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만천과해지계 (5)
“고구려가 야전을 대비한 기마병을 요동에 배치하였다?”
“계필하력 전군총관(前軍總管)이 패퇴하여 급히 이곳으로 돌아오고 있사옵니다! 대총관.”
계필하력에 이어 요동에 침투하려던 아사나사이는 계필하력이 요하를 건너자마자 고구려 기병의 습격에 괴멸을 당했다는 완악을 금치 못할 소식을 접했다. 고구려군이 요동에 매복해 있을지 모를 불안감에 서둘러 말머리를 돌려 이적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하얗게 변색된 수염을 늘어뜨린 이적이 미간을 좁혔다.
“요동에 기마대라, 개금이 보낸 군사였다던가?”
“척후병을 보내 살피게 한 바로는 말갈과 고구려 혼종들이었다 하였습니다!”
그 보고에 이적은 턱을 그러쥐고는 침음을 흘렸다.
‘천자께서 유목민들을 고구려와 떼어 내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이셨거늘, 요서에는 거란과 돌궐 부족이 상당수 당나라의 등을 돌렸고 요동에는 그토록 회유하려 했던 말갈이 우리를 거부하고 고구려의 창을 자처하다니!’
고구려인들과 다르게 말갈 놈들은 포로로 잡을 때마다 구덩이에 파묻으라는 황제의 특명은 그들을 경멸하며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있는가에 대한 이세민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오죽하면 안시성에 나타난 말갈 부대를 보며 천자의 입에서 직접 두렵다는 말이 나왔을까.
“흐음, 이를 어찌할꼬.”
17세로 수나라를 무너뜨리는 농민 봉기에 가담한 이래 전장에서 30년 넘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적 정도쯤 되는 무인이라면 중원 인근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유목민들의 전투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말과 글을 배우기에 앞서 걸음마와 함께 기마부터 배운다는 그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기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훈련에 따라 기마한 채로 다양한 병장기를 다루는 것이 가능했다. 농경문화가 중심인 남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전투 민족들인 셈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천하 위에 군림하는 황제였다.
“답답하구만. 천하를 통일한 우리 당나라가 동이족 오랑캐들을 교란하는 것조차 벌이는 일이 이리도 어려워졌단 말인가!”
소모전(消耗戰). 큰 전쟁에서 작은 전쟁으로 변모한 대고구려 전략은 그들을 끊임없이 지치게 만들어 기회를 엿봐 한 번에 고구려를 장악하려는 천자의 의중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기동력이 탁월한 유목민들이 고구려의 창과 방패를 자처하고 나선다면 이마저도 쉽게 전개할 수 있는 계책이 아니었다.
지난 전쟁 이후 고구려의 반격에 요서를 상실한 대가는 이처럼 당나라를 따르려는 이민족들의 이반을 낳고만 것이다.
“개, 개금의 아들이 다시 요동에 나타났소이다!”
아사나사이가 보낸 돌궐계 용병들의 호위를 받고 돌아온 계필하력이 회원진 부근에 진을 진 당나라 진영에 들어서자마자 그렇게 외쳤다. 그를 따른 5천 기 가운데 요하를 건너 살아 돌아온 군사는 4백이 채 이르지 못했다.
“연남산이 요동 땅에 와 있단 말이냐?”
이적의 물음에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복귀한 계필하력이 먼지투성이의 갑주에 손을 얹으며 허리를 굽혔다.
“그렇습니다! 대총관. 틀림없이 요동성에서 황제 폐하와 우리를 우롱한 그 연개소문의 아들이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는 입을 파르르 떨며 내뱉는 계필하력의 보고에 이적은 회원진과 요하 동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양만춘, 연남산!”
현재 요서와 요동에 나타난 고구려 지휘관이 수년 전 안시성에서 천자의 진군을 막아 오늘의 어려움을 있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놈들의 기동력과 활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선봉에는 황상을 배신한 설인귀라는 자도 있었사옵니다!”
계필하력은 설인귀를 빼놓지 않았다. 무예가 출중하여 고구려군 가운데 가장 선봉에 서서 폭풍처럼 활시위를 당겨 자신을 지키는 호위대들을 쓰러뜨린 괴물이었다. 착용한 명광개(明光鎧)와 개갑(鎧甲)이 놈의 화살에 산산조각이 날 만큼 크게 뻥 뚫렸기 때문이다.
“대총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양만춘이 대총관을 찾고 있습니다!”
군졸의 보고에 이적이 급히 천막에서 나와 보았고 회원진 성벽에는 과연 양만춘이 진한 눈매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적 장군! 이만하면 그대의 주군을 위해 잘 싸웠소이다. 슬슬 군량미도 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만 만족하고 돌아가심이 어떠오? 내 이세민이 준 비단 석 필을 그대를 위해 남겨놓았소이다.”
