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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65화 (65/335)

65화 성서격동 (3)

“우리 배는 해적선만 2척이 나가고 놈들의 배는 모조리 격침시켰습니다. 상륙을 하지 않은 것이 아깝습니다! 주군.”

“같은 말만 벌써 네 번쨉니다. 이러다 귀에서 고름이 나겠습니다. 좌장군.”

“놈들의 원군 따위야 산기군이 나설 필요도 없이 걸사비우 녀석이 이끄는 홍기군의 적수조차 되지 못할 것이었으니까요!”

설인귀는 내심 상륙을 하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만 뭍 쪽을 바라보며 지겹도록 중얼거렸다.

서해에서 한창 고생하고 있을 걸걸중상의 선기군까지 삼기군을 대상으로 억지로 바다에서 싸우는 실전을 가르치는 상황이었으나, 그들의 진가는 사실 육지에서 발휘하는 기마민족이었다.

설인귀의 말처럼 상륙을 감행했다면 말갈을 통합한 그들의 기세에 충분히 하슬라를 빼앗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따져야 할 때.

내가 설인귀의 눈을 보며 말했다.

“큰 것을 얻으려면 때로는 작은 것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슬라는 이후 신라가 백제와 전쟁을 벌일 때 얼마든지 도로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은 다릅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나는 바다에서 승리한 것으로 그대의 공을 높이 삽니다.”

나는 이미 신라와 백제가 전쟁을 멈췄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말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단성에서 나타난 신라의 원군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백제의 명장 계백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내가 추측해야 할 일을 살핀다면 본래 역사에서 백제가 다시 신라와 전쟁을 벌이는 기록은 ‘비담의 난’ 이후였고,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원병을 파병하지 않은 백제에 압박을 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면 신라가 수작을 부렸거나.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육지로 가서야 정확한 사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큼큼… 알겠습니다.”

설인귀가 재차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뱃머리가 가리키는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한다.

당나라와의 본격적인 국지전이 시작하기에 앞서 서둘러 동해를 제해하고 새로운 남쪽 국경을 만드는 작업을 완료해야 하는 것.

백제가 신라와 모종의 휴전을 맺었든, 당나라의 압박을 받았든, 신라의 내분이 사라지는 일은 없으니까.

그러므로 일단은 하슬라 근해에 뻗친 신라의 해상권을 무력화시킨 것에 의의를 두어야 했다.

나는 설인귀를 비롯해 아직 미련이 남은 이들을 보며 주의했다.

“곧 근오지현(斤烏支縣)의 해협에 들어섭니다. 신라의 수군과 마주칠 것이니 제장들에게 준비 단단히 하라 이르세요.”

아쉬움을 가장 빨리 잊는 방법은 다시 적과 마주치는 위기였다. 나는 그 위기를 강조했고 이내 알아들은 설인귀와 자란의 대표들이 아군의 전선을 새의 날개처럼 펼쳐 진형을 취하게 했다.

두둥! 두둥!

얼마 후 북이 울렸고, 전방 10여 리 앞에 신라의 전투선이 포진해 있음을 알렸다.

“적선이다!”

걸사비우의 외침에 군사들이 바싹 긴장하기 시작했고, 나는 침착하게 그들의 군선(軍船)을 살폈다. 하슬라 앞바다에서 상대한 신라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숫자는 대략 이십에서 삼십여 척. 정면으로 붙어도 충분히 해볼 만했다.

“적선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때 신라 쪽 진형에서 배 1척이 유달리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걸사비우가 어리석게도 방향을 잘못 틀어 오는 신라선으로 착각하고 공격령을 내리려 했으나 내가 저지했다.

“거둬라. 아무래도 사신을 보내오는 것 같다.”

강화하려는 신라 조정의 시도라면 거절하는 것은 분명하나, 이리 공격하는 것은 예우가 아니니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있는 대장선에 올라탄 신라인은 누가 보아도 붉은색 바탕에 금무늬 옷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귀족 복색의 사내였다.

