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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화 대모달
남산이 집무실에서 나가자 실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늘 회담 내용을 정리한 백제 관료들은 이를 의자왕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이며 좌평들이 어찌 받아들일지 불안한 마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성충을 바라보았고, 선도해가 부채를 흔들며 채근했다.
“성충 공께서는 오늘 우리 중리소형을 어찌 보셨습니까?”
“남산 공자 말입니까? 제 생각에 고구려는 이미 대막리지의 후계가 준비돼있는 듯싶습니다.”
“흐허허. 후계라니요? 대막리지께선 아직 정정하시옵니다.”
성충이 정색하며 물었다.
“고구려가 정말 뱃길로 신라를 치는 것이 맞습니까? 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군사 운용이 가능할 리가...”
“저도 오늘 처음 듣는 얘기였습니다.”
“처, 처음이라고요?!”
성충이 당황했고, 선도해가 부채를 내렸다.
“자세한 전술이야 나중에 군부 회의에서 다시 들어봐야 알겠습니다만, 지금껏 봐온 대로라면 대막리지께옵서는 중리소형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계십니다. 그 덕에 피폐해진 고구려의 민생은 한결 나아졌고, 오늘날 수군을 양성할 수 있게 된 게지요. 고로 오늘 들으신 얘기는 실로 불가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살살 눈웃음을 흘리는 선도해는 그 표정과는 달리 백제 사신을 대하는 남산에게 감탄했다. 본래 사신 접대라는 것은 그 안에서부터 양국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밀리는 쪽은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차후 논의에 차질을 빚는다. 과거 성충을 직접 접대했던 선도해가 김춘추와 다르게 백제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던 이유도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주도권을 고스란히 고구려가 쥐게 되었다. 과거 고구려에게 머리를 조아린 백제의 허물을 들추고는 이번 전쟁에서 갖추어진 고구려의 수군을 다시 한번 운용하겠다는 것. 그것도 무려 백제 바다를 거쳐 신라를 공격하겠다는 건 백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당나라 황제 이세민을 중원으로 쫓아버린 남산 공자의 활약에서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저희 왕께서 이를 윤허할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귀국의 왕께 이를 잘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도해는 실실 웃으며 배웅했고 성충은 의자왕의 답신을 가져오겠다며 즉답을 회피했으나 고구려의 의도대로 흘러갈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다.
고구려, 백제, 왜, 돌궐이 연결되고 신라, 당이 연결된 십자형 외교가 성립된 지금 고구려와 백제가 타도 신라를 위해 군사적인 동맹을 맺게 된 형국이었다.
‘흥수의 말대로 연남산은 실로 위험한 인물일 수 있다!’
성충은 고구려의 연개소문, 신라의 김유신, 그런 김유신을 상대로 가잠성에서 승리를 거둔 백제의 계백만이 오직 삼국의 패권을 쥘 유일한 영웅호걸이라 보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10년 넘게 삼국의 패권을 쥐고 다툴 것이고 그중 가장 오래 살아남는 이가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예측도 했었다. 그런데 고구려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것도 앞으로의 미래가 창창한 연개소문의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계책이 채택되어 성사된다면 삼국의 패권은 백제나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쥘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대놓고 거절을 하다간 자칫 고구려의 수군이 백제로 향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당나라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고구려가 자칫 백제의 제해권을 삼키려 할지도 모른다.
선택지가 적어지는 상황 속에 성충은 한숨을 푹푹 쉬며 사비로 향하는 선박에 올랐다. 멀리 포진한 고구려 함선의 웅장함이 짙은 대동강 물빛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성충과의 접견이 끝나자마자 나는 태왕의 조서(詔書)를 들고 사자들과 함께 바삐 도성을 나섰다. 연개소문과의 약조도 있었고, 다소 번거롭지만 양만춘을 도성으로 소환하기 위해서 직접 움직여야 했다. 공방과 철기방의 협조로 안시성에 포상할 깍지 500개와 촉돌이 60개를 따로 준비해 짐에 실었다.
“이런다고 그 사내가 도성에 올 리가 없다. 헛걸음이 될 게야!”
아, 이 여인을 빼 먹어서는 곤란하다. 연수영(淵秀英), 양만춘과 깊은 인연이 있는 그녀가 옆에 있어야 지난번과 다르게 조금 더 설득력 있게 양만춘의 마음을 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바쁘신 와중에 이리 저를 따라 동행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스승님.”
“남산아, 너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다 잘 되었는지는 모르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연수영이 간만에 스승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갈등까지 세세히 들어가면 그녀에게도 무관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 없이 무조건 해야 한다.
“저도 압니다. 다른 일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해냈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걸요. 하지만 안시성에서 제가 직접 만난 양만춘 아저씨는 누구보다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당나라 황제의 대군과 온몸으로 맞서 싸운 그분이기에 제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아주실 겁니다.”