“고구려가 먼저 휴전을 제의하고 당나라가 수긍하여 우리의 체면을 살려주겠다?”
저 자세로 나오는 양만춘의 발언에는 세 가지 의도가 실려 있었다. 하나는 조금 전 이적이 되물은 체면치레였고, 둘은 잦은 원정으로 지친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자 했다. 셋은 이적의 반응에 따라 그를 이세민과의 이간시키려 했다.
“그렇게 믿는 게 편한다면 그리하셔도 좋소이다!”
이세민과 당나라 무장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이적이나, 당나라 내부를 살펴본 바로는 이세민이 그가 다음 후계자가 될 태자 이치에게 충성을 다할지 의문스럽다는 이야기들이 암암리에 떠돌았다.
‘저 이적만 없어진다면, 고구려는 우환거리 하나를 제거하는 게 될 것이야.’
이적이 이를 수락한다거나 말실수를 한다면 양만춘은 이를 꼬투리 잡아 이세민과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닥치거라! 내가 을지문덕의 계책에 속은 우중문이라 보느냐? 이곳에 있는 네놈이나 요동에 있는 연남산이나 내 기필코 사지를 찢어 천자께 바칠 것이다!”
양만춘의 좋지 못한 의도를 직감적으로 읽은 이적이 막말을 끝으로 다시 천막으로 돌아갔고, 아쉬워하는 양만춘은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드, 들으셨습니까? 대모달. 남산 공자께서 요동에 오신 모양입니다.”
“나도 들었다. 우리를 우회해 요하를 넘은 계필하력이 천산산맥을 넘지 못하고 돌아온 이유가 있었구나.”
양만춘은 당나라군의 움직임을 주도면밀하게 살폈고, 영주 지방을 지키는 고돌발에 따로 요청하면서까지 그들을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요동 곳곳으로 퍼진 당나라 놈들이 대놓고 노략질을 자행한다면 그들을 추격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고 자칫 요동의 민생이 도탄에 빠질 수 있었다.
“남산이가 때마침 와주어 다행이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분개하는 이적의 뒷모습을 보며 양만춘은 그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 * *
“삼─기─군 만─세! 고─구─려 만─세!”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간신히 참아낸 나는 눈을 딱 감고 오로지 군사들의 사기만을 생각하며 큰 손동작으로 비도를 하늘 높이 뻗어 목청껏 소리쳤다.
와아아아!
그러자 일제히 시선을 내게 모은 삼기군이 마찬가지로 무구들을 크게 올려 흔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고구려군 만세!”
“삼기군 만세!”
국지전 격인 전투였으나 앞으로 소문을 퍼뜨려 줄 요동 백성들 앞에서 삼기군의 요동 진출과 첫 승리를 자축하는 의식은 실로 중요했다. 우산국과 가야를 정벌했다고 도성과 요동에서 삼기군을 인정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 뭐 지금은 태왕이 좋게 말해 주니 같이 옆에서 칭찬할지 몰라도 그들의 출생이 고구려·말갈 혼종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안 지배계층들은 연정토와 같이 곧 다시 외면하려 들 것이 뻔하다.
그러므로 요동과 중앙 정부의 제대로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는 요동에서의 전공이 필수였다. 당나라를 상대로 전공을 세우는 것보다 고구려 사람에게 인정받는 길은 찾기 힘들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연개소문, 선도해 그리고 소부손 같은 고구려 조정의 핵심인물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삼기군과 기쁜 순간을 나눈 것도 잠시, 이내 시선을 돌리자 걸걸중상과 함께 계필하력을 요하 너머로 날려버리고 돌아온 옥소가 전리품들을 가지고 오며 자랑스러워했다.
“계필하력은 아쉽게도 놓쳤으나 그 휘하의 3천을 참하고 노획한 두모(頭牟), 명광개(明光鎧)가 각각 1백 벌, 마필이 1천 필입니다. 도련님.”
“개갑(鎧甲) 3백 벌과 양당갑(裲襠甲) 1백 벌도 같이 노획했습니다! 작은 막리지.”
두 사람이 군사들과 함께 가져온 주된 노획품들은 투구와 갑주로 흔히 당나라의 정예들이 착용하는 물건들이었다.
