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49화 (49/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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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깍지

남산이 나가자 이기우, 선도해, 미림부가 차례차례 연개소문의 집무실로 들었다. 연개소문이 이세민을 쫓아 도성을 떠나 있는 동안 그들이 각각 연개소문의 눈과 귀가 되어 도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리 감독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첫 질의는 응당 조금 전 만난 남산이에 관한 것부터였다.

“내가 도성을 비운 사이 남산이가 무얼 했다고?”

“도성의 아낙네들을 따로 태학으로 불러들여 생활을 더 좋게 하도록 일러주시거나 남건 공자께서 다니시는 사찰을 이용해 민생을 살피셨습니다. 이번 원정으로 한동안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배로 늘었고 선박 건조로 국가 재정이 어려운 걸 아셨는지 태학에서 주도하는 구황작물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이기우는 요동에서 건너온 연개소문의 명으로 도성에 귀환한 남산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어전에서 벼슬을 얻자마자 태학을 중심으로 민생 안정에 박차를 가하는 남산 공자의 활동은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흔히 구할 수 있는 작물을 이용해 그 작은 손으로 만들어내는 음식들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일 생각을 한 것이다. 불과 이틀 전에도 남산 공자의 비법이 담긴 꼬치집을 찾아간 이기우는 그 향을 곱씹으며 입맛을 붙였다.

“태왕 폐하께서 남산이에게 백제 사신을 만나게 했다는 건 무슨 소리냐?”

이기우의 대답을 들은 연개소문의 시선이 이번에는 선도해에게 향했다.

“백제 사신 성충과 흥수를 직접 보겠다 자처하셨습니다.”

“정토와 귀족들이 그걸 수수방관(袖手傍觀)하진 않았을 것인데?”

“대막리지의 핑계를 대니 그들이나 저희야 별수 있겠습니까?”

“하, 내 이름을 팔아? 자연과 이치에 비유하더니,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었군.”

선도해와 이기우는 연개소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일순 허공을 응시한 연개소문은 백제 사신과 만난 남산이 그들과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했다.

“흥수는 좌평이라 들었고 성충은 의자의 최측근으로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사옵니다. 대막리지. 그 탓에 저희가 지난번 그자에게 된통 곤욕을 치르질 않았습니까?”

연개소문은 선도해와 함께 성충을 만나 담화를 나눈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감히 광개토태왕 앞에 머리를 조아려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 맹세한 백잔(百殘)의 신하 따위가 당나라를 걸고 대고구려를 겁박하려 한 겁 없는 자였다. 신라만 아니었다면 그 목을 베어 의자 앞에 던져주었을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감히 대가를 요구했다?”

“그자가 또다시 당나라를 걸고넘어질까 염려하여 어찌해야 하나 조정이 한동안 어수선했습니다만 남산 공자께서 그들과의 설전으로 이기셨습니다.”

“그 여우 같은 놈들을 상대로 설전으로 이겼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시게!”

선도해로부터 사신 접대 건을 상세히 들은 연개소문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두어 차례 비웠다. 고상한 척하는 백잔 놈들이 어린 자식에게 호되게 당한 꼴이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여간, 난 놈이긴 난 놈이야! 감히 나를 가르치기만 했다면 날을 잡아 그 기를 눌러버리려 했거늘, 백잔 놈들에게도 제대로 한 방 먹여 주었군.”

“예에?”

“대막리지를 가르치려 했다고요?”

이기우와 선도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고 연개소문은 말없이 재차 술잔을 비우고는 수염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대막리지께선 정녕 후일 세 아들 가운데 한 아이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실 작정입니까?”

그때 조용히 지켜만 보고있던 미림부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중외대부(中畏大夫)!”

“대막리지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선도해와 이기우의 만류에도 미림부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그를 노려보며 털털하게 웃었다.

“괜찮네, 괜찮아! 내 죽마고우(竹馬故友)가 아닌가?”

“그 죽마고우를 죽이려 하셨사옵니다.”

미림부의 말에 일순 집무실 안이 살얼음판처럼 차가워졌다.

연개소문에게 직접적인 어투로 말을 할 수 있는 고구려인은 중외대부(中畏大夫) 미림부만이 유일했다.

“그래, 한때 그랬던 적도 있었지. 한데 그게 다시 신경이 쓰였는가?”

“쉽사리 잊을 일은 아니지요.”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기에 선도해와 이기우가 긴장했다.

연개소문이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이 연개소문의 위징일세.”

