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대장산군도 (5)
“지금 제 생각을 물으셨습니까?”
“그래, 거기 자네 말고 누가 있는가?”
빈 회의장에 자리한 계백은 정사암회의의 수장인 상좌평이자 내신좌평인 성충이 자신에게 발언권을 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성충과 흥수는 이처럼 정사암회의가 끝나고서도 빈 회의장에 남거나 사가에서 따로 만나 나랏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인물들이었다.
계백은 그들을 백제의 충신으로서 존경하는 한편 자신의 말은 아꼈다.
“저는 백제 무장으로서 좌평 어르신들과는 그 격이 다릅니다. 외교에 관해서 제가 발언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괜찮으니 말해 보시게.”
“격이 다르다니, 허기지면 밥을 먹어야 하고 갈증이 나면 마셔야 하네. 창칼에 베이면 살점이 뜯어져 나와 붉은 피가 나오는 다 같은 사람이 아닌가? 고구려와 신라의 대세와 각각 말을 섞고 온 자네일세. 외교라는 것이 어디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귀족들만이 발언할 수 있는 고결한 것이라고.”
두 좌평은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을 주도한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산과 접촉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온 계백을 높이 평가했다. 자칫 군사동맹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고구려와의 오해를 풀었고, 신라와의 전쟁을 잠시 중단하며 고구려의 남진으로 새롭게 그어진 낙동강 국경의 방어선을 점검할 시간을 벌었다.
이 무더위에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난감하군.’
성충에 이어 흥수마저 거들자 말로 그들을 이길 수 없던 계백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굳이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두 좌평 어르신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김춘추가 북으로, 서로, 남으로 방위를 가리지 않고 이처럼 동분서주한 까닭은 필경 백제에 대한 원한일 것입니다. 내법좌평의 말씀대로 우리 백제와 왜(倭)와의 관계 역시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저들이 우리 백제를 생각하는 마음은 각별할지 모르나 성왕께서 신라에게 배신을 당해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하신 후 우리는 군사적 원조를 위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 나라에 백제국의 왕자를 여러 볼모로 보내는 실정입니다. 연호까지 대내외로 알리려는 왜왕이 더는 우리 백제를 동등한 관계로 보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계백은 벌써 십수 년 전 의자왕의 아들인 풍 왕자와 선광 왕자가 각각 왜(倭)에 볼모로 가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백제의 왕자와 백제가 받아들인 대륙의 문물을 대가로 왜의 군사적 도움을 받는 동맹이라고는 하나 장차 이것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볼모 얘기에 덧붙이자면 정확히는 신라보다 고구려가 한몫을 하였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말입니까?”
계백의 물음에 성충이 대답했다.
“우리 백제국 아신왕이 고구려 태왕에게 이기고자 왜인들을 삼한 땅에 끌어들인 일로 당시 태자였던 전지왕께서 왜(倭)로 건너간 것을 계기로 말일세.”
“이거 자칫 200년 전 고구려의 남하(南下) 여파가 재현이라도 되지 않을까 겁이 나는구만.”
새롭게 짜인 국경선 지도를 보던 성충과 흥수는 하나같이 200년 전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이 주도한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삼한의 외교 판도가 한바탕 크게 뒤집힌 사건의 재현을 우려했다.
근초고왕 때를 계기로 왜국의 우위에 섰던 백제 외교의 저울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계기와 신라와의 잘못된 100년 동맹이 모두 그때 일로 비롯되었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두 태왕의 남하 정책으로 인해 삼한의 백제, 신라, 가야 등은 모두 직접적인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지. 철 무역으로 가야에 의존해야 했던 왜(倭) 또한 고구려와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지 않았는가?”
“하면 작금 삼한의 판도는 모두 고구려가 만든 것이라는 뜻입니까?”
성충이 말하는 옛이야기에 의문이 생긴 계백이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된 셈이지. 당시 고구려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디가 모자라서 왜(倭)에 왕자들을 보냈겠는가?”
“오히려 저들이 보냈으면 보내왔겠지. 우리는 기록으로만 보아서 모르겠지만 참으로 아찔했던 순간일 게야. 가야의 맹주국이 저 바다 건너 왜국으로 도피를 해버렸으니, 섬나라의 지배계층이 뒤집힌 일이었지.”
중장기마전술을 바탕으로 삼한 전체를 휩쓸었던 고구려 기마군단과의 접촉은 기마 전법이나 승마의 풍습을 왜인들이 배울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 고분에 마구(馬具)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전란이 계속되면서 왜국으로 건너오는 삼한 계통의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파도처럼 일어나게 되었고 일본열도에는 왜인들의 생활 자체가 큰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수에키(須惠器)라는 토기문화를 일으켜준 이는 가야인들이며, 불교 미술문화를 일으켜준 이는 백제인과 신라인들로서 지난 200년간 크게 부흥한 왜나라는 문화적인 우월감을 뽐내며 점차 자립심을 가지게 되었다.
