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금의환향 (1)
“신국 화백회의의 주재자이신 상대등이십니다.”
염종의 소개에 나는 비담과 첫 대면을 가지게 되었다. 옥소와 걸사비우로부터 비담을 따르는 신라인들이 협력하여 김해를 지켰다는 얘기는 조금 전 전달받았다. 그들은 내가 의도한 대로 서라벌 신라 정규군을 묶어두며 충실히 시간을 벌었다. 그 덕분에 유유히 남해로 내려온 가야도행군은 이곳 낙동강 하구에 무사히 진입하여 큰 전투 없이 옛 가야의 6할에 해당하는 영역을 취할 수 있었다.
가야를 빼앗긴 데다 반역의 수괴를 놓친 신라로서는 아마도 적지않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 내가 없는 틈을 노려 추후 김춘추와 김유신이 비담의 송환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지만, 신라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비담이 우리 쪽에 있는 것은 실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내가 생각했던 때보다 더 빠르게 김흠순이 김해를 기습 공격하였을 때 발동하였다. 결과적으로 신라 장수의 전투 방식을 기억하고 있는 비담과 그의 휘하들이 가야를 지키는 데 일조한 것이다.
“이제 더는 신라와 상관이 없을 텐데요? 화백회의의 주재자니, 최고 관등이니, 신라 귀족을 대표하는 존재니, 더 의미도 없을 거고요.”
비담을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한 나는 아직 그를 온전히 고구려에 귀부하였다 속단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비담은 신라의 반역자였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백제와 마찬가지의 상황일 뿐이었다.
“너는 이만 물러가거라.”
“예에. 담소 잘 나누십시오.”
비담의 눈치에 염종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러갔다. 꼭 시키지도 않은 말을 꺼내서 혼나는 부하직원 같았다.
“남산 공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소이다. 나는 더는 화백회의의 수장 상대등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신라의 반역자가 되었고 그토록 증오하던 가야에 몸을 위탁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보면 이보다 슬픈 운명은 없겠지요.”
“많이 외로워 보이십니다. 신라의 왕이 되지 못해 그리 분한 것입니까?”
“왕이라? 하하핫! 그대는 나 비담이 고작 신국의 왕이 되고자 거사를 일으켰다 보시오? 나와는 다르게 반역에 성공하여 천하에 더할 나위 없이 큰 부귀를 누리는 대고구려의 역신 연개소문, 그 아들이 말이오?”
스르릉, 그때 나를 호위하는 옥소가 대뜸 칼을 쩔꺽하며 칼집에서 뽑아 비담의 목을 향해 겨누었다.
“도련님께, 아니 그 이상 한마디 더 대총관을 모독하는 말을 내뱉는다면 비담 당신이 아무리 우릴 도와주었다 한들 내 이 칼로 베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살벌하게 눈을 뜬 옥소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비담의 말은 딱히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비담은 실패하여 역적이 되었고, 연개소문은 정변에 성공하여 대막리지로서 고구려에서 가장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나는 괜찮으니 이만 칼을 거두거라.”
연개소문의 정변은 이제 겨우 성년인 옥소에게도 실로 민감한 사안이었음을 알고 있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의 뒤를 봐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자가 지금 도련님께 모독하는 말을……!”
그런데 저 분노는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나 때문이었다.
“나는 괜찮대도.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을 거니까 썩 거두거라.”
그 말에 이내 옥소가 못마땅하듯 칼을 천천히 내렸고, 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비담을 향해 말했다.
“백제 의자왕이 내게 같은 말을 하였더이다. 모르긴 몰라도 신라의 여주나 김춘추, 김유신 같은 자들도 조금 전 비담 공의 말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어디 그들만 그리 생각하겠습니까? 내 요동성에서 만난 당주 이세민과 그 휘하 무장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지요. 한데 그리 나를 향해 껄껄 웃던 그들이 어찌되었단 말입니까?”
“……?”
