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 38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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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정치
“태왕후가 왕자를 낳았단 말이냐?!”
“예에 폐하. 귀한 옥동자 왕자님을 순산하셨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태왕후 전각 시종이 전해온 소식에 연개소문을 포함한 조정 신료들이 일제히 읍했다.
““경하 드리옵니다! 태왕 폐하!””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내가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오늘 사안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얘기를 나눕시다. 대막리지.”
뜻밖에 벌어진 태왕후의 출산으로 보장왕이 급히 어전을 나서면서 당나라에서 신라 응징으로 옮겨간 화두로 어전회의가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이후 연정토와 부기원 이하의 귀족들이 씩씩거리며 연개소문의 뒤를 쫓아 안학궁 내 대막리지 집무실로 들어갔다.
나 역시 집무실로 따로 오라는 연개소문의 언질에 뒤이어 따랐으나 그들과 함께 집무실에 들지 않았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기다렸다.
“형님! 남산이의 주장은 들을 가치가 없습니다! 저 어린 게 백잔(百殘) 사신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 중원을 정복할 이 절호의 기회를 날려 먹으려는 개수작입니다! 이세민이 다시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넘볼 여유를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제가회의에서도 귀족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라나 백제야 고구려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집어삼킬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름 아닌 대막리지가 아니시옵니까? 한데 이제 와서 남쪽을 공격하시겠다니요?”
연정토와 부기원이 구체적으로 이유를 들먹이며 승복하지 않자 연개소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서찰 하나를 그들 앞에 던졌다.
“너희가 현장에 없으니 아직도 모르는 게다!”
귀청을 찢는 성난 목소리에 서찰을 돌리며 확인한 연정토와 부기원이 아주 잠깐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낙양으로 돌아간 이세민이 정녕 부상을 당했단 말입니까?!”
“군사를 일으킨 설연타가 갑작스레 내분이 일어나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이 사실이옵니까?!”
조금 전 그들의 주장을 단숨에 깰 수 있는 정보를 연개소문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이세민은 부상 중이니 한동안 대병을 일으킬 여력은 없을 것이며, 설연타가 허무하게 무너졌으니 당을 공격할 적기도 아닌 셈이다.
여기서 다시 듣는 이세민이 부상 소식.
그 증인은 바로 나였다.
나는 안시성에서 두 눈 똑똑이 뜨고 지켜보았다. 이세민의 좌측 눈이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을. 황제가 안시성을 포기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고구려의 원군이나 연개소문이 두려운 것보다 앞서 이와 같은 치명적인 부상인 것이다. 고구려에 비해 압도적인 물량은 물론 원역사였다면 요동성에 비축된 50만 군량미를 얻으며 보급에서의 문제도 없었을 터였다.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징크스도 그의 퇴각을 주저하게 하였을 것이나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의 부상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중국 사서에서 기록된 이세민의 사망 직접 사인은 오랜 원정으로 인해 악화된 치질이라는 점이다. 애초에 황제가 친정하는 고당 전쟁에서 죽은 군사의 수가 수백이니 수천이니 하며 원정군 규모도 구당서 신당서마다 다른 숫자를 써놓은 판타지 소설을 사서라 하는 것도 웃기지만, 기록이든 사실이든 이세민은 틀림없이 안시성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러니 고구려 땅에서 당한 고통으로 인해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고구려에서 각인된 최초의 패배에 마지막 죽는 순간이 되기 전까지 고구려 원정에 대한 야망을 놓지 않은 이세민이지만 이제 그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전에 한 번은 더 볼 수 있을까.
내가 반석 위에 올려놓을 고구려와 중원의 성군인 이세민의 당나라가 다시 마주하게 되는 그 순간을 말이다.
그런 상상을 하는 도중 어느새 앞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형님.”
“저희가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대막리지.”
김이 빠진 연정토와 부기원이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섰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를 탐탁지 않게 보며 지나쳤다.
그렇게 집무실 안에는 정적과 함께 나와 연개소문 둘만이 남았다.
그와 독대를 한 것이 작년이었으니, 고당 전쟁을 거치며 벌써 1년이 지났다. 실상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곧 해가 다시 바뀐다.