“연남산이 가야를 정벌하면서 왜(倭)에 숨죽여 지내고 있던 가야 유민들과 토기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거둔 가야와 옛 진한계 상인들, 거기다 왜국의 기득권이 된 적지 않은 삼한의 인사들마저 낙동강으로 유입되었다 들었습니다.”
낙동강 유역을 유심히 살피고 있던 계백은 왜(倭)에 건너갔던 수많은 삼한의 인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정보를 전해 받았다. 저들의 실세들이 한꺼번에 바다로 빠져나온 것은 왜 왕실로서는 충분히 우려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라하께 서둘러 왜(倭)에 사신을 파견해 달라 주청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어라하께서 성충 자네와 내 말을 들으시겠는가? 대야성에 있어야 할 계백이 어찌하여 사비성에 있단 말인가?”
흥수는 백제 정치가 뜻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근심했다.
“어라하의 의중이라기보단 군대부인의 의중이라 보아야겠지.”
성충의 말처럼 국경에 있어야 할 계백이 돌연 왕성에 소환된 것은 의자왕의 의도가 아니라 은고가 의도한 일이었다. 계백을 정사암 일파로 간주한 은고가 가야를 얻어 날로 강성해지는 고구려 세력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 * *
“300척이 넘는 당선이 광루섬에 도착했다고요?”
“글쎄 그렇다니까! 내가 무인섬으로 들이닥친 적선을 조지고 광루섬까지 단숨에 되찾으려고 했는데 그새 또 새까맣게 몰려오니 이리 내뺀 거지. 그 떼 놈들, 대체 얼마나 많은 군선을 보내오는 거야? 언니는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어쩔 수 없었으니 이리 도망쳐 온 것을 인정해 달라는 말투. 석성 수군을 재정비한 연수진은 장산군도 곳곳에 떠 있는 무인섬을 이용해 군도를 일거에 장악하려는 우진달의 당선을 물리쳤다. 그러다 내친김에 빼앗긴 광루섬까지 되찾겠다고 자신 있게 진군하다가 적의 후발대를 보고 내가 있는 대장산도로 급히 내뺀 모양이다.
“그래서 적장이 누군지는 알고 오셨습니까?”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냥 당나라 장수겠지.”
다혈질적인 연수진의 대답은 첫인상 그대로였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굳이 묻지 않아도 어차피 당의 후발대를 자처하는 이는 우무위대장군 이해안일 것이다. 산동반도 내주(萊州)에서 출정한 이름난 중원의 수군 장수였다.
연수진의 보고에 나는 서쪽 해안을 바라보았다.
대승을 거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반만 이긴 것이다. 뭐 그만한 후발대까지 장산군도로 몰려왔으니 본래 역사에서처럼 석성에서의 참패와 적리홀에서의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본래 역사에서 석성이 함락된 직후 적리홀에 주둔한 고구려 군사 1만이 그들과 맞서 패전했다. 즉, 장산군도와 요동 남단을 노리는 당나라 수군의 규모는 못 해도 고구려 병력의 배 이상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당장 이번 해전에서 맞선 우진달의 병력만 해도 전선 400척 이상의 3만이 넘는 군사였다.
대장산도 해협을 간신히 빠져나간 우진달 휘하 장졸들은 이미 광루섬의 이해안과 합류했을 것이다.
적선은 못 해도 다시 400척의 규모.
그러나 그렇다고 겁먹을 건 또 없었다.
한 번 했던 걸 다시 치르면 된다.
물론 같은 작전이 다시 먹힐 일은 없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수의 고구려 수군이 내가 있는 대장산도에 도착했다.
옥소가 확인한 우리 전선의 수만 403척에 병력의 수도 무려 도합 3만에 이르렀다.
물론 이 중 120척과 탑승한 1만 2천 9백의 규모는 삼기군의 군사였으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300척에 가까운 전선이 이 장산군도와 요동만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웠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팔짱을 낀 채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는 저 연수진을 보자 알 것도 같았다.
‘아무래도 석성군주 자리를 빼앗은 연수진과 연정토의 작품인 모양인데……?’
연수영의 수군 독점을 견제하고자 더 많은 수의 고구려 전선이 장산군도와 요동만 일대에 배치돼 버린 배경이다.
