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좌수영, 우수영 (2)
“대장이 돌아왔다!”
대장이 돌아왔다는 한 장정의 외침에 장산군도의 장교들을 필두로 고구려 수군이 허둥지둥 달려가 각을 세운 채 부둣가 앞에 집결했다.
작은 미늘들을 가죽끈으로 꿰매어 만든 찰갑의 갑옷 장식에는 멀리서도 연수영을 알아볼 수 있는 현무 문양이 반짝였다.
“하-선(下船)!”
연수영의 대장선이 대장산도에 정박할 무렵에는 밤하늘에 청명한 별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화르르. 길을 밝히기 위해 부둣가 앞에서부터 일사불란하게 횃불이 드리었고, 나는 그들만의 의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금 멀찌감치 떨어진 막사 인근 언덕에서 나무에 기댄 채 조용히 지켜보았다.
“천제! 천제! 천제!”
“천신! 천신! 천신!”
연수영이 부둣가에 발을 닿자마자 장산군도의 군사들이 마치 구호를 제창하듯 그렇게 외쳤다. 고구려 사람들은 단군(檀君)과 주몽(朱蒙)을 천제(天帝)와 천신(天神)의 자손으로 여겨 국조신으로 숭상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들을 드높이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처럼 승리(勝利) 무사(無事)를 기념하는 7세기 고구려인. 거기다 고구려 바다 사람들의 의식이라니, 도성에서조차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었다.
“저기 옥소 누님이 스승님과 포옹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막리지. 무척이나 반가웠던 모양입니다.”
“그래.”
“옆에 수진 공은 아무래도 미안해하시는 손짓이 꼭 사과를 하는 것 같고요.”
그 광경을 나와 함께 보고 있는 걸걸중상이 특유의 높은 시력을 이용해 잠시 후 벌어진 일에 대해 내게 상세히 귀띔을 해 주었다. 1년 만에 인사를 나누는 옥소와 연수영을 보자 모녀 상봉에 감동을 느꼈고, 그 자존심 강한 연수진은 내가 부탁한 대로 잘 이행하는 것 같았다.
‘부디 진심이었으면 좋겠는데.’
연수진을 보며 내심 그리 생각했다.
사실 내가 저들 옆에 있으면 괜히 눈치 보일 것 같아 이리 떨어져 있는 이유도 있었다. 괜히 초를 칠 수 없으니 적당히 비켜 주는 게 예의인 것 같기도 하고.
그 덕분에 참혹한 전장에서 잠시나마 숨 돌릴 인간적인 풍경을 볼 수 있게 된 걸까. 그 끝에는 하이라이트로 내가 준비한 게 따로 있었다.
“준비는 다 되었지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주군.”
“명만 내려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발사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작은 막리지.”
나이답지 않게 내가 보여 준 폭죽에 흠뻑 빠진 아재 설인귀와 대나무통에 흑색화약을 잘게 말아 넣은 성인 걸걸중상이 시골아이같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이 섬 저 섬을 넘나들며 그간 고생한 군사들의 노고도 풀 겸 어렵게 얻은 승리를 감축할 불꽃 쇼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에 내가 그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인귀와 걸걸중상이 외쳤다.
“갑니다!”
“발사!”
폭폭, 폭죽 터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슝슝 하늘 위에 솟구쳐 오른 불꽃의 향연.
펑, 펑! 탄력 있는 파열음이 밤하늘을 오색찬란하게 수놓았고,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우억! 저게 뭐야?!”
“와우!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는데?”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일순 겁에 질린 군사들과 기쁨을 만끽하는 군사들로 나뉘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화려하고 멋지구만.”
“우리 집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들이 같이 봤으면 좋아했겠어.”
하지만 겁에 질린 군사들도 곧 번쩍대는 불꽃이 해가 되지 않음을 깨닫고 입을 쩍 벌리며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만족해하는 설인귀와 걸걸중상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 * *
막사 안에 든 연수영은 나를 제외하고 다른 이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아무래도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법 쌓여 있는 모양이다.
“환영이 요란하고 찬란하더구나.”
그래도 첫마디는 내가 공들여 준비한 것에 대한 감상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까? ”
“아니다. 군사들이 좋아하니 그것으로 되었다.”
