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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73화 (73/335)

73화 태대각간 vs 작은 막리지 (1)

“대체 그자가 누구길래 그리 업고 온 게냐?”

걸사비우가 조심스레 막사에 눕힌 자를 보며 옥소가 물었다.

겉으로 봐도 대단히 화려한 복장의 사내였다.

“신라의 상대등이라는 자이옵니다.”

“상대등이라면 신라 귀족 가운데 제일 높은 자가 아니냐? 설마, 이자가 정말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반군의 수괴였다는 게야?”

“예에. 이자를 고구려에 귀부할 수 있도록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리하라는 작은 막리지의 뜻을 따라 성사시켰습니다.”

걸사비우는 홍기군의 별동대와 함께 죽을힘을 다해 시간을 끌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정규군을 맞이한 반군의 형세는 이미 갈렸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반군을 지원해 오직 시간을 버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저 시간을 버는 것이 아니라 비담이 고구려에 귀부할 때까지 기다린 측면도 있었다. 신라 정규군을 향한 별동대의 기습은 그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수시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운이 좋은 자로구나.”

막사 침실에 눕힌 비담을 보며 중얼거리는 옥소의 말에 걸사비우는 말없이 수긍했다.

체통 높은 귀족들은 콧대가 높아선지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염종이 밤늦은 시각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비담에게 술을 먹여 의식을 잃게 하였고 그를 데리고 몰래 성에서 빠져나와 동쪽 부둣가에 이르러 이리 데려온 것이었다.

“도련님, 아니 대총관께도 이 소식을 전했느냐?”

옥소가 물었고, 걸사비우는 분사성에 오르기 전 이미 전령에게 지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북쪽으로 떠나셨다는 소식에 배를 1척 띄워 보냈습니다.”

* * *

가야금 공연을 마친 다음 날, 해가 뜨자 비사벌군을 지키는 김흠돌의 화랑 후배들이 엉거주춤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서라벌이 반군에게 먹혔다는 거짓 정보와 더불어 고구려&가야 연합이 수적으로 우세한 부분을 들 수 있겠으나, 역사가 증명하듯 화랑들은 목숨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신반의하던 두 화랑 김흥원과 진공은 내심 우리와 싸울 생각도 하고 있었으나, 그들 밑에 있는 가야계 낭도들과 병사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꺾이면서 백기를 들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게, 공연을 마친 그날 한밤중에 벽을 타고 아군 진영으로 넘어온 가야계 신라군 탈영병만 백여 명에 달했다. 이는 김해에서 자원한 가야 병사들 덕분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가야계라는 뿌리 안에 서로 혈족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왔다는 명분이 세워진 것만으로 가야 지역의 복속과 회유가 훨씬 수월해진 셈이다.

“대단하십니다. 가야의 소리로 저들의 마음을 열게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제 공연이 끝난 뒤로 줄곧 감탄하며 오늘 성문이 열렸다는 소식에 허둥지둥 나를 찾은 전내진이었다. 가야 땅을 밟은 뒤로 그의 얼굴색은 한층 밝아 있었고, 오늘은 너무 밝아서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들에게 가야의 소리를 들려준 전 공 덕분이지요.”

나는 그의 공을 치켜세웠다. 전내진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뒤 내 옆에 붙여 놓은 덕도 있으나, 이날의 공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당황한 전내진이 이내 두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제 비록 한미한 재주가 있으나 가야금을 탄주하라 하신 것은 대총관의 명이었습니다. 심지어 직접 생황을 부시어 가야의 소리가 대지에 더욱 크게 진동하여 울리게 하셨으니 저들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이는 대총관의 공입니다.”

“대총관! 대총관!”

전내진과 가야인들을 포함한 모든 군사들이 언제부터 나를 대총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직접 옥소에게 말한 것도 있었고 자연스레 불리고 있었으나 내가 퍼뜨린 게 아니다.

-중리소형이라는 직책은 고구려 왕실에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주군께서 입에 닳도록 말씀하신 가야를 정벌하는 대의에 맞지 않습니다.

이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세적의 직속에서 복무한 설인귀가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우산국에서 한창 잔치를 벌일 때 얼핏 그럴듯해서 그러라고 한 것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다.

“흐음.”

잠시 숨을 고른 나는 조금 전 전내진이 언급한 생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생황을 연주한 일은 실로 나 역시 놀라운 일이었다. 미래 연남산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을 제법 활용할 수 있었으니까.

‘이건 애초에 연남산의 재능이었으니 당연한 걸까.’

이곳에 처음 온 순간부터 몸에 배어 있던 기마술과 비도술만 해도 그랬으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닌 셈이었다.

“뭐라고요?!”

“다 거짓이었단 말입니까?!”

다툼 소리에 나는 성벽 쪽을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성내에 들어 비사벌군의 무장해제를 마치자 김흥원과 진공이 흠돌에게 따져 묻고 있었다.

마음 약한 흠돌이 진실을 꺼냈는지 서라벌이 반군의 손에 넘어갔다는 거짓 정보를 눈치챈 모양이다.