“그들이 안시성에서 서토로 도망가는 꼴을 비담 공께서 꼭 보셨어야 하는 건데.”
“…….”
어느새 웃던 비담의 얼굴은 사라지고 그는 정색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늘 아래 제 아버님이신 대막리지에 대한 평가가 세상 인심 속에 각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역사는 이보다 더 냉혹할지도 모르지요. 하나 조금만 달리 본다면 북쪽에 고구려가 굳건히 버티고 있기에 신라와 백제와 같은 삼한의 백성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아시리리 믿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중원의 패권을 거머쥔 당나라와 호시탐탐 남쪽의 비옥한 땅을 노리는 북방의 이민족들이 삼한 땅에서 횡포를 부리는 것을 좌시하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영류왕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삼한을 뒤흔들며 영향력을 행세하려는 당나라에 굴종을 하는 것도 거부하지 않았으니 연개소문과는 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정변 이후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후 유교 문화가 사회 곳곳에 침투하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아예 임금을 죽인 역적으로 뿌리 깊이 박제하였다.
그러나 이후 중국의 황제들은 천하의 성군 이세민의 행보를 궁금해하며 신하들에게 종종 이렇게 묻곤 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어찌하여 승리하지 못하였는가?’ 신하가 말하길, ‘개소문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가 연개소문을 크게 평가한 것이다.
한반도는 일제에 침탈당한 20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자주 의식을 가진 연개소문을 재조명했다.
민족의 방파제인 고구려가 없는 미래 한반도의 왕조는 거란, 여진, 몽골, 홍건적, 청나라 등 북방 이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으며 온 국토가 피폐해지는 운명을 맞이했으니까.
“광개토태왕께서는 신라에 내침한 왜마저 격파하셨으니 우리 고구려는 북방의 이민족뿐만 아니라 삼한을 위협할 어떠한 위험요소들을 좌시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고구려의 은혜를 받은 신라는 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이민족들의 위험을 모르는 신라 사람인 당신이 호태왕의 기상을 이어받은 고구려 사람을 함부로 평할 자격이 되는 것입니까?”
얼마간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 비담은 이내 한참이나 껄껄 웃었다.
“내 여주에게도 듣지 않은 꾸중을 아주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이거 임금의 재목은 내가 아니라 그대였구려.”
“누가 들으면 오해할 발언이십니다.”
“아아, 여주가 이리 갑작스레 떠나니 참으로 허무한 인생이도다.”
잠시 후 상체를 돌린 비담은 그리 떠들며 품에서 꺼낸 신라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지나갔다.
원 역사와 달라진 비담의 운명은 바뀌었고, 이후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내가 통제할 것도 없이 온전히 그에게 달렸다. 내 바람은 비담이 부디 가야 땅에 무사히 정착해 신라를 흔들 고구려의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변한 지역의 가야 때처럼 지금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진한 땅을 통제하는 데 용이하게 될 테니까. 나는 몇 수 뒤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대막리지의 명으로 가야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까지 오면서 남산 중리소형의 활약을 들었습니다만,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거친 동쪽 바다를 거쳐 이곳까지 이르셨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검모잠과 고구려 원병이 길게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김해에 이르렀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구실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먼저 군사들부터 쉬게 하시지요.”
“고맙습니다.”
검모잠이 가야에 온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평가하자면 정확히 반반이었다. 내가 믿고 맡기며 돌아갈 수 있겠으나 당나라와 해전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 이때에 바다에 일가견이 있는 장수가 남쪽에 내려온 것이 바람직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검모잠이 아니었다면 원양을 하는 것은 어려웠을 테지.’
고구려가 오늘날처럼 원양을 나섰던 역사는 200년도 더 지난 과거였다.
“이 먼바다를 돌아 적의 허를 찌를 생각을 하셨다니, 직접 와 보니 알겠습니다.”
