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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88화 (88/335)

88화 삼국회담 (2)

“고구려와 대화라니요?! 저들은 가야를 도둑질하고 죽령을 강탈한 도적들이옵니다! 신국이 도적과 협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즉각 철회해 주십시오!”

김유신은 김춘추의 결정에 강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가야와 죽령을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고구려와 협상은 신라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 자리에 대야성을 훔친 백제 의자왕까지 끌어들인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의구심만 들게 하는 일이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대장군. 대야성을 잃은 직후 우리 신국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진흥제 때 넓힌 서쪽 국경 200리를 상실했고, 북쪽은 고구려의 위협에 어디 하나 안심할 곳이 없습니다. 신국의 동쪽 바다는 고구려에 내주었으며 오늘날에는 가야와 죽령마저 빼앗겼습니다. 이제는 이곳 남쪽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힘을 모아 신국을 제압하려 하니 다른 방도를 강구하여야 합니다.”

맏딸과 사위의 유골을 되찾은 김춘추는 비로소 현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원수 백제를 멸하기 위해 당나라 대병을 빌려주겠다는 황제 이세민의 약조가 이루어지기 전 당장의 위기를 넘기지 않으면 신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될 처지였다.

“아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동시에 쳐들어오는 것과 그들의 군대가 한곳에 모여 우리 신국과 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깁니다. 하물며 가야의 민심마저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들었습니다.”

법민이 아버지 김춘추에게 동조했다. 그는 김춘추가 동생 인문과 함께 당나라 사신으로 떠날 무렵 서라벌에서 여주 옆에 남아 그간의 사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저 한낱 해적들의 침입으로만 치부했던 고구려가 상대등 비담의 반군을 지원하였고, 가야를 차례차례 장악하며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그 탓에 신라에 남은 가야는 이제 추풍령 일대의 벽진가야(=성산가야)만이 유일했다.

“대장군께서 가야를 얼마나 각별히 여기고 계시는지 잘 압니다. 하나 지금 나는 여주께 전권을 위임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그간의 상황을 충분히 살펴본 바 저들과 대화를 하는 것에 결론이 이르렀으니 일단은 따라주십시오.”

당나라에서 귀국한 김춘추는 신라의 사정을 하나하나 되짚어봐야만 했다. 반군을 진압한 김유신이 나서준다면 가야를 금세 되찾을 것이라는 모두의 기대와 다르게 고구려군은 만만하지 않았다. 천하의 김유신이 화왕산에서 웅거하는 연개소문의 아들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벌판에서 벌인 야전에서도 패해 비사벌군의 북쪽으로 밀려났다. 김춘추는 그 후에 온 것이었고 사기가 떨어진 신라군에 육화진법을 전수했지만, 백제군까지 합류한 고구려 연합군에 밀리는 모습을 몸소 지켜봐야만 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남쪽에는 제 아우가 가 있습니다. 금관군을 되찾았다는 승전고만 울린다면, 비사벌군에 주둔한 고구려 도적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일 것입니다!”

김유신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었다. 아우 흠순이 금관군을 장악해 적의 퇴로를 끊는다면 비사벌군의 어려움을 전화위복(轉禍爲福)으로 삼아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김춘추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미 저도 알고 있습니다. 금관군으로 간 흠순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요.”

“뭐라고요?!”

“내 이번 회담을 열고자 하는 것은 여러 정황을 둘러보고 결정하였습니다. 곧 흠순에게도 기별이 갈 것입니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아우 김흠순으로 하여 남쪽의 금관군을 기습 명령하였음을 들었다. 그러나 열흘이 넘도록 승전보가 들려오고 있지 않았다. 남쪽에도 이곳 못지않은 용맹스러운 고구려 군사가 대비가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다시 출정하겠습니다.”

“백제왕과 고구려와 동시에 싸울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저를 따라주십시오! 대장군.”

김춘추의 단호함에 김유신은 휙 고개를 틀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가야를 고구려에 내준다는 것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가야의 한 점이라도 고구려에 양보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춘추 공의 부탁일지라도 저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 대장군!”

김춘추의 부름에도 김유신은 화를 참지 못하고 곧장 막사를 빠져나왔다. 가야를 기반으로 성장한 김유신 가문에게 있어 가야의 상실은 그간 신라를 위해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음이다.

“가야가 없고서야 어찌 내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김유신은 고구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다.