조정에서의 일도 그렇거니와, 이야기할 거리는 산더미처럼 많아졌다.
그중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싶을 때 연개소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들었느냐?”
“예. 아버님.”
연개소문이 호통을 쳤다.
“정치란 이런 거다. 제 깐에 나라를 다스리겠다 하는 간나새끼들이 지들만의 원리원칙으로 이해를 조정하며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게지! 네 작은 게 아무리 공을 세운다 한들 이 궁 안에서 알아주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느냐? 설사 네 앞에서 알았다 웃으며 말한들 내일이면 모르는 척하는 것들이 귀족이라는 족속이니라!”
나는 지금 연개소문한테 정치의 속성을 배우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와는 다르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적당히 배우기도 해야 한다.
“하나 아버님께서 결국 제 뜻에 손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까?”
“남산아, 앞으로 네가 두 눈 뜨고 똑바로 지켜봐야 할 게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관철시킬 때 패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하는 것을. 만약 그것이 없다면...”
연수영과 수련을 하면서 눈이 뜨인 건지 일순 연개소문의 손이 등에 찬 비도로 향했다 내려온 것을 포착했다. 호방한 등 뒤에 5자루의 비도가 오늘따라 더욱 큼지막하게 보인다.
“패가 없다면 베라는 말씀입니까?”
말을 잇다가 끊어진 연개소문의 말에 내가 이어붙여 보았다.
“네가 이젠 거기까지 읽을 수 있게 되었구나.”
수염을 어루만지는 연개소문을 향해 내가 태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버님, 소자는 반대를 그리 싫어하지 않습니다.”
“반대를 싫어하지 않는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을 만들어내는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듯 무작정 내 것이 옳다고 밀어붙이는 건 나라를 위태롭게 합니다. 하루에는 낮과 밤이 있습니다. 밤하늘에 별을 보십시오. 저 별이 빛나는 건 어둠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빛과 어둠은 어느 하나가 없다면 의미마저도 없사옵니다. 그들은 적이 아니라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근본인 겁니다. 아버님.”
“흐하하하!”
그때 쾅 하며 탁자를 내려친 연개소문이 그로부터 한참이나 웃어 댔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나는 순간 말실수를 했나 싶어 당황했지만 이내 풀어지는 안색에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요동에서의 소식은 모두 들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친히 중원까지 다녀오신 아버님의 공만 하겠사옵니까? 그리고 요동에서 당나라 대군을 막은 것은 오로지 소자의 공만이 아닙니다. 아버님.”
나는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하나둘 떠올렸다.
“이는 안시성 성주, 신성 성주, 건안성 성주와 그 성주민들의 공이 컸습니다.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마다하지 않은 말갈 부족은 물론 바다에서 고구려의 제해권을 사수한 고모님과 석성의 공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또 비록 전사하였으나 목숨을 바친 요동 성주의 공도 잊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고 보니 고구려를 위해 공을 세운 이들이 그토록 많았구나. 그래서 내 어찌하면 좋겠느냐?”
“포상을 내리시지요. 공을 세웠으면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셔야 이치에 맞사옵니다.”
내 말을 경청하던 연개소문이 미간을 좁혔다. 누군가 한 사람을 꼭 짚고 넘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양만춘은 내가 직접 왔음에도 또다시 성문을 굳게 닫아 잠갔다! 고구려의 지도층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상을 내리라?”
역시 그랬나, 참 한결같은 아저씨다.
하지만 이미 고구려의 다음 방향을 결정한 이상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제가 있었다면 그깟 성문 열어주었을 겁니다,”
“자식은 열어주고 그 아비는 열어주지 않는다? 천하에 고얀 놈 같으니!”
빈정상해하는 연개소문을 보며 나는 양만춘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양만춘은 안시성의 자치권이 위협당할 요소를 애초부터 배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 거고. 이는 아직 요동이 중앙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배경이 깔려있는 까닭이다.
연개소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이상의 내부 다툼은 불필요하다.
