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62화 (62/335)

62화 농간

“폐하께서 승만 공주에게 이미 선위의 뜻을 밝히셨다고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상장군.”

김유신은 김춘추로부터 받은 선덕여왕의 선위 교지를 확인하고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어전 회의에서 그토록 만류한 그였으나 이미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여왕은 뜻을 거두지 않은 것이다.

“정월 대보름, 즉위식 날짜까지 이미 모두 정해졌군요. 연호와 시호, 그리고 후대에 대한 유언까지도 말입니다.”

“예에. 폐하께서는 참으로 세심한 분이십니다.”

[태화(太和)]

[진덕(眞德)]

선덕여왕이 내린 교지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는 김유신. 클 ‘태(太)’자에 화목할 ‘화(和)’. 참 ‘진(眞)’자에 큰 ‘덕(德)’. 다음 황위 계승자에 연호와 시호에는 선덕여왕이 바라는 세상과 후계자에 대한 성품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눈물을 애써 감추며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이것이 조정에 공표된다면 상대등과 화백회의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진정 선위를 하셔야 한다면 우선은 고구려와 백제와의 전쟁은 끝을 내고 나라가 안정이 된 후에야 하시는 것이 마땅한 줄로 압니다. 지금 폐하께서 이리 물러나시는 것은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닌…….”

“상장군의 말을 중간에 끊게 되어 송구하오나, 폐하께서는 얼마 버티지 못하십니다.”

김유신이 김춘추를 향해 작금의 상황과 이후 후폭풍을 말하던 중, 누군가 또각 하는 발소리와 함께 그들이 든 전각 안으로 들었다.

7척의 키에 자태가 풍만하고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긴 팔을 지닌 신라 새 여주의 등장에 김유신이 당황했고, 김춘추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여주를 뵙습니다.”

“폐하께서 얼마 버티지 못하신다니요? 설마……!”

승만 공주가 입을 다문 채 눈을 감았고, 질문을 던진 김유신은 눈치껏 알아듣고는 고개를 숙였다.

“비담이 화백회의에서 줄곧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라 말하고 다닌다지요.”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여주.”

김춘추가 깜짝 놀라며 묻자 승만 공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들이 더는 성골(聖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게지요!”

승만 공주는 화백회의에 참석하는 일부 진골 출신인 염장(廉長), 술종(述宗), 호림(虎林) 등을 포섭하며 비담과 그를 따르는 무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내전은 아니 됩니다! 지금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에 온 힘을 기울여도 부족한 때입니다!”

거세게 반발하는 김유신은 백제 국경에 머물던 자신을 소환한 이가 여왕이 아니라 승만 공주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서라벌에서 벌어질 분란의 기미를 사전에 눈치챈 것임이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내전을 바라지 않은들, 저들이 먼저 반란을 일으킨다면 상장군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승만 공주가 말하는 상황은 김유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북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는 이 국난에 내란마저 벌어진다면 신라의 국운이 꺾일 수 있다.

“백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백제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니요?”

승만 공주의 선언에 김유신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백제에는 은고(恩古)라는 계집이 있습니다. 현 백제 왕비를 폐위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지요. 또 그 복중에서 나온 아이를 태자로 삼아 백제의 다음 왕위를 잇겠다 하니 야심도 큰 계집이 아닙니까?”

“여주께서 설마 그 여인과 접촉을 하신 겁니까?”

백제 깊숙이 뻗친 내부 사정에 김춘추 역시 관심을 가지며 경청했다.

고개를 끄덕인 승만 공주가 김춘추와 김유신을 번갈아 보며 대답했다.

“은고가 말하길, 정통성이 필요하다 하니 대내외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당나라의 책봉서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그 아들의 것도 같이요. 내가 그것을 기꺼이 돕게다 하였더니, 우리의 요구에 흔쾌히 응하더군요. 백제왕은 자신이 설득할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요. 그러니 백제군은 교역을 중단한 당나라를 핑계로 한동안 군사를 물릴 것입니다. 우연히 알게 된 거지만 고구려가 백제의 바다를 이용해 신국을 위협하는 일도 막아 주겠다 하였습니다.”

