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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삼기군 창설
남산과 선도해가 백제 사신을 접대하는 사이 고구려 조정은 이제야 요동으로 건너온 연개소문에게 백제 사신의 방문을 알리며 재촉했다. 하지만 재촉한다 한들 요동과 평양은 제법 거리가 있기에 시일이 걸릴 일이었다.
“대막리지께서 오시려면 아직 보름은 더 기다려야 할 터인데 걱정입니다. 삼공자가 과연 잘해줄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긍정적이었던 보장왕이 태도를 바꾸며 한숨을 쉬었다. 삼공자가 똘똘하여 맡기기는 했으나 지난번 조정에서 얼굴을 내비친 성충은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백제의 요구를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했다. 고구려 귀족들 사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배포와 언변에 호걸스러운 풍치는 가히 삼한 제일다웠다. 만약 대막리지가 없다면 그가 다음일 정도였다.
“그러게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형님이 오실 때까지 그저 시일이나 벌 일이지 남산이 따위에게 맡길 일이 아니라 하였지요! 고구려의 먹칠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겁니다.”
연정토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난했다. 어린 조카가 벼슬을 얻었다고 궁 안팎으로 설치는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 웃긴 것은 이번에 고요묘를 포함한 몇몇 귀족들과 연수영이 남산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사신 접대가 장난도 아니고 대체 뭘 믿고 그리했는지 어이가 없었다.
“아직 그런 말을 하기엔 이릅니다. 남산이가 돌아올 때까진 기다려보시지요! 오라버니.”
연수영이 팔짱을 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연정토가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노려보는 상황.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 귀족들이 당황할 무렵 미리 사신 접견실에 가서 반응을 보고 온 고요묘가 돌아왔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태왕 폐하! 이것을 보시옵소서.”
고요묘 뒤에 시종들이 보자기로 싼 꾸러미를 대령했고, 눈이 휘둥그레진 보장왕이 물었다.
“고 공, 그것이 다 무엇이오?”
“남산 공자께서 백제 사신들로부터 받아온 물건이라 하옵니다.”
꾸러미를 풀자 백제 땅에서 자란 최상품의 인삼이 가득했다. 남쪽에서 건너온 귀한 물건에 귀족들이 저마다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
* * *
백제 사신과의 첫 회담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들의 무리한 요구는 고구려의 튼실한 말과 백제 충청도 지역의 질 높은 인삼을 교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으며 향후 무역을 통해 더 많은 인삼과 백제 수공예의 귀금속이 고구려로 유입될 예정이다.
한동안 백제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조정으로서는 이번 결과에 사당히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보장왕은 크게 기뻐했고, 연수영과 고요묘 등 나를 지지해 준 귀족 세력들에게 실망감을 주지 않아 다행이었다. 연정토가 걸리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도 더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면 더 자세한 이야길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신라 정벌을 천명한 이상 백제와의 이야깃거리가 앞으로도 많아지겠지만 아직 연개소문이 도성에 도착하지 않아 이 이상의 이야기를 진척시킬 수는 없었다.
적당히 연개소문의 핑계를 대며 마무리할 뿐.
구체적인 전략은 결국 연개소문을 설득한 뒤에야 이루어질 전망이다. 실제로도 고당 전쟁이 끝나고 신라를 응징하기 위해 백제와 함께 공격하지만 요서 지역을 확보하며 자신감을 가진 연개소문이 이후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당나라부터 치자고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재 내분이 터진 설연타가 어이없이 흔들리면서 당나라 영토 내에서의 전면전은 무리가 있다. 북쪽의 이민족들도 아직 완전히 장악했다고 할 수 없고 무엇보다 남쪽의 신라가 가장 걸리는 상황이다.
그러니 다음 목표를 남쪽으로 잡은 것이다.
-대막리지께서 오고 계시다 하니 뵙고 가겠습니다.
흥수는 이날 전해 들은 걸 가지고 백제로 돌아갔고 성충은 평양에 남아 연개소문을 만나고 가겠다고 했다. 내가 밝힌 신라 정벌에 대한 이야기를 그와 다시 한번 나누어보겠다는 것이다.