“소자가 아버님의 가장 큰 자산이 아니옵니까? 안시성이 소자에게 마음을 연 것은 아버님께도 연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들이 아버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있으니 그리 노여워하지 마세요. 안시성에 할 말이 있다면 소자를 통해 하시면 돼옵니다.”
나는 지금 아주 중요한 말을 꺼냈다. 연개소문의 중앙 조정과 요동의 교두보를 내가 자처하겠다는 것이다. 제1차 고당 전쟁에 참전한 나에 대한 요동의 신임은 어쩌면 지금의 연개소문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연수영과도 회포를 풀었으니 나름의 내 역할이 있게 된 셈이다. 요동에서 겪은 그 개고생이 진정 헛고생이 아니었다. 작년부터 그걸 생각하며 움직이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흘러갈 줄은 몰랐다.
지금 와서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막상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과연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네가 조금 전 음양과 자연을 비유하며 말했던 이치는 꼭 지금을 위해 한소리 같구나! 크흠!”
불쾌한 듯 연개소문이 일순 몸을 돌리며 헛기침을 뱉었지만, 나는 저 모습이 나름 수긍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안시성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고구려는 정말 큰 위기를 맞았으리라, 이를 고구려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연개소문이었다.
“뭐가 되었든, 안시성은 고구려 백성들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일부입니다. 그들이 아버님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내친다면, 고구려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만 하려는 간신배들만 남게 돼옵니다. 빛으로만 가득한 세상은 눈만 부시듯 의미가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아버님께서 말갈인들을 포용하셨던 것처럼 안시성에도 자비를 내려주십시오. 그들을 품으십시오! 아버님.”
나는 조금 전과 다르게 최대한 공손하게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오냐, 그렇게 하마!”
“예?”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자 연개소문이 슬쩍 웃었다.
“그렇게 한데도.”
연개소문의 빠른 수긍에 당황했다. 설득하는데 이보다 더 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여기까지를 목표로 하였을 테지만 한 발 더 나가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소자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네가 포상마저 결정하겠다는 것이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이다.
“예.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대모달(大模達)로 삼아 요동과 요서 지역의 수성을 맡기십시오.”
“양만춘에게 대당주(大幢主)에 해당하는 지위를 주라?”
대모달(大模達)은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라고도 불리며 당주인 말객을 통솔하는 대당주는 문관의 막리지에 해당하는 고구려 무관 최고의 관등이었다. 즉, 요동과 요서를 아우르는 요하의 군사 통제권을 그에게 주라는 의미였다.
“그는 작은 안시성에서 당나라 황제의 대군을 막아냈사옵니다. 저희가 남쪽에 집중하는 사이, 당나라와의 국지전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안시성 성주에게 요동과 요서를 아우르는 지역을 지키라 대임을 맡긴다면 능히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을 내리는 것과 벼슬을 내리는 것은 다른 일이다! 도성에 코빼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놈에게 대모달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역정을 내는 연개소문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귀족들의 반발은 물론 아직 자신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안시성에 대한 신뢰 부족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이 신라를 공격하는 사이, 당의 이세민은 틀림없이 국경 지역의 소규모 군사를 일으켜 지속적으로 국지전을 시도하려 할 것이다.
연개소문 휘하의 다른 고구려 장수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판축 기법의 대가인 양만춘이 맡아주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다. 기껏 공을 들여 지켜낸 요동의 민생이 다시 도탄에 빠질 수 있다.
그것보다 중원의 통일 왕조를 상대로 두 개의 전선을 놓으려 하는데 적임자 하나 그곳에 배치시키지 못하는 사태가 말이나 된단 말인가.
그런 생각에 짜증이 난 나는 조금 전 연개소문의 역정을 흉내 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도성으로 소환하겠습니다!”
* * *
“연개소문이 돌아왔고, 백제의 성충이 고구려에 머물고 있다?”
최북단 국경 지역의 김품일로부터 첩보를 받은 김춘추는 지난번 처남 김유신의 우려와 더불어 상황이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당나라가 패퇴한 지금 고구려의 보복이 초읽기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당나라에 가야 한다. 원수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당나라가 필요해.”
여왕의 정치에 귀족들의 생각이 갈리며 내부 사정도 불안한 지금, 김춘추는 외교에 의존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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