* * *

[지금 비사벌군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대병이 출몰하여 우리 고구려와 어라하의 나라인 백제를 위협하고 있으니 달솔 계백은 내 요구지침에 따라 군사를 파병해 공수(共守)한 것입니다. 만일 이를 거부하였다면 백제가 지난날 우리와의 약조를 져버리고 신라와 휴전을 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백제를 치고자 했으니 계백이 군사를 파병한 것은 어라하를 위한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정은 이러하니 어라하께서는 김유신에 버금가는 백제 장수를 크게 쓰도록 하여 그대의 나라의 국경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동쪽 비사벌군과 맞닿은 낙동강에 이르자 의자왕은 계백이 가져왔다는 연개소문 아들이 보낸 서신을 재차 읽어내려갔다. 그러고는 은고, 성충, 흥수 등 측근들에게 그 서신을 읽어 볼 수 있도록 건네주었다.

“김유신에 버금간다라? 연개소문의 아들이 계백을 높게 평가하고 있구나.”

“보십시오! 어라하. 이는 대야성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한 계백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어라하의 재가를 핑계로 시일을 미루었다면 고구려의 말발굽은 신라가 아니라 우리 백제에 향했을 것입니다.”

“어라하께서는 계백의 충심을 의심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근신 처분은 철회하심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흥수와 성충의 연이은 변호에 은고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아니 될 일입니다!”

“아니 될 일이라니요?”

“이상한 것이 있지를 않습니까?”

“이상하다니, 대체 어느 부분이 군대부인의 눈에 그리 이상하단 말입니까?”

또 어떤 트집을 잡나 싶어 신경을 곤두세운 흥수가 공격적으로 물었고, 은고가 샛눈으로 지적했다.

“제가 듣기에 비사벌군에 온 가야도행군대총관이라는 자는 연개소문의 삼남으로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어린아이라 하였습니다. 그런 어린아이가 어찌 그 같은 서신을 달솔 계백에게 쥐여 보내 어라하의 성심을 어지럽힌단 말입니까?”

은고의 의심에 의자왕의 시선이 성충과 흥수에게 향했다.

“그게 사실이냐? 남쪽으로 내려온 연개소문의 아들이 아직 성년례도 치르지 않은 아이라?”

“크흠! 그것은…….”

“그렇사옵니다. 어라하.”

흥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성충이 대신 대답했다.

삼국의 귀족 자제들은 왕실의 전통을 이어받아 통상 10세에서 15세 사이에 관복을 입으며 성년식을 행했다. 연개소문은 제 나라 왕을 죽이며 집권하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장남 남생이 9세에 이르렀을 때 선인의 벼슬을 내려 1년 후 고구려 복남 태자와 함께 일찍이 성년례를 치르게 하였다. 그 연개소문의 삼남 남산은 요동에서의 공으로 벼슬을 받았으나 과연 은고의 말대로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서신은 조작된 것이란 말이냐?”

“그것은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연개소문의 삼남 연남산은 동쪽의 망망대해와도 같던 바다를 가로질러 우산국을 취하고 이 먼 남쪽까지 항해한 인물입니다. 그 김유신조차 고전하였으며 한낱 어린아이로 치부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충은 말은 제가 보장합니다! 어라하.”

성충과 흥수는 안학궁 사신 접대실에서 연남산과 독대한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고구려는 신라를 정벌할 것입니다.

그 작은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의자왕의 변심으로 과정은 조금 달랐으나 바다를 통해 가야를 정벌한다는 남산의 계책 역시 적중했다. 그리고 지금은 직접 바다를 통해 가야 정벌을 진두지휘했다.

“그러고 보니 그대들이 고구려에서 돌아왔을 때 한참 연남산에 대해 떠들었구나. 고구려로 떠나기 전에는 요동의 안시성에서의 활약이 있었다 하였고.”

의자왕이 뒤늦게 지난날의 기억을 살렸고, 성충과 흥수가 잇달아 충언했다.

“이세민을 쫓아 중원까지 간 그 연개소문의 아들이옵니다.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닐 것입니다.”

“적으로 돌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 은고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눈을 뜨고 있었다.

“혹여 다른 실세가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우리 백제가 언제부터 그리 고구려를 잘 알고 있겠습니까?”

“계백과 여기 좌평들이 거짓을 하였는지는 연남산을 만나 보면 알 일이 아니겠느냐?”

