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태대각간 vs 작은 막리지 (7)
화왕산성은 본디 낙동강을 넘어오는 백제 별동대에 대항해 신라의 후방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동쪽 낙동강을 넘으면 곧바로 질퍽질퍽한 늪지대가 나타나기 때문에 백제군이 굳이 강과 늪을 건너서 경사가 가파른 화왕산까지 올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 비사벌군에 들어서지 않고 조금 더 위로 우회해서 낙동강을 넘는다면 곧바로 서라벌로 향하는 길목이 열리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사정을 살펴볼 때 신라는 5년 전 백제에 대야성을 빼앗긴 실책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 탓에 대야성에 이은 신라의 주력 방어기지는 서라벌에서 더 가깝고 비사벌군에서 북동쪽으로 150리밖에 안 떨어진 달벌성(達伐城)과 압독주(押督州)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백제뿐만이 아니라 우리 신라도 저 산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오늘의 패배가 있는 것이다!”
“면목이 없사옵니다! 대장군.”
“면목이 없사옵니다! 대장군.”
그저 산성 하나에 틀어막혀 웅거하는 고구려군이랍시고 자신 있게 선봉을 달라던 천존과 문충을 비롯한 신라군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성의 견고함에 싸움 한번 제대로 못 한 채 수백의 사상자를 내며 물러서야 했다.
“성을 지키는 자가 어린아이라고 얕볼 것이 아니다!”
김유신은 이 같은 패배가 성을 지키는 자의 외모에 방심한 신라군의 책임을 주된 요인으로 들었다.
‘요동에서의 일이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김유신은 성을 지키는 이가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안시성에서 당나라 황제 이세민의 백만 대군을 상대로 수성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포악하며 철두철미하다고 알려진 연개소문이 이번에는 제 아들을 이 남쪽 원정에 보냈다. 거기에는 틀림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장들에게 맡겨주시옵소서! 날이 밝는 대로 경사가 완만한 벼랑 쪽 성벽을 다시 노려보겠습니다!”
“군사들의 무장이 무거워 둔했다면, 이번에는 방패와 칼을 제외한 병장기와 갑주를 해제하고 돌격하겠습니다!”
좌우 부대를 담당한 김유신 휘하 무장 죽지와 진춘이 의견을 냈고, 김유신은 탁자 위에 펼쳐진 화왕산성의 산세와 지형을 유심히 살펴보며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천존의 첩보였던 적의 규모가 5천이 아니라 6천이 넘었으며 가야인들까지 동원해 각 성문을 틀어막고 있었다.
경사가 가파른 성을 포위해 겹겹이 에워싼들 피로가 쌓이는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군 쪽이었다.
김유신의 시선이 서쪽 평야의 진흥왕 척경비를 향했다.
한차례 전투를 치른 김유신은 이대로 공성전을 감행하다간 아군의 막대한 피해를 피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진흥제께서는 비사벌군을 정벌하고 대가야와 안라의 연결을 끊으며 가야를 신라의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셨다. 내 듣기로, 당시 저 화왕산성에서 비라가야의 잔당들과 크게 전투를 벌였다 들었느니. 대체 어떻게 해서 성문을 열었는지 그것이 알고 싶구나. 혹 아는 자가 있느냐?”
배에 콱 힘을 주며 제장들에게 묻는 김유신은 옛 역사에서 해결책을 찾아보려 했다. 진흥왕이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높이에 웅거한 가야군을 상대로 어떻게 성문을 열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막사에 든 무장들이 서로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때, 화랑 문충이 소견을 냈다.
“지난해 이곳 비사벌군에 주둔했을 때 들은 것이 있사온데, 당시 화왕산성의 방비 역시 오늘처럼 견고했다 하였습니다. 하나 성은 높은 산 위에 둘러싸여 고립이 되어 있었고, 점차 식량이 떨어지니 진흥제께서는 그 사정을 듣고 화왕산성에 자비를 내릴 것이라 말씀하시길 성문을 열고 나온다면 배불리 먹이겠다는 약조를 하셨습니다. 하여 그들이 감격하여 투항했던 것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비사벌군의 목마산성과 화왕산성을 확보한 진흥왕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척경비를 세웠다. 당시로써는 무척이나 기쁜 일이었으나 현재 고구려에게 빼앗긴 상황에 마냥 좋은 추억으로 들을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해결책을 지금의 해결책으로 쓸 수 없는 노릇이다.