때마침 연개소문이 요동으로 넘어와 머지않아 도성으로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니 일단 그 안에 서두를 수 있는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나는 걸걸중상의 서찰을 받은 뒤 설인귀와 동부가에서 모집한 15세 이상의 5백의 무사들을 선발해 북쪽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수나라의 대군과 맞서 대승을 거둔 영광스러운 격전지 앞에 걸걸중상이 데려온 여러 말갈 부족의 군사들이 모였다. 걸걸중상은 대략 5천 정도의 군사라고 밝혔으며 아직 오지 못한 후발대까지 더한다면 7천의 군사가 모일 것이라 했다. 내가 도성에서 모집한 군사들을 포함하면 총 7천 5백의 규모였다.
나는 먼저 온 그들의 구성을 살피며 문제점을 파악했다. 군사들의 기강이나 사기 같은 부분이 아니라 모두 같은 부족들끼리 부대를 나누어 도열해 서 있었다.
걸걸중상이 다가와 북방에서 온 말갈 추장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작은 막리지, 저쪽은 흑수 말갈의 추장 흑수돌이옵고, 이쪽은 소인의 의형제이자 아우인 걸사비우이옵니다.”
“소인은 백산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라 하옵니다. 중상이 형님께 작은 막리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사옵니다!”
어쩐지 이름이 낯이 익다 했더니, 후일 대조영을 따라 발해 건국의 주역이 되는 말갈 추장 걸사비우였다.
수십 년 후에나 벌어질 천문령(天門嶺) 전투를 생각한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나 오래되었다.
나는 걸사비우와 다른 말갈족 추장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잘 왔습니다. 그대들이 나서준 오늘은 말갈을 통합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겁니다.”
나는 걸사비우와 다른 말갈 추장들의 용기를 한껏 치켜세웠다. 그들을 따르는 군사들을 바라보자 모두 허리춤에 두루마리 주머니를 달고 있으며 그 안에는 육포를 넣어두었다.
걸걸중상이 내가 시킨 대로 잘 이행한 모양이다. 군사들의 볼록한 뱃살은 아마도 향신료가 들어간 고기를 배불리 먹었음이다.
나는 후발대가 도착하자마자 각 말갈 부족의 추장들을 따로 모아 설명했다.
“말갈인들은 보통 10인이 1조를 이루어 사냥을 나선다 들었습니다. 10인 중 한 사람을 추첨해서 뽑고 남은 이들이 주장의 명을 따라 사냥을 나서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지요? 그런 구성을 니루라고 부르고요.”
“작은 막리지께서 저희 말갈인들의 사냥 풍습을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내게 설명 한번 해 주지 않은 걸걸중상이 짧게 감탄했고, 다른 추장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과연 천년 전 사냥 풍습이 역사를 바꾼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후일 말갈의 후예인 여진을 통일하고 중국 대륙을 지배한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의 군대는 이러한 니루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누르하치는 사냥꾼들로 이루어진 니루라는 집단을 군사 조직으로 새롭게 편제하여 끈끈한 정예 부대로 만들었다. 그것이 팔기군(八旗軍)의 시초였다.
현재 상당수의 부족이 고구려의 울타리 안에는 있으나 말갈은 여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있었고 군사 체계야 고대 시대이니만큼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들은 팔기군의 조상이다.
“지금부터 말갈 부족과 도성에서 온 고구려 병사들을 서로 혼합하여 100명을 1니루라고 하겠습니다. 5니루를 모아 1자란이라 할 것이며, 다시 5자란을 모아 1기라 할 것입니다.”
팔기군의 제도를 답습하기는 했지만 같은 씨족 체계의 부족제이며 과반수인 말갈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이만한 군사 체계가 없었다.
“그리 편제를 하면 각각 2500명의 세 기가 나오겠습니다. 주군.”
걸걸중상과 말갈 추장들이 서로 손가락으로 세는 사이, 설인귀가 단숨에 계산을 마쳤다. 자신의 시험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저는 그들을 각각 ‘산기군(産旗軍)’, ‘선기군(鮮旗軍)’, ‘홍기군(弘旗軍)’이라 부르겠습니다.”
나는 세 장의 큰 종이 위에 각각 새로운 군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군사 행정제도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간단하게도 창설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작은 막리지, 대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옵니까?”