연개소문은 미림부를 가리켜 당나라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기 전 당시 황태자이자 큰형 이건성을 지지했던 위징과 비유했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여 영류왕의 충복이었고 조정이 연개소문에게 당군이 거란을 쳐도 대응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 조정과 영류왕의 편에 서며 수차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선도해와 연정토 등 강경파가 그를 살생부 가장 위에 올려두라 하였고 연개소문도 따랐으나 막상 정변에 성공하자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킬 뛰어난 인재를 차마 죽이지 못했다.

“나와 연노부(涓奴部)는 태조왕(太祖王) 이전 고구려의 왕족이었네. 지금은 계루부(桂婁部)의 제례(祭禮)만이 고구려의 유일한 종묘로서 확립되고, 비류부(沸流部)와 연노부(涓奴部)가 하나인 소노부(消奴部)는 전 왕족으로서의 공식적인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는 하나 그것이 권력에서 손을 떼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

5부족, 즉 5개의 권력으로 나누어진 고구려 조정에서 권력이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다는 것이 연개소문의 생각이다. 그가 원하는 고구려의 천하는 결국 힘에서부터 나온다.

“여전히 솔직하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대막리지를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자네가 없었다면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반격할 여력이 남아나 있었겠는가?”

고구려의 내정과 국가 재정은 그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미림부는 자신을 치켜세우는 연개소문과 술잔을 나누었다.

비록 생각은 달랐으나 국정을 안정시키겠다는 연개소문의 정직함, 미림부는 오직 그것만을 믿고 마음을 바꾸었다.

“그나저나 자네의 의견을 내 미처 묻질 않았군. 남산이에 대해 어찌 보고 있는가?”

연개소문의 물음에 미림부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했다. 엄지에 낀 각지(角指)가 유난히도 매끄러웠다.

“세심한 분인지 제가 사냥을 좋아하는 걸 어찌 알고 한밤에 각지(角指)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 손에 걸친 걸 말인가?”

“예. 이것을 끼고 한번 활시위를 당겨보시겠습니까?”

미림부의 제안에 연개소문이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 * *

양만춘을 대모달로 삼기 위한 절차는 연개소문 앞에 무릎을 꿇리는 것이 아니라 태왕 앞에 충성을 다짐하게 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 정도 선에서 요동 출신들에 대한 공을 치하하고 넘어가겠다는 건 연개소문의 성격상 많이 양보해 준 것이다.

연정토와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도 그의 역할이니 이제 나는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뾰족한 수가 딱히 없었다.

어쩌다 그 면전에서 큰소릴 치긴 했다만 양만춘을 도성으로 소환하는 일이 말처럼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연개소문이 태왕의 재가를 받고 양만춘을 도성에 불러들이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식 서한을 작성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있으니, 그 사이에 양만춘을 설득할 준비를 해야겠다.

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진심을 담은 선물만 한 게 없다.

때마침 고구려 군사들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 막 나오기 시작했으니 이제 생산에 매진할 때였다.

“중리소형께서 이곳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흑벌무가 어전에서 본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태대사자를 뵈러 왔습니다. 안에 계십니까?”

연개소문과 만난 뒤 나는 평양 도성의 군영을 찾았다. 양만춘 일로 연수영과 상의하기 위한 목적이 1순위였으나 이번에 연개소문과 함께 귀환한 고구려의 군부 세력과 안면을 트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정치는 사람과 사람이 연결돼 있고 군사는 무장끼리 이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개소문은 그런 무장들을 연결해 정변에 성공한 것이다.

이 군영에 전신을 찰갑으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소유한 말조차 화려한 마갑을 씌우며 타고 다니는 이들은 하나같이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말객(末客)의 무관직을 수행하는 장수들이었다.

“글쎄요, 아까 뵌 것도 같은데 어디 계시는지...”

“저는 뵌 적이 없사옵니다.”

“태대사자께선 오늘 어전 회의가 끝나고 볼 일이 있다 하시어 군영에는 납시지 않으셨습니다.”

“아까 옆에 철기방에 잠깐 얼굴을 비치셨는데 조금 일찍 오셨다면 아마 만나 볼 수 있으셨을 겁니다.”

흑벌무가 갸우뚱하는 사이 도성 출신 고문과, 말갈 출신 생해, 그리고 북방 혼혈계 출신 뇌음신이 그렇게 설명하며 나를 맞이했다. 아무래도 조정의 요직을 맡은 데다 내가 부탁한 일로 한참 교육 사업에 뛰어든 연수영은 바쁠 것이다.

“나중에 제가 따로 찾아뵈어야겠군요. 그것보다 네 분이 이곳의 군사들과 함께 저를 도와줄 일이 있습니다.”

“도울일이요?”

“무슨 일이시옵니까?”

“이곳의 군사들과 말입니까?”

“하나 군영의 군사를 움직이자면 대막리지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지라...”