비사벌군은 낙동강 중류에 넓게 펼쳐진 곡창지대의 중심부로서 고구려는 산성에 웅거를 결심하기 전 평야 지대의 곡식과 백성들을 모두 화왕산으로 올려보냈다. 같은 산성이라도 경사가 낮은 목마산성에서 웅거하는 것보다 화왕산성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놈들이 아무리 곡식을 비축했다 한들, 고립이 돼 있는 이상 한계가 올 것입니다. 고구려가 내려오지 못하게 아예 입구에서 막아 버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젊은 화랑 문충은 과거 진흥왕이 썼던 계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유신은 회의적이었다.
“놈들의 군량미가 떨어지기 전에 우리의 군량미가 먼저 떨어질 것은 생각하지 않았느냐?”
“엇! 그건…….”
문충은 김유신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성에 웅거한 고구려군보다 신라군의 숫자가 3배에 달했다. 당연하게도 군량의 소모는 아군 쪽이 압도적이었다. 거기다 고구려군은 하나같이 말린 고기를 허리춤에 차고 끼니를 때운다 했으니 그들의 곡식이 떨어지는 시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남쪽에서 고구려군이 올라오고 있다는 첩보도 들려옵니다. 아마 하루 이틀이면 비사벌군에 당도할 것입니다!”
천존이 소가야 지역에서 북상하고 있는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첩보하였다. 예상대로 놈들은 낙동강 하류의 금관군이 아니라 비사벌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흠순이 네가 반드시 금관군을 탈환해야 한다.’
김유신은 남쪽으로 내려간 김흠순에게 기대를 걸었다. 고구려의 주력부대가 모두 비사벌군에 몰릴 때, 김녕 금관군의 방비는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차해서 비사벌군에 모인 고구려군과 장기적으로 대치 정국을 이어간다면 그들의 퇴로를 끊어내어 고립시켜야 했다.
“대장군!”
그때 천막 밖에서 전령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품일 장군께서 2천5백의 군사를 이끌고 압독주(押督州)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입니다! 곧 대장군을 지원하고자 비사벌군에 오겠다 하셨습니다.”
“죽령에 있어야 할 품일이 어찌 남쪽으로 내려왔단 말이냐?”
“재차 북소경을 공격한 뇌음신, 고문이 이끄는 고구려 군사가 갑자기 도주하였고, 아단성을 노린 온사문의 기병도 공격하는 듯했다가 군사를 물렸다 하였습니다. 품일 공께서 이르시길, 필시 춘추 공이 말씀하신 대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들이 물러간 것이라 하였습니다.”
“당나라가 움직였다?”
요동에서 대패를 당한 당나라가 이렇게 빨리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그러나 군사와 용병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세민이라면 아마도 작은 규모의 사단을 동원해 국지전을 일으켜 고구려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이 소식이 사실이라면 신라는 오로지 남쪽에 나타난 고구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성을 넘는다! 남쪽의 고구려 도적들이 오기 전에 화왕산에 신국의 깃발을 꽂아라!”
희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때마침 성을 넘을 전략을 떠올렸다.
* * *
신라 정규군를 상대한 첫 승리로 아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말갈을 통합한 삼기군의 기세에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며 이 지형에 누구보다 잘 아는 가야인들까지 포섭하였으니 사실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강인한 군사력과 정보력, 그리고 준비된 성은 수성을 하는 데 있어 필승 조건과도 같았다.
와아아아!
거기다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오고 있는 신라군을 당황시키기 위한 함성까지 울렸으니, 아군의 사기는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안시성에서 이 모든 것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자만에 빠질 수는 없다. 한순간의 흐트러짐이 곧 위기가 된다는 것을 또한 양만춘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신라군이 남문을 주력으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다른 성문의 군사들을 이동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동문과 다른 성문의 상황에 흠돌이 군사 재배치를 제안했고, 나는 상황을 조금 살피며 대답했다.
“신라군의 배치가 온전히 남문이라고 확정할 수 없습니다. 놈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우선 제 밑에 있는 산기군 3백을 남문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지금의 경비 태세를 유지하십시오.”
“예! 대총관.”
화왕산성에 웅거를 시작한 첫날 몇 차례 군사회의를 거쳐 거리가 조금씩 떨어진 동서남문에 병력을 각각 1천씩 배치하였고, 경사가 완만한 벼랑 쪽에는 걸걸중상이 숙련된 궁수 6백을 통솔하고 있다.