“여주께서 백제의 요부(妖婦)를 이용하여 큰일 하나를 해내셨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승만 공주의 말을 유심히 듣던 김춘추는 감탄했고, 김유신 역시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두 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내전이 일어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하오나 그것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가 육로와 수로로 우리의 국토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대대적인 침공에 마냥 안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김유신은 그것을 인지시키고자 했고, 승만 공주는 대뜸 서찰 하나를 꺼내 펼쳤다.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

그 첫머리에 적힌 글자에 김춘추와 김유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시가 아닙니까?”

“정녕 사대정책을 전면으로 내세우겠다는 것입니까?”

무덤덤한 김춘추와 달리 김유신은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당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길 번창하여라

.

.

.

외방의 오랑캐 황제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

.

상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나라를 밝게 비추리.]

삼한인으로서 그 시의 구절이 참으로 민망하여 김유신은 끝까지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아직 미완이나 국운이 경각에 달려 있는 만큼 춘추 공이 하루라도 빨리 이를 황제께 전해주어야겠습니다. 고구려를 막을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당나라뿐입니다.”

새해 신국의 새 여왕으로 즉위를 앞두고 있는 승만은 오로지 국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 *

나는 우산국에 정박한 신라선을 이용해 동해를 정탐하고 돌아온 선도해를 마중했다.

그는 내가 시킨 중요한 심부름 하나까지 훌륭히 마치고 돌아왔다.

“삼공자께서 일러 주신 대로 말객 온사문에게 교란을 중지하고, 퇴각하는 척 군사를 돌리다가 하슬라를 공격하라는 서신을 전해주었습니다.”

하슬라(何瑟羅), 강원도 강릉의 옛 이름으로 선덕여왕 때 북소경(北小京)으로 개칭되어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잘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슬라에 정박한 신라 수군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서 내가 팔소매를 걷어붙이자 눈치 빠른 선도해가 정탐선이 보내온 서신을 건네며 핵심만 요약했다.

“하슬라에는 48척, 그리고 서라벌과 인근 해안에는 80여 척의 신라선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그들을 격침시키지 않는다면, 동해를 제해했다 할 수 없겠군요.”

“그럴 것입니다.”

73척의 판옥선과 숙신 해적선 10척, 노획한 신라선 9척, 우산선 4척 도합 96척으로 100척에 가까운 전선이 갖추어졌다. 신라 전선이 한군데로 모인다면, 저들의 수가 더 많아 아무리 다층 구조의 범선을 주력으로 가진 고구려 수군이라도 고대 전투 방식대로라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온사문의 기습으로 하슬라의 뱃길이 묶인다면 저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나는 즉시 설인귀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한동안 잔치니 해상 국가의 조공이니 하며 잘 받아 처먹어 호강한 설인귀는 피부에 윤기가 잘잘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정박한 전투선 앞에서 부르니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모레 저녁 보름달이 뜨는 날 온사문 장군이 하슬라를 기습할 겁니다.”

내가 지도를 펼쳐서 가리키자 설인귀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밤 전선을 이끌고 출항하면 딱 때에 맞추어 준비되지 않은 신라놈들의 전선을 무력화시킬 수 있겠군요.”

여기까지 오면서 선도해에게 따로 설명을 들었는지 그는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예. 저도 동이 트면 대장선을 타고 뒤따르겠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군.”

내가 우산국을 정벌함으로써 삼국의 역사는 이제 내가 아는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연수영은 흑벌부, 그리고 걸걸중상이 이끄는 선기군과 함께 서해를 제해하기 시작했고, 백제도 계백이 나서주면서 신라의 허를 찌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머문 얼마간 해상 국가의 조공을 받으며 고구려의 위상을 한층 더 크게 떨쳤다.