“너는 당나라가 그렇게 깨지고도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 보느냐?”
“제가 만난 이세민은 절대로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당나라를 물리친 고구려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패하고 망했으니 당나라도 곧 그리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압록강 이북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것이다.
“당나라도 곧 망하겠지?”
“그렇게 많은 놈들이 죽었는데 뭘, 지금 저 요하에는 아직도 당나라 놈들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들었어.”
“아우~ 여태 그걸 안 치우고 뭐 했대?”
“당나라 놈들이 다시 오거든 그 시체를 보고 얼른 돌아가라는 대막리지의 뜻이지. 뭐 전에 망하겠지만.”
압록강 북쪽 오골성에 들어서자 일부 백성들이 술잔을 나누며 그렇게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세민은 중국 왕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 칭송받고 있는 자, 그가 통치하는 당나라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날이 저물자 사자들과 함께 오골성에서 여장을 푼 나는 이곳에서 사당을 꾸려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소녀를 찾았다. 안 본 사이 정말 요염한 신녀가 다 되어 있었다.
“네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다. 도와주겠니?”
“저를 오늘날 고구려의 신녀로 삼으신 것은 모두 공자 님의 뜻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분명 이번에도 틀림없이 고구려의 미래를 보는 예언일 것입니다.”
“우매한 백성들이 밖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으니 네가 나서줘야겠다. 당나라가 머지않아 다시 군사를 일으키니 고구려는 한시도 안심해서는 안 되며 항시 무예를 게을리하지 말고 병장기를 잘 갈고닦고 있으라고 하면 좋겠다. 가급적 이것이 요동 전 지역에 알려지도록 해서 말이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종교니, 토속신앙이니, 샤머니즘에 의존하는 것은 나와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그녀는 내가 키워놓은 사람이었다. 고구려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데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사용할 생각이다.
날이 밝자 다시 안시성으로 갈 채비를 하였고 성문을 나설 무렵 뒤에서 누군가 이쪽을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익숙한 신형에 나는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송구합니다! 삼공자. 내 삼공자의 예견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사실 늦지 않았는데 그만 다른 이의 말을 믿고 마음을 바꿨으니...”
오골성에서 나서기 전 부모의 생일을 맞아 잠시 고향에 내려왔다고 하는 털북숭이 고돌발과 재회했다.
“무탈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예에? 이세민을 놓쳐 꾸중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꾸중이라니요? 하하.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지금에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아...”
“그러나 안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니까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다시 일러주십시오. 이번에는 결코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자셉니다.”
나는 굳게 다짐을 선언한 고돌발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는 발을 재게 놀리며 다시 길을 떠났다. 이미 한번 갔던 길이라 그런지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길을 찾았다. 북쪽에는 멀리 한번 발걸음을 닿았던 태자하가 흐르고 있었고 방향을 틀어 남쪽에 이르자 초철강 물줄기가 보였다.
대당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던 안시성이 지척에 있는 것이었다.
막상 다시 오자 이곳에서 성문이 열리기까지 3달간 야영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보수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안시성의 성벽에는 양만춘이 상체를 내밀며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보고 있듯,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안시성 군사들도 마찬가지였고, 나를 알아보며 반갑게 인사할 것이라는 첫 번째 추측은 빗나갔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라도 되듯 성벽에는 온갖 삼엄한 표정으로 가득했다.
이윽고 다다른 안시성 앞에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쳤다.
“어명입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어서 성문을 열고 나와 태왕 폐하의 명을 받으십시오!”
그 말이 있은 직후 한동안 고요함이 엄습했고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지 연수영이 다가왔다.
“물러서거라. 내가 한번 말을 해보겠다.”
그렇게 일단은 연수영에게 맡겨야 하나 싶을 때, 성 내에 인기척이 났고 이내 드르륵 하며 안시성 성문이 열렸다.
“이런 작은 성에 들어오는데 그렇게까지 거추장스럽게 굴 것 없다.”
양만춘이 순순히 성문을 열었다. 연개소문에게 큰소리치긴 했지만 내가 단신이나 선량한 백성들과 온 것도 아니었고, 엄연히 왕명을 받아 꺼낸 입장에서 이렇게 쉽게 열어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연수영과 나를 따라선 사자들 역시 연개소문을 깐 안시성이 이렇게 빨리 성문을 열 것이라고는 예측조차 못 한 얼굴들이었다.
“무엇을 하면 되는 게냐? 이렇게 무릎을 꿇고 왕명을 받으면 되는 게냐?”
고분고분 이행하는 양만춘을 보며 당황하는 사자들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고구려 태왕을 향한 충성 의식을 마치자 내가 물었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내가 열어주지 않으면 네가 곤혹스러울 것이 아니냐?”
“예. 아마 고구려가 곤혹스러울 겁니다.”
양만춘이 기가 막힌 지 헛웃음 지었다.
