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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서수남진 (2)
“이곳 가잠성에서 수만의 군사를 몰고 온 김유신을 상대로 무려 4번이나 이겼다고 들었네. 백제의 다음 전신(戰神)은 폐하가 아니라 자네가 되겠구먼.”
“좌평께서 과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소장은 그저 일개 성주일 뿐입니다.”
가잠성 성주 계백을 눈여겨본 성충은 사비를 벗어나 먼 국경까지 나오게 되었다.
“내가 이곳까지 뭣땜시 왔는지 아는가?”
고개를 갸웃한 계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고구려가 협공을 요청했습니까?”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군. 고구려의 대막리지의 자제께서 자네의 이름을 콕 집어 도살성 공략에 맡기라 하는구만.”
“연개소문의 아들이 말입니까?”
“이쪽 사정을 여럿 물어서 적당히 일러주었더니 자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기이한 일이야.”
그렇게 말을 시작한 성충은 계백에게 고구려의 수도에서 만난 연개소문의 막내아들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뒤에는 남산이 기획한 남진에 관한 전략마저 풀자 계백이 동요했다.
“좌평 어르신! 고구려에게 너무 끌려다니시는 것이 아닙니까? 저 남쪽에 고구려의 국경이 세워진다면 지금의 백제와 신라의 판도에서 고구려가 끼어드는 꼴이 됩니다. 지금은 저들 사이에 신라가 껴 있어 동맹이라는 우호 하에 군사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으나, 이는 자칫 또 다른 적을 남쪽에 만드는 일이 될지도 모르옵니다.”
“자네 염려는 뭔지 알겠네. 하나 고구려는 당나라라는 가장 큰 적이 있지. 저들이 당장에 남쪽까지 오겠다는 것은 혹시나 하는 사태를 대비해 신라의 불손한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로 한 것 일뿐, 우리 백제에는 어떠한 적의도 없을 것이네.”
“그것만으로는 그들을 믿을 수...”
“당의 이세민은 우리 백제의 교역을 끊겠다 할 만큼 단단히 화가 나 있고, 이번에 당에서 돌아온 교역선에 따르자면 중원은 이미 다시 고구려로 출병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하네. 고구려가 남쪽에 있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야. 일단은 우리 백제 입장에서도 신라를 견제할 군사적 장치 하나를 더 두는 것은 나쁘지 않네. 자네도 알다시피 김유신은 얕볼 상대가 아니야.”
바다를 통해 얻는 고구려, 왜, 돌궐에서의 소식은 지대했다. 성충은 그런 정보를 토대로 국제정세의 판도를 읽고 있었다. 고구려가 고립되지 않기 위해 가야 세력을 끌어들이며 남쪽을 장악하려는 계획이지만, 당나라와 다시 전쟁이 벌어지고 남쪽에 관한 영향력이 떨어지면 역으로 그들에게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백제는 조용히 고구려 점령한 그곳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얻을 수 있다.
“현명하신 좌평께서 그리 정했다면 알겠습니다. 하나 소장이 가잠성에서 나서 도살성으로 향한다면 동쪽의 김유신이 그 틈을 노리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
“폐하께서 의직(義直) 장군에게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을 공격하라 하실 것이니 김유신은 거기서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할 것이야.”
계백은 고구려의 개입으로 이곳 전황(戰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 * *
“고구려가 범선을 건조하고 있다 하였느냐?”
“그렇사옵니다! 상장군.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배의 규모도 규모지만 그 형태가 하나의 전각과 같다 하였습니다.”
김유신의 물음에 당항성의 남양만을 총괄하는 수군 장수 사득이 보고했고,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김흠순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고구려가 당나라의 수군을 견제하기 위해 대비하는 차원이 아니겠습니까? 지난해에 무려 1000여 척의 배가 요동의 장산열도를 뒤덮었다고 하였습니다. 저희한테 올 리는 없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유신 형님.”
“방심은 금물이다!”
“혀, 형님?”
김유신의 반응에 김흥순과 무장들이 당황했다. 얼마 전 가잠성(椵岑城)에서 백제의 달솔에게 잇따라 참패한 이후 패배의 원인을 찾기 위해 며칠 밤낮을 지새우면서부터 그의 신경이 한껏 예민해졌다.