전장에서 돌아온 연수영은 침착했고 도성에서 봤던 모습보다 한층 더 웅장한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요동반도 연안에서 중원과 가까운 섬인 묘도열도에 이르기까지 한두 번도 아니고 100여 차례 넘게 교전을 걸어온 이세민의 수하들과 맞서다 보면 저런 분위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야 기껏 요동 벌판에서 계필하력을 날려 버린 것까지 쳐봐야 크게 세 번의 격전을 치르고 끝냈으니 이 한여름에 묘도열도에서 보낸 피로도와 비할 바도 아니다.
“스승님께서 묘도군도에서 적을 막아 주신 덕분에 요동 반도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내가 할 말을 네가 하니 떨떠름하구나. 남산이 네가 아니었다면 장산군도와 석성이 큰 위기에 처할 뻔하였거늘.”
“저야 고작 이세민이 보낸 떨거지들을 상대했을 뿐인걸요? 또 굳이 공을 나누자면 스승님께서 통솔하신 장산군도에 배치된 군사들의 몫이 가장 클 것입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계책을 짤 수 있었고, 또 장산군도 해협과 지형을 빠르게 익힐 수 있었으니까요.”
겸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명백한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더 많은 정보를 선점한다는 것은 공격과 대응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해진다. 바로 지난 석성 전투만을 예로 들어도 벽류하의 지류가 석성과 통한다는 사실을 모른 이해안은 빠르게 요동 남단 남쪽 해안에 상륙해 북으로 올라 석성을 취할 생각을 했으나 벽류하의 지류를 이용했던 우리는 해안에 정박한 적선을 수장시키고도 신속하게 석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요동을 제집 마당처럼 파악하고 있고 바다에 익숙한 장산군도 군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뒤의 두 번의 승리는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 이곳의 군사들에게 이미 모두 들었거늘, 거기다 오늘 여기 군량이며 군수품까지도.”
톡톡, 그때 연수영이 막사 내 탁자에 놓인 장부를 검지로 톡톡 치며 장산군도의 군비가 완비돼 있음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가 도착하기 전까지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군수품들을 창고에 넣어 정리하고 장부에 기록하고 있었다.
언제 다시 해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전시 상황에 삼기군을 제외하고도 장산군도에 배치된 2만의 군사를 충분히 먹여 사기를 유지하자면 틈틈이 비어 있는 창고를 채워 넣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에 온 곡식은 뜻밖의 장소에서 온 것이었다.
“거기 군수품 목록은 모두 남쪽에서 온 것입니다. 백제의 좌평께서 보내 주신 거지요.”
“백제가 말이냐?”
남쪽에서 왔다는 이야기에 연수영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요동반도 연안에 오기 전까지 백제의 바다를 넘어 가야를 정복하고자 했던 연수영이었기에 누구보다 화가 났을 그녀였다.
“예. 사정이 있어서 설명하기는 좀 길지만, 지난 일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받아 두시면 좋을 것입니다.”
팔짱을 낀 연수영이 탐탁지 못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만 생각한다면 이가 갈리지만 지금 우리 사정을 생각한다면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구나.”
“엄연히 백제가 잘못한 일이니 마음 놓고 쓰셔도 될 것입니다.”
명목상 지난 뒤통수에 대한 사죄로 얻은 군수품이었으나 그보다 백제가 여유로워진 것이 한몫을 했다. 고구려가 가야를 정벌하면서 열린 삼국회담으로 인해 삼국은 일시적으로 휴전에 돌입했다. 가야를 상실한 신라는 새 여주의 등극이라는 혼란 속에 비담의 난을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고, 백제 역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사태를 관망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어찌 됐건, 그 덕분에 백제는 자연스레 고구려에 군량미와 군수품을 보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셈이다.
다만, 문제는 내가 여전히 모르는 백제 내부만의 갈등의 존재 유무였다. 불과 얼마 전 백제의 동태를 살피는 비라부의 연통에서 백제의 군대부인과 정사암 회의 내 좌평들 간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 군수품 건으로도 알게 모르게 백제 조정과 군대부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뒷소문도 있었고.
기록에서처럼 의자왕이 두 충신인 성충과 흥수를 내치는 배후에 군대부인 은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상황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걸리는 것. 바로 전내진이 전해온 일본으로 건너간 김춘추의 행보였다.
일본의 새 권신으로 등극한 한인(韓人)이 기존 역사에서처럼 백제와의 동맹을 지키겠다고 순순히 김춘추를 배척한다는 보장이 없다.
‘상황이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지.’