그렇게 그들의 방해가 도리어 장산군도를 살리게 된 셈이었다. 만약 장산군도를 지킬 전선이 연수영을 따라 묘도열도로 빠지고 이곳에 소수의 전선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삼기군의 힘만으로는 후발대인 이해안은커녕 앞서 우진달의 수군과 맞서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번 사태에 미리 연수영에게 언질을 주지 않은 이유는 지금의 상황까지 고려했던 부분이 컸다. 연정토는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했던 범위에서 움직일 뿐이었다.
‘3년 전부터 공들인 작업의 효과가 오늘에서야 나타나는구나.’
-두둥.
그리고 무엇보다 기대했던 성과는 바다를 채운 고구려선의 위용이었다.
지난 1차 고당 전쟁에서의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한 결과와 연개소문이 내 조언대로 수군 양성에 대한 적극적인 추진을 도와주면서 현 규모의 수군 선단을 양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수영에게 미리 기별을 줄 걸 그랬나.’
광루섬에서 바다를 뒤덮은 당선을 보자마자 솔직히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애초에 대동강을 떠나면서부터 그런 마음이었지만 여차하면 연수영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주저했다.
하지만 장산군도의 고구려인들은 용맹했고 어떻게 싸워야 이기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현대 장산군도에 이르러 고려성지를 바라볼 때 이들이 나라가 망한 후 설인귀의 설득에 씁쓸히 섬을 버리고 뭍으로 강제 이주당해야만 했던 역사는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제 더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뭐라는 거야? 야 조카 너 당장 대장기 내리고 배 다시 바꿔.”
승리한 덕분인지 잠시 감상에 빠질 때 연수진이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거 원래 내 배였잖아!”
느린 평저선 판옥선이 불편했는지 연수진은 대뜸 나와 바꾼 첨저선 판옥선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꾸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는지.
“배를 다시 바꿔 주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대장기는 드릴 수 없습니다.”
“뭐, 뭐야? 대장기는 당연히 나한테 주는 거지. 원래 내 건데.”
“지금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뭐, 뭔데?!”
“내기 저한테 지셨잖아요?”
“너, 너한테 지긴 누가 졌다고! 내가 격침시킨 당선이 몇 척인데…….”
버벅대며 말끝을 흐리는 연수진은 이미 스스로 알고 있다.
“몇 척인데요?”
“그, 그건…….”
각기 본대와 별대를 맞아 승리를 거둔 두 장수 중 누가 더 많은 수의 적을 섬멸했는가에 대한 질문은 장산군도의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인정할 수 없어! 너는 내 수군을 거닐고 적의 본대와 싸웠잖아. 이건 불공평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렇게 되물었고 그때 장산군도의 군관들이 외쳤다.
“우리 수군은 남산 중리대형의 지휘로 고려성지에서 대석을 날리고 기름을 퍼부어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적장의 수급을 벤 장수 또한 남산 중리대형이 지휘하는 삼기군의 장수였습니다!”
“적장의 수급을 장대에 올려 적선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게 한 것도 남산 중리대형이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했던 바가 아니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나한테…….”
이에 연수진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극에 달해 있었고.
“왕명입니다! 더는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옥소가 보장왕의 칙서까지 펼치며 확인사살을 하자 연수진은 그제야 물러섰다.
“칫!”
나는 불만을 품을지 모를 연수진에게 다가갔다.
“적을 목적에 두고 더 이상의 분란은 무의미합니다. 작은고모님의 활약은 제가 기억해 두고 있으니 아버님과 태왕 폐하께 전할 것입니다. 지금은 저를 따라주십시오.”
“뭐, 뭐야 갑자기?”
나는 최대한 무릎까지 굽히며 예를 다했다. 당나라 적선을 상대로 연수진의 불만과 석성 수군의 이탈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주군.”
“도련님.”
“작은 막리지.”
그 행동에 연수진뿐만 아니라 설인귀, 옥소, 걸걸중상, 그리고 장산군도의 군관들 역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 표정들이었으나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1000년 뒤 조선이 오랑캐라 멸시했던 여진족의 수장 누르하치. 그의 여덟 번째 아들은 아버지가 죽고 차기 칸에 오르는 즉위식 날 그 위의 형제들과 혈육들에 앞에 큰절을 올리며 평생을 모시기로 천명했다.
내가 상상하는 차기 대막리지의 모습은 아마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 * *
“청구도행군대총관(靑丘道行軍大摠管) 설만철(薛萬徹)로부터 어찌 연통이 여태 없는 것이냐? 짐의 계책이 통하였다면 묘도군도(廟島群島)는 지금쯤 짐의 것이 되어있어야 하거늘.”
오랜 시간 준비해 온 바다 원정을 보다 면밀하게 보고받기 위해 등주(登州)로 이동한 이세민은 동쪽의 요동만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