한 가지 문제는 해상의 풍요로운 자원을 조공받으면서 재정 문제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번 전쟁을 마치고 승리를 함께한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 포상해야 하는데 지금의 가야 땅에 그만한 자원이 있는가 하는 고민과 또 그곳을 영구적으로 지키기 위한 재원이 필요했다.

앞으로 벌어질 당나라와의 전면전을 생각한다면 재정 문제는 이후에도 더 큰 화두가 될 것이 분명하다.

고구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당나라의 자원을 따라갈 도리가 없다.

제아무리 군사들의 배를 불리고 유대감을 형성한들 풍요로움에 한번 맛에 들린 이들은 동기부여할 뭔가가 없다면 나태해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우산국을 정벌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저희 대마도는 지난날 고구려 태왕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일본의 중앙 정부와 분리되어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는 이 시기의 대마도는 일본의 국왕보다 삼국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구려 사신이 와서 수나라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석궁 등의 무기를 전달했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고구려는 이미 과거부터 대마도를 지원하여 후방의 신라를 교란하고 있었다.

이후 대마도는 이 석궁을 사용하여 9세기 무렵 피폐해진 신라의 여주 진성여왕이 파견한 신라 해적들을 물리치는 선견지명을 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신라 해적들이 산으로만 가득한 대마도를 침범해야 했던 이유가 전날 내가 생각했던 바로 그 실마리였다.

“도련님, 대마도에서 온 자에게 받은 그 서신이 대체 무엇입니까?”

“아, 이거?”

“어제부터 줄곧 손에서 놓고 계시질 않습니다.”

전날 대마도주의 둘째 아우라는 자와 장기간 담소를 나누며 받아낸 것을 보고 옥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알려 주었다.

“증명서야.”

“증명서요?”

“광산채굴권(鑛山採掘權)이라고 아주 중요한 서류지.”

“…중요한 서류요?”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야.”

앞으로 반세기 후에나 발견될 일본 최초의 은광산을 고구려의 것으로 만드는 사업이었다. 그들 입장에서야 아직 발견되지도 않은 일이기는 하나 석궁 몇 개와 촉돌이 7개를 손에 쥐여 주는 것만으로 웃으며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으니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해도 늦은 것이다.

“닻을 올려라! 돛을 펼쳐라!”

때늦은 밤 설인귀가 판옥선 51척과 숙신 해적선 9척을 이끌고 선발대로 출항했고, 그들의 출정을 바라보는 내 뒤에 선도해가 다가왔다.

“공자께서 내일 일찍 떠나시면 소인은 우산국을 고구려로 복속시켰다는 상소를 작성해 도성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예. 아버님께 안부 잘 전해 주십시오.”

“제게 할 말이 있지 않습니까?”

부채를 살살 치는 선도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보고 있다.

“선 공께서 무엇이 알고 싶으신 겁니까?”

“이 동쪽 외지에 어찌하여 이런 대병을 몰고 오신 겁니까? 해적들에다 우산국 군졸들도 편성에 넣었고 왜나라에서 건너온 멸망한 가야인들까지. 설마 신라의 도성을 노리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병력이 불어났으나 서라벌까지 넘볼 군세는 아닙니다.”

서라벌은 이제부터 강 건너 불구경이다. 내전이 벌어지기도 전에 불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면, 성동격서(聲東擊西)가 아니라 성서격동(聲西擊東)이었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머리 회전이 빠른 선도해는 결국 이것을 눈치챌 줄 알았다.

가야인들이 산기군과 홍기군의 편제에 들어서면서 가야를 정복하겠다는 명분은 이제 이곳에 있었다.

모두가 서쪽 바다로 나아가 백제 해안을 지나 남쪽을 정벌할 것이라 믿고 있다. 이것이 사전에 누구의 귀에 들어갈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만나지도 않은 삼한의 왕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도 역사에 망국의 왕이라 기록된 자라면 더더욱.

“나는 백제를 믿지 않습니다. 하여 가야는 우리가 정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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