그가 정중히 예를 갖추며 소개했다.

“소인은 신국을 대표하는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수장 상대등을 모시는 염종(廉宗)이라 하옵니다.”

“나는 고구려국 대막리지(大莫離支)의 삼남(三男) 중리소형(中裏小兄) 연남산(淵男産)이라 합니다.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오셨소?”

“아아… 이쪽이었군요.”

장대한 기골에 방천화극과 활을 두른 설인귀를 향해 인사를 한 염종은 내가 대신 대답을 하자 눈알을 부리라며 고개를 젖혔다.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내가 동쪽 바다의 고구려 수군을 통제하는 사실이 어지간히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그것보다 나는 이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등 비담과 함께 신라 귀족들을 구슬려 난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반란의 주모자이기 때문이다.

“주군께서 무슨 연유로 이곳에 왔는지 묻고 계시질 않는가!”

인사를 대신 받아 잠시 머쓱해한 설인귀는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대뜸 소리를 질렀고 염종이 진땀을 닦으며 공손히 입을 열었다.

“저희 상대등께서는 고구려의 배가 이곳까지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목적이라, 비담은 아마 지금 여기 고구려 수군이 신라의 도성 서라벌을 노리고 있는지를 가장 알고 싶을 것이다.

“비담이 말입니까?”

“저, 저희 상대등을 아십니까?!”

당황해하는 염종을 보며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화백회의의 수장이자 신라 귀족을 대표하는 이의 이름 정도야 들어 보았습니다만.”

“아아, 그렇군요…….”

나는 상대등(上大等) 비담의 영향력이 근오지현(斤烏支縣)의 영일만(迎日灣)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도 몰랐다. 첩보로 쉽사리 알아낼 수 있는 정보도 아니고 사서에서 기록된 바도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아마도 진한(辰韓) 출신의 진골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변한의 가야계 쪽을 대표하는 김유신과는 상극인 셈이었다.

잠깐, 그렇다는 건 이 일대의 신라선은 비담과 화백회의의 세력이라는 의미이려나?

즉, 이들은 내 선택에 따라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혹시나 우리 수군이 이들을 공격한다면 비담의 난이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오히려 그들이 신라 조정에 서서 고구려와 맞서는 일은 내가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였다.

그런 생각에 나는 대마도주의 아우가 서명한 광산채굴권을 넌지시 보여주며 말했다.

“우리들은 대마도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대마도요?!”

의심 가득한 염종의 반응에 내 쪽에 선 설인귀와 걸사비우가 고개를 갸웃했고, 내 의중을 반쯤은 간파한 옥소가 두 사람에게 적당히 눈치를 주었다.

“그렇습니다. 여기 대마도주와 왜나라의 국서(國書)입니다. 우리는 우산국을 점령하고 대마도를 향하던 중 뱃길을 잘못 잡아 이곳까지 왔을 뿐, 더는 바다에서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 그것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의심스러워 하는 염종을 향해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믿고 자시고 우리는 배를 돌릴 거라니까요. 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저기 저 기우제만 보고 떠나겠습니다.”

“아, 저 추모제는…….”

때마침 동쪽 하늘에 커다란 해가 뜨고 있었고, 영일만에 세워진 제단 위에 선 이들이 해가 나타난 이쪽을 향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해를 맞이한다는 포구는 말 그대로 영일(迎日)이었다.

염종이 언급한 추모의 대상은 아마도 과거 먼바다를 떠난 이들일 것이다.

영일만에서 고향을 등지며 나아간 연오랑과 세오녀는 어쩌면 저 힘찬 해를 바라보며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주군! 적선을 눈앞에 두고 이리 뱃머리를 돌리다니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작은 막리지.”

“저도 이번에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도련님.”

의구심 가득한 표정의 염종과 추모제를 뒤로하며 뱃길을 돌리자 나를 노려보는 눈이 많았다.