쇠붙이를 겉에 붙여 지은 갑옷으로 철개(鐵鎧)인 명광개(明光鎧)는 착용한 군사들을 철맹수(鐵猛獸)라 부른다 할 만큼 내구성이 좋았고, 쇠로 된 미늘을 달아 만든 갑주인 개갑(鎧甲)과 당나라 투구의 일종인 두모(頭牟)는 무겁지 않을뿐더러 체격에 따라 사이즈가 나누어져 있으며 당나라 군사들 가운데서도 100명 가운데 8명 정도만이 착용했다고 알려진 귀한 장비들이었다.
계필하력을 총애하는 이세민이 큰마음 먹고 그를 따르는 군사들의 뒤를 봐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획품들의 가치는 높았다.
‘이런 것을 두고 운 좋은 득템이라고나 할까.’
노략질하려는 놈들을 공격해 갑주를 도로 빼앗는 모양새가 영 이상했지만, 그간 변변치 못한 차림의 삼기군을 한꺼번에 무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졌따.
“사냥을 나서는 삼기의 원칙대로 가장 용감하게 싸운 이들을 가려 나누어주거라. 몸에 맞지 않는 이들은 굳이 착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에이~ 설마 갑주와 투구를 마다하는 멍청이가 나올까요?”
승리에 도취한 건지 걸걸중상이 내 말에 딴지를 걸었고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건 걸걸이 네 생각이고. 기사술에 핵심은 기동성이며 몸이 가벼워야 하지 않니? 군사들마다 편함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것이니 몸이 불편하다면 그건 맞지 않는 것일 게다.”
“아아, 그건 그렇겠습니다. 하하.”
걸걸중상은 금세 수긍하며 뒷머리를 털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장비가 좋으면 흔히들 전투력이 같이 올라갈 것이라고 믿는 개념이 고대 전쟁을 치르는 당사자들의 상식일지 모르나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기사술로 천하를 휩쓴 칭기즈칸의 만구다이 기동부대는 기사술의 정확도와 피로하지 않을 먼 원정을 위해 최소한의 내구성만을 생각하며 출정했다. 그것이 몽골 기병이 2차 세계 대전 군사들의 행군보다 하루에 최대 5배 이상 높은 수치에 해당하는 160km 이상을 달리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저 서쪽의 중원에서부터 골짜기나 비포장도로였던 유럽의 헝가리까지 몽골의 속달 파발꾼이 열흘 안에 도착한 일화는 실로 그들의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 준 일화였다.
그러니 기동력이 빠진 기사술은 향신료 없는 양고기이고 지금 내가 씹고 있는 이 단무지 빠진 김밥이나 마찬가지였다.
“웬 놈들이냐?!”
그때 산맥을 타고 나타난 무리를 발견한 옥소가 외쳤다.
“여어, 활을 거두시구려. 아군이외다!”
찰갑무사의 찰갑주와 투구 정상에 높은 간주를 세우고 장식으로 우산 모양의 검정색 상모를 단 복색은 그들이 엄연히 고구려 무장이라는 증거였고, 무리들 가운데 가장 앞서서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를 내는 털북숭이 인상은 나나 걸걸중상, 그리고 옥소를 거의 동시에 놀라게 했다.
“그대는 처려근지(處閭近支)가 아닙니까?”
“오랜만입니다.”
“어찌 된 것입니까? 영주에 머물고 계시다 들었는데.”
“대모달의 명을 받아 북 요동에 침투한 당나라 놈들을 소탕하고 이곳까지 내려왔습니다. 다행히 작은 막리지께서 와 계시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내가 생포한 당나라 포로들을 둘러보는 이는 계필하력 하면 빠질 수 없는 고구려의 맞수 고돌발이었다.
슬슬 때가 되어 다시 배를 타야 했는데 잘 되었다. 고당 전쟁으로 경험치를 크게 쌓은 고돌발이라면 요동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 * *
“당나라 놈들이 물러간다!”
“오늘은 저 두 척이 물고기 밥이 되겠구만.”
“참으로 질긴 놈들이외다! 이것으로 대체 몇 번째인지, 이젠 세는 것도 지겹소이다!”
묘도열도 해협에 침몰한 당나라 배를 바라보는 제장들의 표정에는 더는 승리의 환희를 만끽한다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100일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곳 묘도열도를 오르려 한 당나라 놈들이었다.
“오늘로서 149척.”
연수영은 지난 3개월간 격침시킨 당나라 전선의 규모와 그간 비슷했던 승리 과정을 하나하나 장계에 적어 내려갔다.
‘놈들의 용병술이 너무도 단조로워.’
이쯤 되면 지겨워서라도 전선의 운용에 변화를 줄 법도 했으나 당나라 수군은 이상하리만큼 같은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내일도 다시 이곳에 나타날까?’
그러나 마음속 어디선가 느껴지는 찝찝함은 어느덧 연수영의 정신마저 지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