“혹시 지난번 가잠성에서의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김흥순이 조심스럽게 물었고, 김유신은 지도를 가리켰다.
“가잠성을 백제에 내주었다는 것은 대아성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백제가 서라벌(徐羅伐)과 한수(漢水) 사이의 요지에서 우리의 움직임을 초계할 것이 아니냐?”
“가잠성 성주가 계백(階伯)이라 하였지요? 이번에 서라벌에서 온 화랑들이 도착했습니다! 군사를 한곳에 모아 친다면 능히 가잠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 있게 외치는 김흠순의 발언에도 김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예에? 어찌해서요?”
“고구려가 움직일 것이다.”
김유신의 우려는 가잠성뿐만이 아니었다. 백제만으로도 버거운 상황에 고구려가 남하한다면 북쪽의 전선이 다급해진다.
“한수 이북의 북한산성과 그 위에 칠중성이야 이미 우리 군사들이 밀집해 있으며 장방형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면과 모를 잘 맞추어 빈틈없이 축조한 요새입니다. 칠중성의 북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있으니 제아무리 고구려의 철기병이라도 쉽게 뚫을 수 없는 지형입니다!”
“흠순 공의 고견대롭니다! 상장군. 칠중성은 벌써 고구려의 침공을 몇 번이나 막아낸 요새입니다!”
이번에 서라벌에서 화랑들과 함께 건너온 천존이 동조했으나 김유신의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그런 마음이 적중했는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백제의 의직(義直)이 보기병(步騎兵) 1만과 함께 사비에서 출정식을 거행했다 하옵니다!”
“고구려의 대병이 평양에서 출병하였다는 급봅니다!”
해지기 전 서쪽과 북쪽에서 전해온 급보에 무장들이 당황했고, 얼마간 고심한 끝에 김유신이 결정을 내렸다.
“나는 추풍령(秋風嶺)에서 백제의 동태를 살피겠다. 아우가 사득과 함께 북쪽으로 올라가 당항성을 지켜줘야겠다.”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하는 날, 김유신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구려가 임진강 쪽으로 주력군을 내려보낸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혹여나 다른 곳이라면 전선이 분리된 이때에 수성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 * *
“물품의 개수는 이상이 없습니다. 도련님.”
“이른 아침부터 옥소가 수고가 많았다.”
꼼꼼하고 세심한 옥소의 부지런함으로 보급품 준비가 끝나던 찰나에 부채를 든 사내가 기마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선 공이 저를 다 마중 나오셨습니다.”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 중리소형의 뒤를 따르라는 대막리지의 명을 받들러 오는 길이옵니다.”
“아버님께서요?”
나는 군량미와 보급품 수송이라는 명목으로 도성을 떠날 채비를 마쳤고, 연개소문은 내게 선도해를 붙였다.
뭐지, 감시 차원이려나?
선도해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전에 보내주신 백제 인삼은 잘 받았습니다. 중외대부께서도 잘 받았다 삼공자께 예를 표하라 하였습니다.”
“큰 건 아닙니다. 그저 고구려의 기둥들께서 건강은 챙기시라는 거죠.”
“황공하옵니다. 후훗.”
나는 성충에게 받은 백제 인삼을 선도해와 미림부 같은 고구려의 주요 대신들에게 돌렸다.
그저 뇌물이라기보단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고구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좌우하는 사건으로 흔히들 연개소문의 죽음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전에 선도해와 중외대부(中畏大夫) 미림부 같은 인재들의 수명이 다한 것이었다. 일종의 공을 들이는 것이지만 다음 인재가 성장할 때까지 그들의 수명을 늘릴 필요가 있다.
“받은 것이 있으니 가는 것도 있어야 하겠지요.”
그때 선도해가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선물을 주시려고요?”
“그저 소식입니다.”
“소식이요?”
“조의두대형과 대공자께서 임진강 방어선을 뚫겠답시고 고연수, 고혜진 두 욕살과 함께 8천의 군사를 거닐고 출전했다는 소식은 알고 계시옵니까?”
“숙부님과 큰형님께서요?”
“신라 정벌의 공을 온전히 삼공자만이 받게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선도해가 귀한 정보를 제공했지만, 도무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아까운 그 군사들을 사지로 끌고 간 것이니까. 신라가 그토록 공들인 임진강 방어선을 공성무기 하나 없이 깨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마 벌써 상륙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군사를 끌고 갈 줄이야. 좋은 작전을 아주 제대로 먹칠을 할 요량이다.
