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영웅집결 (3)
난세를 돌파하기 위해 나선 신라 진골귀족의 금색 의관이 돋보인다.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의 아들인 그는 스스로를 진골이 아닌 성골이라 믿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건 신라의 생존을 건 대당외교의 주역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목마산성에서 내려온 김유신의 행보가 수상했는데 고구려와 백제에 의한 고립보다도 서라벌에서 온 김춘추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그 증거로 눈앞에서 펼쳐진 육화진법(六花陣法)을 들 수 있었다. 보병 6개의 부대를 방진으로 세워 놓고 신라 핵심인물인 김춘추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도록 기병과 함께 가운데 원진 안에 머무르게 했다.
육화진의 방진은 보병의 행동 범위를 설정하기 위해서 방형이 되고, 원진은 기병의 회전 활동을 위해서 원형이 되는 것으로 탁 트인 평야에서 유목민의 공격을 받았을 때를 대비하기 위한 진법을 일컫는다.
육화진법은 당나라 병서인 이위공문대(李衞公問對)를 보고 온 김춘추의 작품이었으며, 김유신은 이를 실행해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저 추측이 아니라 지금 김춘추의 품에 실린 서책은 병서였으며 신라는 후일 이위공문대의 육화진법을 참고하여 자체적으로 육진병법(六陣兵法)을 만들게 된다.
“다시 묻겠습니다. 그대가 고구려 대막리지의 자제분이십니까?”
내가 말을 아끼자 김춘추가 진한 눈썹을 곤두세우며 재차 물었다.
“맞습니다. 하나 이곳에서 아버님의 이름을 빌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고구려국 중리소형, 그리고 가야도행군대총관 연남산일 뿐입니다.”
“중리소형… 가야도행군대총관?!”
그 소개에 열이 받았는지 김춘추 옆에 있던 김유신이 날을 세우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습니다.”
“이런 무험한!”
“여긴 제게 맡기시지요. 대장군.”
내 대답에 김춘추가 눈치껏 김유신의 화를 누그러뜨렸고, 나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먼 가야 땅에서 연개소문이 있는 평양 안학궁까지의 거리는 약 2천 리 길이었다. 가야 정벌은 엄연히 내가 주도한 일이었으며 이들 사이의 연개소문 이름 넉 자가 껴 있다면 그들은 내가 아니라 연개소문과 협상하려 들 것이다. 나는 신라의 핵심 인사인 그들에게 가야 정벌의 주축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가야는 우리 가야도행군이 장악했소이다!”
“진흥제께서 다스린 신국이 대가야를 복속한 이래 신라와 가야가 하나가 된 지 어연 80년이 흘렀습니다. 북쪽의 고구려와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땅입니다. 이만 군사를 물려 돌아가시지요.”
김춘추는 외교의 대가답게 사적인 이야기보다 먼저 국익을 위한 요구를 시도했다. 고구려군과 백제군을 포함한 삼국의 군세가 한곳에 모인 이곳에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모습은 과연 신라를 대표하는 인물다웠다.
하지만 지금 김춘추의 분위기에 빠질 군번이 아니었다.
“신라의 다음 왕위를 이으실 분께서 아직 모르시나 봅니다.”
“모르다니요? 중리소형이 보기에 제가 뭘 모른단 말입니까?”
“낙동강의 금관군은 그 옛날 육가야의 맹주였습니다. 그들이 과거 왜적들과 합심해 신라를 괴롭혔고 그대의 나라가 대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광개토태왕께서 친히 군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왜적을 토벌하였고 금관군을 복속시켰습니다. 가야국의 맹주가 고구려에 머리를 조아리며 노객이 되기를 자처했단 말입니다. 하여 오늘날 나라를 강탈당한 가야인들을 가엾게 여긴 우리의 태왕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를 모르셨습니까?”
“가당치 않은 소립니다! 금관군은 한순간도 고구려에 복속된 적이 없습니다!”
김춘추는 화가 난 김유신을 대신해 언성을 높였다.
“가당치 않다니요? 나라가 위태로워 우리 고구려의 은혜를 받은 신라가 한수 유역을 강탈한 것만큼이나 가당치 않은 이야기가 또 있단 말입니까? 고구려와 백제는 모두 다른 시기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쓱 계백 쪽을 바라보자 그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참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과 구밀복검(口蜜腹劍)을 일삼는 나라가 아닙니까? 신라라는 나라는 실로 추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계백까지 낮은 목소리로 보태자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김춘추는 얼굴을 붉혔다. 함께 일을 도모한 백제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고구려의 은혜를 등에 칼을 꽂는 걸로 대갚음했으니 김춘추는 그런 나라의 후계자가 된 셈이었다.