나는 중앙에서 남은 1천5백의 군사들을 거닐고 보충을 하고 있다. 여기서 각 성문에 배치한 군사들이 적의 공격에 희생할 때마다 많이 희생하는 성문과 성벽 쪽으로 중앙에서 보충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김유신을 따르는 1만 7천의 군사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쪽으로든 산을 타고 공격해 올 수 있기에 이러한 분산 정책이 필요했다.
“얍얍!”
남문 쪽에서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훈련이 한창이었다.
중앙은 그저 안전해서 후방에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 아직 숙련이 덜 된 가야 출신 병사들에게 기초 훈련을 가르치며 투입하려고 정해둔 것이다.
백제나 신라의 다른 국경 지역의 장정들은 잦은 전쟁 경험으로 훈련을 안 시켜도 어느 정도 전투력을 발휘했으나 유독 비사벌군 지역 사람들은 전쟁과 거리가 멀었다. 이곳은 곡창지대로서 농사를 짓거나 미래의 철강 산업단지답게 철제 무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다수 거주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무장하게 해줄 주요 인력이었기에 신라는 최대한 그들을 전장에 배치하지 않았고, 나도 최대한 그러는 중이었다.
고대 시대에 기술을 가진 인재는 귀했고,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북문 쪽에서 신라군이 나타났습니다!”
“저기 저 벼랑 쪽에 대병이 나타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시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문 말고도 다른 방향에서 일제히 신라군에 대한 보고가 들려왔다.
챙챙챙!
쏴사사사!
특히나 경사가 낮은 벼랑 쪽을 타고 올라오는 신라군과의 접전이 가장 치열했다. 십수 년 백제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정예들만 따로 뽑은 건지 움직임이 날렵한 자들이 돌진하고 후방에는 활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신라군이 성벽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적장으로서 가장 피하고 싶은 신라 장수 김유신이 지휘봉을 든 채 군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방패를 든 자들은 궁수들을 호위하라!”
김유신은 가히 신라의 대장군이었다.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에서 군장을 최대한 가볍게 하기 위해 칼만 찬 보병, 활만 든 궁수, 방패만 착용한 방패병 등으로 나누어 각각의 역할을 부여해 공략을 지시했다.
벼랑 쪽 성벽으로 침투하는 병력과 궁수들을 연이어 배치하고 방패를 든 군사로 궁수들을 호위하는 동시에 날쌘 병사들을 올려보내고 있었다.
우리 쪽 궁수들은 성벽을 오르는 보병에게 집중할 때 적의 화살에 관통당해 사상자가 발생했고, 뒤에 궁수들을 노릴 때는 방패병들의 수비에 번번이 막히거나 성벽에 올라선 신라군의 칼에 처참하게 쓰러졌다.
“자, 작은 막리지!”
김유신과 그토록 맞붙고 싶어 했던 걸걸중상의 얼굴이 울상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 삼한 땅에서 아직 그와 대적하기에는 걸걸중상의 경험이 부족했다.
벼랑을 넘어오는 신라군의 파죽지세에 이때다 싶은 나는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다.
“당장 궁수들을 물려라! 창병 앞으로!”
“창병 앞으로!”
흠돌이 미리 준비한 창병들을 데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화랑으로서 배웠다는 창술 훈련을 역으로 우리 군사들에게 가르쳤다.
캉캉! 빡!
전날까지 가야 장인들이 밤새 망치질로 두들긴 강철 방패와 창으로 무장한 가야 병사들이 성 밖에서 날아오는 적의 화살을 막으며 성벽까지 오른 신라군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푸푹! 푹!
갑주조차 착용하지 않고 올라온 신라군은 예리한 창날에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으아아아!
상상도 못한 창병의 출현에 힘들게 성벽에 올라온 신라군은 도리어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을 선택했다.
칼로는 방패를 뚫을 수 없고, 날아오는 기다란 창살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김유신이 크게 실망하였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잡혔다.
* * *
“서둘러라! 저기가 비사벌군이다!”
남쪽을 정리한 설인귀와 산기군이 다리를 만들어 낙동강을 건넜고, 이윽고 비사벌군에 당도했다.
얼마쯤 북쪽으로 올라왔는지 멀리 신라의 깃발이 산을 가득 메우고 있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