아니다, 차라리 도성에서 허튼짓은 안 할 테니 다행이려나.
그를 일행에 넣고 천정군(泉井郡)으로 향하던 도중 선도해가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삼공자의 다음 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듯싶사옵니다.”
선도해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따라가 보니 북쪽에서 먼지바람과 함께 기병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그 깃발을 보자 알 것도 같았다.
도성에서 출정식이 열리기 한달 전 나는 걸걸중상 일행들로부터 희소식을 전해 받았다. 연개소문과의 독대에서 이미 전해 들은 사항이지만 외진 곳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는 소수의 부족을 제외하고 말갈의 통합이 완료되었다는 소식이었다.
7천5백에서 시작한 삼기군의 규모가 반년 만에 1만 5천으로 눈에 띄게 불어나 있었다.
예상치 못한 병력의 확보에 연정토로 인해 사라진 군사들의 수가 채워진 셈이었다.
오히려 그의 빌런 짓이 잘 됐다 싶었다. 적어도 임진강과 한강에 있는 신라군의 시선을 끌어 줄 테니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작은 막리지를 뵙습니다!”
“작은 막리지를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다.”
나는 군량미와 보급품 수송이라는 핑계로 도성을 떠나 이미 선발대가 떠난 천정군으로 향하고 있었고, 중간 지점에서 삼기군의 두 축인 선기군과 홍기군을 맞이할 수 있었다.
북방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며 반년을 보낸 선기와 홍기 1만의 군사는 모두 늠름하기 짝이 없는 고구려의 용사들이었다.
걸걸중상은 내가 주문한 대로 사냥과 비도술 겨루기를 통해 니루와 자란의 새 수장을 뽑았으며, 함께 동고동락하게 하였으니 단시간만에 이렇게 조직적이며 유대감 있는 부대를 만들게 된 것이다.
고생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에게 식혜 한 사발 내리고는 그간의 회포를 풀 새 없이 신라 정벌에 대한 간단한 계획을 브리핑했다.
“요동에 그 용맹스러운 안시성 군사들이 온다면 신라야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걸걸중상이 옛 추억이 떠오르는 이들을 말하고 있었다.
“당나라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그곳의 군사들마저 움직일 수야 있겠느냐?”
“그건 그렇군요...”
“왜? 내가 말한 바다는 싫은 게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혹시나 멀미를 할까 하여...”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바다를 이용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걸걸중상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내륙 지방 출신이라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다. 솔직히 나 역시 고구려 전역이 나서지 못하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녀석의 말대로 요동의 군사들만 움직일 수 있다면 신라를 공략할 수많은 전략을 세울 수 있다. 내부의 난에 백제까지 더해진다면 그 숨통을 완전히 끊어내는 것마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당나라나 신라도 마찬가지인 상황이고 영토가 넓은 나라의 숙명이니 별 수 없다.
오히려 통합한 말갈로 인해 늘어난 병력에 만족해야 했다.
“나는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갈 것이다. 동해와 서해 모두. 아주 바쁜 한 해가 될지도 모른다.”
“작은 막리지께서 가신다면 선기군도 가겠사옵니다.”
“우리 홍기군도 갈 것이옵니다!”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는 내가 가는 곳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겠다는 표정이었다.
“요전에 보니 조영이가 많이 컸던데 얼굴 한번 못 보고 다시 전장에 가도 괜찮겠느냐?”
내가 진지하게 묻자 걸걸중상이 빈 식혜 잔을 내려다보며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작은 막리지께서 지난번 신라의 상장군 김유신이라는 자에 대해 말씀해 준 적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백제와의 전쟁에서 많은 성을 얻고도 다시 오는 백제군을 막고자 문밖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 않고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그대로 출정을 하였다고요. 장수로서는 참으로 본받을 자이옵니다.”
“그래. 신라의 요주 인물이니 그 이름을 새겨두라고도 하였다.”
식혜 잔을 바닥에 내린 걸걸중상이 비장한 얼굴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그자와 만난다면, 목숨을 걸고 한판 붙고 싶사옵니다!”
걸걸중상이 그리 선언했고, 나는 연해주로 올려보낸 설인귀가 언제 내려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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