“너희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가야의 혈족들이다. 신라가 우리의 원수인데 신라 왕실이 이기든 신라 반군이 이기든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냐?”

“혀, 형님!”

“하지만 저희는 상장군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라는 것이 신라 안에서 뒤를 봐주는 것이란 말이냐?”

“그건…….”

내가 끼어들 틈 없이 김흠돌은 그들의 회유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기록된 신라의 반란군보다 가야의 부흥군이 더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가야 백성들이 환영하고 있고, 이곳 군영을 장악했으니 이제 와서 마음이 틀어진들 어쩔 수 없다. 이미 그들은 신라의 반역자였다.

“이제 북쪽으로 가면 되는 것입니까? 가야 땅을 모두 수복하고 서라벌로 가는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작은 막리지.”

쉽게 얻은 땅에 눈이 돌아간 걸걸중상이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여기서 북쪽은 대가야의 최북단이었으며 신라의 영토만이 아니었다.

“아니다. 북쪽으로는 신라, 백제와 모두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백제와 접할 이유는 없으며 이곳을 쉽게 얻었다고 경계를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밖으로는 언제든 신라군이 반격해 올 수 있고, 안으로는 아직 우리를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불시에 난을 일으킬 수 있으니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할 것이야.”

그 말에 눈치 빠른 걸걸중상이 물러갔고, 나는 지도를 펼쳐 보았다.

고령 북쪽과 성주에 이르는 대가야의 영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가야의 영역을 고구려의 것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설사 아직 그렇지 못한 영역이 있더라도 이미 백제와 신라 두 국가와 접하는 국경 지역을 모두 수중에 넣었기에 고립된 지역은 알아서 백기를 들고 투항할 길밖에 없었다.

기대했던 수준 이상의 영토를 점령한 이상, 이제부터는 정복지의 민심을 수습하고 김흥원과 진공과 같이 아직 회의적인 자들의 마음을 돌려 우리군으로 편입시켜서 병력을 늘려야 한다.

내가 얼마 더 시간을 벌도록 한 비담의 난도 어쩌면 이미 수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남쪽에서 배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불안한 예상이 적중했는지 멀리서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낙동강에 띈 판옥선의 다층 구조와 홍기군기에 나는 저것이 걸사비우가 보냈다는 걸 짐작했다.

아마도 일통삼한을 꿈꾸는 백전노장이 곧 이곳으로 달려올 모양이다.

신라 천년 역사상 유일한 생전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오른 김유신(金庾信)이 말이다.

* * *

“남쪽에 있는 신라군을 모두 몰아냈습니다! 설인귀 장군.”

비라부는 남쪽에 주둔한 신라 세력을 소탕했음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 이날이 오기까지 장장 100년이 걸렸다.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꿈처럼 여겨진 가야 수복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저쪽에 우리가 모르는 세력이 있습니다만?”

“저곳은 신라가 아닙니다.”

“신라가 아니라고요?”

“백제올시다.”

설인귀는 서쪽 땅에 펄럭이는 백제 깃발과 바다 위에 뜬 백제선을 유심히 노려보았다. 그는 동해 바다에서 낙동강에 이르기까지 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백제와 신라가 서로 모종의 거래를 하고 휴전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신라 수군을 괴멸시키고도 하슬라를 취하지 못했다.

“내 마음 같아서는 산기군을 몰고 저곳으로 들어가고 싶구려.”

설인귀의 말에 비라부가 깜짝 놀라며 손을 뻗었다.

“그, 그러지 마시지요! 백제는 저희와 동맹이 아닙니까? 그리고 중리소형께서도…….”

“여기서는 중리소형이 아니라, 대총관.”

설인귀가 두 눈을 뱀처럼 치켜 떴다.

“아아, 그렇지요. 가야도행군대총관이지요. 하하…….”

“나는 가야도행군총관입니다.”

“아, 예에.”

설인귀는 바다를 넘나들며 우산국에 이르면서 정복군에 새로운 편제 명칭을 붙였다. 가야를 수복하는 대의는 어디까지나 토착 출신인 가야인들에 마음을 얻기 위한 주군의 배려일 뿐, 고구려의 진정한 목표는 가야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가야인들은 그들의 지위를 인정받는 대가로 그 땅의 민심을 다독이고 신라와 맞서 싸우도록 하기 위한 도구였다. 이것이 주군이 가야 부흥을 지원하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크게 보면 이는 요동을 발판으로 그곳 토착 고구려인들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당나라의 입장과 일맥상통했다.

“가야인들은 모두가 비 공처럼 그리 순진한 겁니까?”

“뭐라고요?”

“가야는 신라의 배신으로 나라를 잃었다 하였습니다. 서쪽의 백제가 이번에 우리 고구려를 배신하면서 서쪽 바다의 통행권을 거부하였는데 아직도 백제를 믿냐 그 말입니다. 하마터면 가야를 영영 되찾지 못할 뻔하였질 않습니까?”

“그, 그럴 수가… 백제가 어찌 그런…….”

비라부의 실망에 설인귀는 속으로 웃을 수 있었다.