난감해 하는 네 사람을 보며 내가 편하게 말하고는 안심시켰다.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군사들이 쓸 물건을 제작하는데 한 백여 명쯤 힘쓰는 장정들의 노동력이 조금 필요할 뿐이거든요. 세 분께서 같이 와 주시면 더 좋을 겁니다.”

지난번 삼기군 창설 때 사냥을 하며 얻은 노획품들이 적지 않았다. 뼈는 바르며 굽게 하였고 소금과 향신료로 간을 해 연해주로 출정하는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으며 일부 모피는 자란의 대표와 기의 통솔자를 중심으로 나누어주긴 했으나 곧바로 동북쪽으로 향하는 그들에게 짐을 던져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내가 동부가의 시종들과 함께 상당수 가지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 외에도 밭을 일구는 수소를 부리기 좋게 하기 위해 모아둔 쇠뿔과 수명이 다한 소들의 쇠뿔을 그간 차곡차곡 모아 창고에 쌓아 두었다.

“아니, 이건 짐승의 뼈와 뿔이 아닙니까?”

“이건 쇠뿔로 보입니다.”

“이런 걸 어디에 쓰시려고 이곳 군영과 철기방에 가져오시라 한 겁니까?”

“아무래도 쓸모 없는 것들로 보이는데요...?”

살코기는 삼기군의 군사들의 죄다 발라 먹었고, 네 무인은 쓸모없는 뼈는 왜 이렇게 많이 모아놓았냐 따져 묻고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요. 태학박사가 소개해 준 공장장이와 야철대장을 만나 이것들로 깍지와 촉돌이를 만들려고 합니다.”

“깍지와 촉돌이요?”

“그게 무엇이옵니까?”

생소한 이름에 뇌음신과 고문이 물었고, 내가 제작한 간단한 도면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우리 고구려의 철기병은 말을 탈 때 이런 식으로 발을 고정시키는 등자가 있습니다. 하니 깍지는 그 말 위에서 활시위를 잡아당길 때 손가락을 보호하기 위해 엄지손가락 첫마디에 끼워 사용하기 위함이지요. 여기 이 촉돌이는 화살촉을 화살에 끼우거나 뽑을 때 혹은 헐거워진 것을 조정할 때 사용하는 물건이고요. 태학에서 시범 삼아 만들어 본 샘플, 아니 물건이 있으니 한번 사용해보시지요.”

깍지를 건네자 네 사람은 저마다 신문물을 발견했다는 듯 앞다투어 엄지에 껴 착용했고 활시위를 당겨보았다.

“아니, 어찌 이럴 수가...!”

“안 아픕니다! 이렇게 물집이 꽉 잡힌 손가락인데 하나도 안 아픕니다!”

“이리 귀한 것을 소장들이 받아도 되겠습니까?”

발성이 큰 뇌음신이 군영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 소리쳤고 고문과 생해도 한동안 감탄하며 내가 그러라고 하자 깍지에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소중한 엄지가 혹사당하는 것을 그들은 이제 알았을 것이다.

나는 안시성에서 손 마디 마디가 퉁퉁 부은 양만춘과 안시성 군사들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내 조그마한 손도 하루아침에 말도 안 될 정도로 엉망이 되었으니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조선 후기에서나 온전히 보급될 깍지를 이용해 주몽의 후예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다.

“이거 기가 막히게 잘 뽑힙니다!”

눈이 반짝이는 흑벌무의 시선은 촉돌이에 가 있었다. 뽁 하며 화살에 화살촉을 자유롭게 끼었다 뽑는 기구가 무척이나 신기한 모양이다.

촉돌이 역시 몸체의 뾰족한 부분으로 활대에 박힌 촉을 뽑거나 박는데 유용한 도구가 될 전망이다.

앞으로 고구려 궁수들의 필수 아이템쯤 되려나?

나는 이것들로 굳게 닫힌 안시성의 문을 다시 한번 열어보려 한다.

* * *

며칠 후 나는 보장왕의 부름에 안학궁 정궁(正宮)에서 태왕과 단독으로 면담을 갖게 되었다.

안시성으로 보내는 태왕의 서신을 받았고, 또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남산 중리소형이 백제 사신을 한 번 더 만나보라 대막리지께서 권유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연개소문이 성충과의 논의를 재차 나로 하여 시킬 요량이다.

내게 직접 말하지 않고 태왕을 통해 뜻을 전하게 했다는 건, 관리로서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로 봐야 하려나.

중리소형의 주된 업무가 당나라 관직 알자(謁者)와 같이 외국 사신 접견이니 내가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지난번과 다르게 고구려 조정이 신라 정벌로 확실히 가닥을 잡은 만큼, 백제와는 조금 더 구체적인 전략을 나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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