“신라의 아찬간께서는 즉각 약조를 지키시지요! 안학궁에서 죽령 이북의 땅을 고구려와 태왕 폐하 앞에 바치겠다고 우리 어전에서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이 기세를 몰아 할 말을 꺼냈다. 이미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그가 거짓으로 죽령 이북의 땅을 바치겠다고 한 사례가 있었다.
“대막리지께서 나를 별실에 가두어 칼을 들이미니 내 살기 위해 거짓을 아뢰었소이다! 이에도 문책을 하신다면 내 기꺼이 사죄를 드리지요.”
김춘추는 역정을 내고 화를 낼 상황임에도 의의로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 고구려와 백제를 동시에 상대하는 일은 그가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작은 막리지,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때 걸걸중상이 내게 다가와 살짝 귀띔을 주었다.
미리 준비하라 일러둔 병기들을 잘 배치한 모양이다. 목마산성 아래에는 비화가야인들이 조성한 가야 왕실의 무덤이 즐비했다.
당장 발굴만 시작하면 금동관, 금귀고리, 은장신구, 마구류, 농공구류, 금속용기류, 목기류 그리고 순장한 가야인들의 유골까지 한 트럭이 나올 고분군이었다.
“발포를 명할까요?”
나는 그런 웅장한 무덤 뒤쪽과 인근 숲에 투석기를 설치해 두었다. 공성전을 대비해 가지고 온 무기들이 경사가 가파른 산성이라는 지형적 문제로 제대로 써 볼 일이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움직이거라.”
“예. 작은 막리지.”
조용히 대답을 마친 걸걸중상이 물러갔고, 나는 웃으며 김춘추와 대화를 계속했다.
“사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별실에 유폐를 당하셨다면 오히려 우리 쪽의 사죄를 받으셔야지요.”
“지금 고구려가 제게 사죄를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춘추가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큰 나라 고구려가 작은 나라 신라의 대신에게 사죄를 한다는 것은 연개소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 그렇습니다. 내 그 사죄의 의미로 아찬간이 아끼시는 따님의 유골을 거두어 백제 땅에서 이곳 비사벌군으로 옮겨왔습니다.”
일순 김춘추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가 고구려와 백제에 접해 있는 이 위험한 국경 지역까지 나올 이유는 그것이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됐다.
“지금 제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곳입니다.”
“……!”
“……!”
“……!”
내가 가리키는 검지에 김춘추와 김유신은 물론 신라 진영 인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뜻입니까?”
“이 부근에 고분군(古墳群)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탐색한 김춘추는 이내 역정을 냈다.
“설마, 이곳에 묻었단 말인가!”
순간 계백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신라군의 육화진을 깨기 위한 작전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 *
“춘추 공의 말씀대로 고구려와 백제가 섣불리 공격해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다. 도무지 빈틈이 없는 육화진법(六花陣法)이라, 전장에서 30년 넘게 몸을 담고 있는 저지만 참으로 대단한 진법입니다.”
군사들을 직접 통솔하며 육화진을 펼친 김유신은 스스로가 감탄했다. 빈틈없는 군의 배치에 고구려 백제 연합군의 기세가 한층 꺾인 듯했다. 만일 김춘추가 가져온 진법서가 아니었다면 목마산성에서 완전히 내려올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보유한 고구려군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노련한 계백의 백제군까지 온다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장안에서 뵌 이정 장군에게 간곡히 부탁해 받아온 것입니다.”
“당나라가 자국의 병서를 타국의 사신에게 보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고구려 연개소문의 군사가 신국을 위협하니, 제가 그 절박한 사정을 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내주셨습니다.”
“그랬군요. 제가 듣기로 이정 장군이 만든 육화진법은 제갈공명의 팔진법에 연개소문에게 배운 용병술을 응용한 진법이라 하였습니다. 6개의 행군과 6개의 예하부대, 그리고 지휘관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를 합쳐 꽃잎 모양과 같은 7개의 부대를 이룬다. 품에 항시 7자루의 비도를 소지하는 연개소문과 같지 않습니까?”
김유신은 과거 이와 비슷한 진법을 형성한 연개소문의 조의 부대와 맞선 적이 있었다. 이정은 중원을 유랑했던 연개소문의 제자라 자처했으니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정 장군도 이정 장군이지만 당나라 황제의 은덕이 아니었다면 이를 신라에 가지고 오는 것은 영영 불가능했을 겁니다.”
김춘추는 장안을 나서기 전 이세민이 한 말을 떠올렸다.
-나는 너희 신라가 두 나라로부터 침략당하는 것을 참으로 애닯게 여겼기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들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는 사신이 돌아서자마자 약속을 어기고, 너희 나라를 집어삼켜 땅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는구나. 너희 나라는 어떤 기묘한 꾀로써 나라의 멸망을 면하려고 하는가?