고구려는 근해에서 해전을 치르며 지키는 전투 방식에 익숙한 반면 역으로 공격하는 방식은 낯설었다. 그래서 검모잠은 나를 향해 그 부분을 치켜세워 주고 있는 것이다.
“남쪽은 흙과 산이 많으니 적이 몰려온다면 참호를 파고 지키십시오. 낙동강을 통한다면 바다를 이용하는 것도 능히 가능할 것입니다.”
나는 가야를 떠나기 전 그에게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말과 글을 동원해 전수시키고자 노력했다. 가야의 인물들과 신라에서 온 세력들, 대마도 금은광, 신라와 백제의 요주인물들, 가야 지형, 새 문자 등 가능한 많은 것을 전해주고자 했다.
“이 많은 것을 저를 위해 준비하셨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제게 믿고 맡겨 주십시오! 말씀해 주신 사안을 명심하여 이곳 사람들과 상의하며 지켜나가겠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했던 부흥운동가 검모잠은 유민들을 결합할 정도의 리더십과 통합력을 발휘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곳 가야에서 고구려 유민이 아니라 가야, 신라의 세력들을 고구려에 결합해 새로운 문화를 피우게 할 것이다.
* * *
“안시성에서 공을 세운 대모달 양만춘이 요동과 요서를 아우르며 지키니 내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당의 황제가 고구려에 복속하기로 한 거란과 돌궐 유민을 비단으로 회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대막리지께서 이에 대한 고견이 있으신지요?”
어전 회의가 시작하자마자 보장왕이 화두를 던졌다. 대모달 양만춘이 요서 수복을 내건 이세적과 소정방이 이끄는 10만의 대병과 대적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이민족들을 이세민이 직접 회유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안학궁과 고구려 조정에 불안한 분위기가 엄습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표정은 극도로 태연했다.
“그것은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태왕 폐하.”
“무슨 대비가 있으신 겁니까?”
“대비라 할 것도 없이 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노리는 이세민이의 이간책(離間策)이옵니다. 양만춘과 이민족들에게는 생해를 통해 따로 전하라 일러두었으니 혹여 그들이 오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요서를 하루속히 되찾고자 하는 이세민의 속내를 읽었다. 천가한(天可汗)이라는 북방 민족의 패자(霸者)를 뜻하는 지위를 이용해 고구려에 귀부하려는 이민족들을 차례차례 다시 빼앗아가려 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등을 돌려 당나라의 재물을 쫓고자 참천가한도(參天可汗道)라 이르는 당나라 무역로로 나아간다면 고구려로서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
‘남산이가 그놈들에게 먹일 재물을 구해오지 않았다면 기껏 얻은 새 영토가 곧바로 위태로울 뻔하였어.‘
도성 곳간에 채워진 재물을 서쪽으로 보낸 연개소문은 안심했다.
이세민이 그리했던 것처럼 이민족들을 회유하는 길은 결국 재물밖에 없었다. 힘으로 잠시 굴복시킬지언정 결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이세민을 쫓아 고구려로 몰려온 그 많은 이민족이 그저 이세민에 충성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하기 위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급한 것은 뱃길입니다! 비사성 연안과 발해만에 출몰하는 당나라 배가 하루에만 7척에서 20척에 달한다는 소식입니다. 성을 노린다기보다 노략질만 하고 도주한다지요. 번번이 우리 해역의 습격을 방관하는 태대사자를 문책하심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저들의 대규모 전선이 도성으로 몰려오지 않도록 태대사자에게 만반의 대비를 갖추라 교지를 내리셔야 할 것입니다!”
연정토와 부기원의 윽박에 보장왕이 불안한 눈빛으로 연개소문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과 다르게 연개소문의 눈썹이 몹시 찌그러졌다.
바다를 이용한 전술은 적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연개소문 역시 좀처럼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을 때 밖에서 소식을 전해 듣고 온 전령이 급히 어전으로 들어왔다.
“남산 중리소형께서 도성에 도착하셨습니다!”
연개소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 난국을 타개할지 모를 녀석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