일본에 완전히 흡수되어야 할 기존 한인(韓人)들이 내가 열어버린 개척으로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했다. 이 풍파는 비단 변한 지역의 가야로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변한이 복권된 것을 보고 과거 백제에 복속되고 싶어 하지 않은 마한의 후예들, 그리고 신라에 복속되고 싶지 않아 바다로 나선 옛 진한의 후예들인 연오랑세오녀의 후손들이 고구려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란스러운 삼국이 새로운 분기점을 맞게 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군수품보다 이걸 봐주십시오.”
급변해지는 시대에 앞서 나는 내 앞에 놓인 문서를 연수영에게 차분히 전달했다.
“좌수영(左水營), 우수영(右水營)?”
문서에 적힌 글자를 또박또박 읽고 말하는 연수영을 보며 내가 이유를 설명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으로 비사성(卑沙城)이 여럿 함락당한 이래 고구려에는 별도의 수군 기지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고구려에는 별도의 수군 군영이 필요합니다.”
연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석성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거라면 틀리셨습니다. 내륙에 위치한 석성은 온전한 수군 기지라 할 수 없습니다.”
“어찌하여서냐?”
“배가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항구가 없으니까요. 작은 부두만으로는 ”
“항구가 없어도 나는 벽류하의 지류를 이용해 선박을 꾸준히 건조하였다. 그 고구려선들로 하여 이 장산군도에서 장량이 이끄는 1천여 척과 맞서서 승리하였고.”
“그래서 그때 활동한 우리 고구려선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리는 연수영을 향해 내가 말했다.
“요동에서는 대부분 수리도 하지 못해 버려지거나 판옥선의 지붕으로 삼고자 판자를 뜯어내지 않았습니까? 다음에 판옥선이 그리된다면 다른 판옥선의 지붕으로 삼고자 그리 뜯어내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너, 그건 또 어찌 알고…….”
장산군도 토박이 군관들에게 육포 한 점 내주면 알아낼 수 있는 것 가지고 뭘요.
“수군 기지란 본디 수군에 특화된 군사 시설이어야 합니다. 비전투 시에 언제든 선박을 수리하고 보관할 수 있어야 하며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도 있어야겠지요. 무엇보다 전선을 정박시킬 항구와 부두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별도의 수군 기지 없이 당나라와 소모전을 계속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계속된 싸움에 지치는 쪽은 적은 인적 자원을 보유한 고구려일 것이 뻔하다. 체계를 잡지 않고서는 전쟁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남산이 네가 모르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정확히는 크게 두 가지겠지요.”
“뭐?”
연수영이 고민하는 것이라면 뻔할 뻔 자다.
“하나는 재정적인 부분일 거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정치 뭐? 네가 그것까지 다 알고 있던 게야?”
두 눈을 부릅뜬 연수영이 내게 가장 묻고자 하는 것은 응당 정치적인 부분일 것이다. 연수진을 석성군주로 삼아 고구려 수군의 통제권을 악화시킨 장본인은 결국 안학궁에 있을 테니까.
“그 사안들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라의 재정은 스승님께서 지난번 도성을 방문했을 때보다 훨씬 넉넉해졌습니다. 보름에 한 번이긴 하지만 고구려 백성들의 한 상에 고깃국을 먹일 정도는 되었으니까요. 정치적인 부분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이번에 도성에 돌아가 고구려 수군의 절반은 제가 통제한다 이를 것입니다.”
석성 전투에서 흑벌무와 장산군도의 군사들을 참여시킨 것은 절묘했다. 연개소문이 보낸 고정의와 미림부가 증인으로서 이를 증명시켜 줄 것이니 말이다.
“뭐 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렇게 하자구나.”
잠시 후 심각한 표정을 짓던 연수영이 이내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예?”
“그리하겠대도. 하면 네가 정리한 이 문서는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
연수영은 대뜸 제 막사인 양 갑옷을 풀고 잠잘 때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 더 수군 기지를 만들어야 할 이유를 생각해 둔 나로서는 왠지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 * *
“어서 오십시오. 승전을 감축드리옵니다.”
새벽 모두가 잠든 이른 시각. 잔잔한 물결의 패수를 따라 평양 주작문에 이르자 선도해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고맙습니다. 선 공. 한데 궁에서 마중하지 않고 이리 나와계시다니요.”
“대막리지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묻자, 한동안 뜸을 들인 선도해가 천천히 부채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