 수가 아닌 오로지 훈련과 지휘의 힘입니다. 아버님께서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연못의 물을 다 빼버리면 당장은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겠지만 이후에는 연못에 물고기가 아예 살지 않게 됨을 말입니다. 후일을 위하여 젊은 사람을 징집하셔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 감탄했다. 위징이 이세민에게 했던 간언을 설마 연개소문에게 하는 날이 올 줄이야.
“흐하하하!”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연개소문에게서 이내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불현듯 큰 체구로 걸어와 다가오더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막내 놈이 다 컸구만! 아주 다 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