조금 길어지겠지만, 아무래도 이를 설명하는 데 얼마간 시간을 들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 * *

승만 공주로부터 국서(國書)를 받은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당부를 남기고 서라벌을 떠나 당항성에 이르렀다.

“백제군이 군사를 돌리는 척 이곳 당항성을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자네 형님이신 상장군이 머물렀던 국경 지역을 사찰하고 왔네. 여주의 말씀대로 백제군이 정말 감쪽같이 후방으로 회군했다는 게야.”

“그게 사실입니까? 춘추 공.”

김흠순의 물음에 김춘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때마침 서라벌에 장손 대인께서 오시어 여주를 뵙고 우리의 사정을 들어주셨지. 그 대인께서 지금쯤 백제 땅에서 의자와 만나고 계실 걸세. 백제 왕자를 당으로 보내고 연호를 당의 것으로 사용하여 입조하는 것으로 교역을 끊지 않겠다며 말이야. 의자가 얼마나 굴욕적인 태도로 대인을 맞이할지 아주 궁금한 참이야. 흐흐.”

백제 요부의 입김이 먹힌 건지 어리석은 의자는 군사를 물렸다. 그리고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아우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가 가져온 황제의 서찰이 그들의 군사를 물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서 김춘추는 신라의 새 여주가 될 승만 공주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확신했다. 집사부(執事部) 설치, 군사조직 개편, 당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즉위 후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계획이 이미 준비돼 있음을 알았다.

‘나 김춘추가 외교로 감탄하게 될 줄이야!’

당장 이번 외교술로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막아낸 것만 보아도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춘추 공의 말씀대로라면 한동안은 고구려만 신경 쓰면 되겠군요.”

“고구려도 조금만 버티면 되네. 내가 아들 인문과 함께 장안으로 올라가 황제의 요구대로 입조를 하고 기필코 원군을 받아낼 걸세.”

당나라만 움직인다면 고구려는 더는 남쪽에 신경 쓸 겨를이 못됐다. 김춘추는 승만 공주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당나라를 이용해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끝장낼 계획을 세워두었다.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위한 원대한 계획이었다.

고구려 이야기에 김흠순이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고구려 수군 2백여 척이 아직 서쪽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갑비고차를 포함해 우리 측 섬도 여러 개 빼앗겼고요.”

“동쪽은 허상이고 진짜는 서쪽.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술이라는 것은 이미 나도 알고 있네. 하나 백제가 고구려의 제안을 거부했고, 우리는 그쪽 해협으로 당나라까지 다녀올걸세. 내가 올 때는 고구려 수군이 더는 이곳에 머물지 못하게 될 게야. 방비만 단단히 해 두게.”

“예. 알겠습니다!”

백제의 요부와 그 핏덩이를 대신하여 당나라 황제의 고명(誥命)을 가지고 오게 되는 이상, 한동안 백제로부터 제지를 받을 일은 없었다. 또 바닷길로 당나라 수군이 비사성 연안으로 향하도록 황제를 재촉한다면 남쪽에 머무는 고구려 수군 역시 이곳에 오래 주둔하게 될 일은 없었다.

치밀한 작전을 세워둔 김춘추는 백제 해협을 통해 유유히 당나라로 건너갔다.

* * *

“고구려 배가 정말 물러간 것이 맞느냐?”

“예에. 상대등 어르신. 소인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들의 배의 수가 바다를 메울 정도라 하지 않았느냐? 혹여 서라벌 쪽으로 오는 것이라면……?”

“혹시나 몰라 정탐선을 딸려 보냈습니다만 이미 계림(新羅)의 해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염종의 보고를 받은 비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국의 새 군주이자 최초의 진골 귀족이 왕위에 오르는 위대한 순간에 고구려라는 훼방꾼이 나타난다면 모든 일을 그르치는 꼴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거사는 예정대로 진행하시겠습니까?”

염종의 물음에 비담은 손으로 목을 그으는 시늉을 하며 긍정의 표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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