의자왕은 그렇게 말하며 은고를 안심시켰다. 그는 김춘추가 요구한 대로 비사벌군의 어느 한 구역에서 열릴 삼국의 회담을 위해 길을 나서고 있었다.

고구려와 신라의 실세를 한자리에서 만나기란 좀처럼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 * *

“굳이 회담 같은 것을 열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비사벌군의 벼와 보리가 나는 곡식 곳간은 우리가 차지하였습니다. 죽령 고개까지 내려온 온사문 장군이 남하한다면 가야 전체를 도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주군.”

“백제의 계백 장군께서는 어디를 가신 겁니까?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한다면 서라벌까지 밀고 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막리지.”

“저희 가야인들의 생각도 같습니다! 대총관. 가야의 배신자 김유신을 베고 서라벌로 가셔야 합니다!”

삼국회담의 위화감을 일으킨 이들은 신라나 백제가 아니라 의외로 아군 진영 쪽이었다. 무주공산과도 같던 가야를 취한 데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몇 차례 전투를 치르며 사기가 바짝 오른 것이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먼저 좌장군의 말에 보충하자면 온사문 장군은 죽령에서 더는 남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 고구려가 죽령을 장악했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신라의 한수 유역과 서라벌을 절단 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서쪽과 동쪽 사이에 고립이 돼 있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더는 원군도 없이 말입니다.”

“그럴 수가!”

설인귀는 그제야 이해했는지 내가 가리킨 지도를 보며 짧게 탄식했다.

신라의 동쪽을 압박하던 뇌음신과 고문이 이끄는 군사들이 빠졌고, 다른 신라 국경에서 잦은 국지전을 일으키며 혼란을 야기하던 우리 군사들도 모두 돌아갔다. 이진충이 이끄는 거란 용병들 역시 이세민의 요서 공략으로 영주 지방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다.

“낙동강 상류의 벽진가야를 제외하고는 고구려와 백제에 손에 가야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가야를 모두 되찾는 것도 좋지만, 서라벌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이상 더 북으로 올라가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제장들에게 안분지족(安分知足), 즉 제 분수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함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이 이상 신라의 영토를 정벌하는 것은 무리라는 얘기였다. 설사 정벌하더라도 지킬 병력이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확보한 영토의 치안과 민생을 안정화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 데다 정비할 틈 없이 신라군과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가야를 정벌한 것은 어디까지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곳을 보다 오래,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야 해.’

일을 벌이는 창업(創業)과 지키는 수성(守城)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는 그 이세민조차 풀지 못한 난제였다.

신라가 북으로 올라올 가능성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가야 정벌은 사실상 성공했다. 이제는 이곳을 지키는 일을 구상하는 것만 남았다.

“대총관의 말씀은 아마도 가야를 수복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자는 뜻일 것입니다.”

몇몇 가야인들은 신라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회담에 대해 줄곧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지만, 나는 의자왕의 참석을 핑계로 비라부를 설득했으며 그가 가야인들을 설득하는 사이 소수의 호위대만을 이끌고 회담장으로 나섰다.

삼국의 대표가 만나게 될 회담장은 비사벌군의 늪지대로 정해졌다. 위치적으로 보나 지형적으로 보나 삼국의 대표가 모이기에 가장 적절했으며 기동력이 뛰어난 기마에 제약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기사병의 위력을 눈앞에서 목격한 김유신이 직접 추천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백제 어라하 행차시오!”

“신라 이찬간 행차시오!”

약속된 시간이 지나자 백제의 의자왕과 신라의 김춘추가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나타났다.

반가운 얼굴인 성충과 흥수가 목례하며 지나갔고, 조금 걱정했던 계백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망부석처럼 섰다. 반대쪽에는 반쯤 흰머리가 섞인 김유신과 신라 무장들이 뱀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가볍게 시선을 돌려 웅장한 천막 앞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상징하는 삼국의 깃발이 펄럭였다.

덩달아 가슴이 뛰었고 불현듯 동쪽 비사벌군 중심지에 세워진 진흥왕의 비석이 떠올랐다.

나는 이 역사적인 회담을 마친 후 이곳에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와 진흥왕척경비(眞興王拓境碑)에 이은 비석을 세워 삼국의 새로운 역사를 기념할 생각이다.

“가야도행군대총관 납시오!”

그리고 그 비석의 이름에는, 아마도 가야와 고구려가 공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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