가야인들은 백제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신라의 배신이라는 공통된 아픔과 일본에서 함께 터전을 꾸린 예맥의 뿌리라는 점이 강했다.

“하나 제가 만나 본 백제 사람들은 모두 순박한 사람들이었던지라…….”

“제 말은, 비 공께서 만난 백제인들을 의심하라기보단 백제 왕실이 의심스럽다는 거지요.”

설인귀는 남산의 서찰을 통해 백제 왕실의 정보를 입수했다. 백제 의자왕은 왕권을 위해서라면 독단을 하는 경향이 있으니 미리 대비하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백제 왕실을 핑계로 백제와 가야를 최대한 거리를 두게 하라는 내용도 잊지 않았다.

“백제 왕실에 대한 소문은 왜국과 가야계 상인들을 통해서 저도 들은 것이 있습니다. 한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비라부는 백제가 신라와 전쟁을 중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려했다. 분명 고구려, 백제, 가야가 참전한 전쟁이라는 걸 알고 있는 백제 왕실이 불현듯 신라와 전쟁을 멈춘 것이다.

“대총관께서 이르시길, 머지않아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가야 땅을 다시 대대적으로 빼앗고자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산기군과 함께 동쪽으로 가겠습니다. 하나 백제를 마냥 안심할 수는 없으니 비 공께서 가야 땅의 민심을 수습하는 대로 군사를 징발하십시오. 군사 훈련은 저희군의 니루 2부대를 남기고 갈 테니 그들에게 맡기도록 하고요.”

“그리하겠습니다! 또 남기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설인귀는 부둣가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건너 왜국에서 오늘 새벽에 당도한 가야계 상인들이 적지 않다 하였습니다. 가야 수복을 위해 기꺼이 거금을 내겠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요?”

“예에. 그야 나라를 되찾는 일이니까요. 가야를 되살리고자 하는 영웅들이 그리 많은 줄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미 받은 재물의 반은 민심을 수습하고 병장기를 갖추는 데 사용할 예정입니다. 3할은 아침에 설 장군께 드렸고요.”

설인귀가 군사들을 시켜 재물을 다시 가져왔다.

“군량미를 제외하고 다시 돌려드리겠소이다.”

“예? 이걸 다시 돌려주신다고요?”

“대총관께서 한 가지 더 일러 주신 것이 있소이다. 가야와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상대로 이곳을 지키자면, 지금보다 더 많은 재물이 필요할 것이라 이르시면서요. 하여 이번에 기부한 가야 상인들에게 광석채굴권의 독점권을 주겠다 하십시오.”

“광석채굴권이라면, 대체 무슨 말씀이시온지……?”

설인귀가 살짝 다가가 비라부의 귀에 귀띔을 해 주었다.

“대마도 좌수포(佐須浦)에 금은 채광지가 있다는 소문입니다. 비 공.”

“금은이요?!”

“쉿! 누가 들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아아…….”

기밀 정보였기 때문에 설인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꺼냈다.

“상인들이 기부한 재물로 인력을 구해 가아계 상인들과 함께 이곳으로 가십시오. 오늘 가야를 위해 기부한 상인들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면 좋을 것입니다.”

설인귀는 비라부에게 지도를 건넸다. 그곳에는 대마도가 그려져 있었고, 남쪽 섬에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대마도의 최남단인 사쓰우라에 금과 은이 나온다니, 이는 금시초문입니다.”

“대총관께서 명한 일입니다. 일단 가서 조사해보도록 하시지요. 대마도주가 약조한 것도 있으니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설인귀는 남산의 계획대로 가야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고구려의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곳이 정말 남산의 말대로 금광과 은광이 나온다면 차후 가야를 지키는 것은 더는 일도 아닐 것이다.

* * *

“반군의 수괴를 놓쳤사옵니다! 신을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신들도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김유신과 알천, 그리고 신하들은 일제히 무릎을 굽히며 신라의 새 여주에게 죄를 청했다.

달포 가까운 사투로 명활성을 함락시키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반란의 주모자 비담과 염종을 그만 놓쳤다. 그와 가담한 진골귀족들을 사로잡아 대신 참수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그러나 두 주모자가 영일만과 동쪽 바다에 주둔한 신라의 함선을 빼돌리고 도주한 일은 실로 바다를 상실한 엄청난 타격이었다. 우산국을 점령하고 동쪽 바다를 제해한 고구려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군의 수괴 비담을 놓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상장군과 알천 공은 반란을 수습하고 신국을 구하셨습니다. 내 그대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즉위식을 거행한 진덕여왕은 그들의 공을 치하하며 말했다.

“반군을 진압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나라의 혼란이 끝이 난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오늘부로 알천 공을 상대등으로, 유신 공을 대장군으로 삼아 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때마침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돌아왔고, 서라벌 내정을 살필 수 있는 인물들이 차례차례 모이면서 김유신은 자연스레 다시 전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1만 5천의 군세가 서라벌 앞에 도열했고, 마중 나온 진덕여왕을 향해 김유신이 외쳤다.

“신 대장군 김유신, 기필코 가야 땅을 강탈한 고구려 도적들을 몰아내고 오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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