“여전하긴, 이곳에 온 연개소문이 그러더구나. 너를 요동에 보낸 것은 그가 아니었다고. 네가 직접 고구려 백성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주도했다고 말이다.”
연개소문이 진짜 그랬다고? 이 부분은 의외였다. 조정에는 나름 자신이 보냈다는 걸 고수했던 그가 양만춘에게 진실을 말했으니까.
“그래서 성문을 열어주신 겁니까?”
“나도 모르겠다. 그저 전에는 석 달을 기다려 열어주었으니 이번에는 그리 시일을 끌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양만춘이 그렇게 한참 진지할 무렵 팔짱을 낀 연수영이 이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놀고들 있네. 의식을 치렀다고 다 끝난 줄 알아?”
연수영의 빈정거림에 양만춘이 나를 쳐다보았다.
“뭐가 또 있는 게냐?”
“으음, 우선 이것부터 받으십시오.”
원래 이럴 때 주려고 한 게 아닌데 우선 뇌물부터 먹여야겠다. 나는 시종들의 짐을 풀어 안시성에 공을 치하하는 뜻으로 그간 공들여 만든 깍지와 촉돌이를 분배했다.
“작은 막리지가 왔다!”
“안시성을 구한 소년이 나타났다!”
내가 선물과 함께 성내에 들어서자 삼엄했던 안시성 군사들의 혈색이 그제야 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한 마로가 깍지를 착용하며 열중하게 활시위를 당겼고 매우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안시성과 화기애애한 재회가 이루어지면서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이 저물었고, 나를 막사로 부른 양만춘이 물었다.
“자, 이제 말해보거라. 무엇이 남았느냐?”
나보다 더 급한 사람은 양만춘인 모양이다.
“안시성은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성의 성주인 당신은 상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나를 도성으로 부르려는 게구나.”
양만춘은 이미 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예. 하나 다시 요동으로 발령받으실 겁니다. 어쩌면 저 요하 넘어 요서 지역이 될 수도 있고요.”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냐?”
“가장 큰 공을 세운이가 상을 받지 않는다면 공정과 형평성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성주는 괜찮다고 해도 요동과 안시성은 받아들이지 못할 거고요. 그리되면 이 갈등은 영영 끝나지 않습니다. 당나라와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주께서는 적을 두고 안에서 분열이 나기를 원하십니까?”
양만춘이 고심하고 있자 연수영이 거들었다.
“남산이 말이 맞아. 당나라가 이대로 물러설 리가 없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요하를 넘을 거야. 이를 대비하기 위해선 안시성에서 수성에 성공한 당신의 경험이 필요해.”
양만춘이 걱정하는 부분을 추리해 내가 덧붙였다.
“제 아버님과의 문제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정에서 태왕 폐하를 알현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한동안 허공을 바라본 양만춘이 갑자기 엄지에 착용한 깍지를 내게 보이며 웃었다.
“네가 준 것, 아주 유용하더구나.”
마치 그 말이, 조금 전 사안에 대한 대답인 것 같았다.
* * *
“나, 양만춘은 고구려국 태왕 폐하의 뜻을 받들어 우리 고구려 백성들을 괴롭히는 서토의 무리들을 단 한 발자국도 요하를 넘지 않게 하겠다! 하여 대모달의 작위를 뜻깊게 받겠다.”
서기 646년, 개화 5년 도성의 승전탑 앞에 선 양만춘(楊萬春)이 대모달(大模達)의 지위에 이르렀다.
와아아아아!
감격스러운 순간에 마로를 비롯한 안시성 토박이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도성과 요동의 장병들도 잇달아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에, 이제는 마음 놓고 남쪽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 * *
“신라의 귀족 김춘추라는 자가 위대한 당나라 왕업을 여신 황제 폐하를 꼭 한번 알현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그것참 예를 아는 자로구나. 한데 신라 사신이 그 말만 한 것이냐?”
이세민의 물음에 장손무기가 동쪽 사정을 대신 전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 하였습니다.”
“그래, 신라는 짐의 명을 따라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남쪽으로 출병하였다. 하나 백제는 그런 신라를 공격했다 하였지?”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
“이런 괘씸한! 당장 백제에 사신을 보내 교역을 끊게다 하여라! 전에 보내려 했던 백제 왕후와 세자 책봉도 모두 미루겠다 하라!”
“예! 즉각 명을 시행하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태원시에 머물며 군사를 징발하고 직접 훈련을 시킨 이세민은 내일이라도 당장 내분으로 휘청이는 설연타를 토벌할 작정이었다.
“산동에 머무는 신라 사신에게는 설연타만 정리하면 짐의 군사가 다시 고구려로 향할 것이니 김춘추와 신라 여왕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전하거라.”
이세민은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고구려가 백제와 더불어 남쪽에 신경 쓰는 사이, 빼앗긴 요서 지역 탈환을 노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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