“어찌 답하셨습니까?”
이세민의 날카로운 질문에 김유신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김춘추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백제가 병사를 크게 일으켜 대국에 조회할 길을 막았으니, 천자께서 대국의 병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서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이라 하였지요. 그러더니 기꺼이 병사의 파견을 허락하셨습니다.”
“당나라가 백제에 군사를 보낸단 말입니까?”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내 기필코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대장군.”
입을 닫은 김유신은 외세나 다름없는 중원의 군사가 백제 땅에 이르렀을 때의 파장을 좀처럼 예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일이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으나, 10리 밖에서 흩날리는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깃발을 보았다. 난세를 극복하고 삼한일통의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김춘추의 계략만이 유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대장군께서 제 자식을 거둘 수 있게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고분군으로 시선을 향한 김춘추는 이날 남산을 통해 맏딸 고타소 유골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이는 함정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남산이 어찌 고타소 공주의 유골을 가야인 고분군 사이에 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소년의 눈동자를 보건대, 거짓을 말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겉모습에 속지 마십시오! 연남산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범입니다. 그가 육화진법의 이위공문대를 지은 이정 장군의 스승인 연개소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비사벌군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비화가야의 왕릉을 우리가 헤친다면 가야에 대한 민심은 고구려로 향할 것입니다.”
화왕산성에서 맞붙은 연남산은 과연 연개소문의 아들다웠다. 성을 지키는 방법과 군사를 운용하고 적절히 배치하는 용병술도 꿰고 있었다. 김유신은 우산국을 정벌하고 가야 땅 이곳 깊숙이 들어온 연남산의 계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장군, 내 5년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많았습니다. 고타소 그 어린아이가 내 꿈에도 나왔단 말입니다! ‘아버님, 부디 저를 구해주십시오’하고.”
“…춘추 공.”
“내게 그 마지막을 거둘 기회를 주십시오.”
육화진법을 김유신에게 전수할 정도로 냉철한 김춘추였으나 아픈 손가락이었던 고타소에 한해서는 예외였다.
“대장군! 부디 아버님의 마음을 헤아려주십시오. 제 누이동생이 더 이상 구천을 떠돌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김유신이 회의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자리에 합석해 있던 김춘추의 아들 법민도 거들었다.
그 가여운 넋을 서라벌이 아닌 이런 위험천만한 국경에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
그날 밤 김춘추는 군사들을 보내 내가 가리킨 고분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혹여나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지만, 그토록 몸을 사리던 김춘추가 몸소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진입한 국경 비사벌군에 나타난 이유는 뻔했다.
그리고 이것을 유도한 내 목적은 정확히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분군에서 출토될 금동관, 금·은장신구, 은관장식, 금동관모, 금귀고리 등의 장신구와 각종 마구류, 장식무기류, 비늘갑옷 등 철제무기류, U자형 삽날, 농공구류, 금속용기류, 토기류, 목기류 등의 다량의 출토물을 우리가 확보해 가야를 지킬 자원으로 쓰려는 것이 첫 번째였고, 다른 하나는 가야 왕릉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오명을 이곳에 나타난 고구려가 아니라 온전히 신라에 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고분군의 출토물을 자원으로 활용하시겠다고요?”
“그래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 작은 막리지. 능에서 나온 출토물은 원혼들이 실린 물건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장은 괜시리 두렵습니다.”
내 계획을 들은 설인귀와 걸걸중상이 당황했다. 워낙 토착신앙과 민간신앙이 유행한 고대 시기이다 보니 두려움에 떠는 이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명색이 전장을 누비던 건실한 고구려 장군들이 쫄고 있으니 웃픈 광경이다.
뭐 그렇게 따지면 어린 가야 소녀들이 비화가야의 통치자들과 함께 능 안에 순장돼 있다. 그 소녀들의 한이 오히려 더 안타까울 것이다.
“능을 파헤치고 나온 출토물을 훔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유유히 다시 노획하면 될 뿐이고요.”
원래라면 20세기에 일제에 도굴당해 빼앗길 유물들을 이곳 가야를 지키고 번영케 하는 데 쓰려고 한다. 혹시나 원혼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후손들을 위한 것이니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저런, 저! 신라 놈들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었습니다! 감히 옛 왕가의 능을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다니!”
내가 남쪽에서 부른 비라부가 그간 훈련 시킨 가야인 5백과 함께 비사벌군에 당도했고,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그들이 우리 진영에 합류해 처음 본 것은 역시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고분군을 파헤치는 신라군이었다.
“신라는 역시 가야의 적이었습니다!”
“가야능을 도굴하는 신라 놈들을 몰아내자!”
“가야의 배신자 김유신을 척살하자!”
그들의 반응을 보건대, 가야의 민심이 서서히 고구려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