걸걸중상이 궁금한 지 세 글자의 뜻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산기군이 적힌 글자에는 녹색 깃발을, 선기군에는 청색 깃발을, 홍기군에는 홍색 깃발을 놓고는 웃으며 가르쳐주었다.
“산기군(産旗軍)의 ‘산(産)’ 자는 내 이름에서 따왔다. 산기(産旗)가 향하는 곳에는 무엇이든 새롭게 자라며 풍요롭게 생산될 거라는 뜻이다. 그리고 선기군(鮮旗軍)의 ‘선(鮮)’자는 옛 조선(朝鮮)에서 따왔다. 더는 우리가 고구려와 말갈로 나눌 것이 아니라 이 깃발 아래 속한 모두가 다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다. 홍기군(弘旗軍)의 ‘홍(弘)’은 조선의 이념인 홍익(弘益)에서 따왔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군사라는 뜻이다.”
“아, 그런 깊은 뜻이 있으셨군요!”
그럴듯한 설명에 걸걸중상을 비롯한 말갈 추장들이 잇달아 수긍했다. 무지했던 그들은 아마도 고구려와 말갈이 나뉘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지배를 당하는 것도, 차별을 당하는 것조차 까맣게도 모르는 채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진짜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아니라 당나라를 따르는 말갈 부족이 생긴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그 때문이다. 영주의 장검은 이세민의 명으로 일부 말갈인들을 포섭해 고구려 원정에 참여시켰다.
그러니 더는 차별 같은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을 통합하고 복속시키며 나아가 하나의 고구려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니루의 조장을 뽑는 사냥을 실시하겠습니다.”
나는 각 니루의 일원들과 말갈 부족 추장들을 비롯한 자원 후보들을 추려 인근 산에 나가 사냥에 나서게 했다. 산기군과 선기군, 홍기군 세 부대가 모두 내 직속이기는 하나 각 니루의 조장과 그런 니루를 통제하는 자란의 주장과 그리고 그들 전체인 각 기를 통솔하는 대표 장수를 뽑으려 했다. 물론 고구려인 말갈인 가릴 것 없이 오로지 실력순이 될 것이다.
“토끼를 잡으면 1점, 꿩을 잡으면 3점, 노루를 잡으면 5점, 멧돼지는 7점, 범을 잡으면 20점이다!”
와아아아아!
도성 규칙을 그대로 적용했고, 사냥이 열리자마자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렸다.
쿠웅! 쿠웅!
쨍앵!
다그닥! 다그닥!
북이 울리며 징이 치자마자 기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들이 빠르게 산속으로 진입해 순식간에 꿩과 토끼를 잡아 왔다. 누가 고구려인들 아니랄까 봐 활 솜씨가 남달랐다.
“1니루의 조장은 나다!”
“2니루는 나야!”
“3니루는 내 차지다! 이 떨거지들아!”
최소 단위인 니루의 조장을 뽑는 일은 어마어마한 경쟁률이었지만 애초에 사냥의 남다른 자원자들만 받았고 제한 시간도 있었기에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니루는 물론 5니루를 통솔하는 자란의 대표들이 모두 결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기를 좌우하는 3명의 우두머리를 뽑고자 했다.
“백산! 백산!”
“속말말갈! 속말말갈!”
“백돌! 백돌!”
“흑수! 흑수!”
사냥의 하이라이트답게 각 부족의 일원들이 추장을 응원하는 열띤 분위기였다.
이 사냥에는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포함해 당연하게 설인귀도 끼어 있었다.
“저도 사냥은 할 줄 압니다. 도련님.”
의외인 것은 내 호위를 맡은 옥소까지 나섰다는 점이다. 여인이라고 안 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를 통솔할 고구려 자원자도 적은 데다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으니 허락했고 그렇게 총 12인이 각 기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산에 들어섰다. 그리고 해지기 전까지를 제한 시간으로 삼았다.
“우와아아아!”
“우리 부족장이 이겼다!”
“저기 우리 부족장이 더 많이 잡았어! 짜샤!”
꿩 여덟 마리, 노루 일곱 마리, 토끼 열 마리 등 한 사람 한 사람 각 부족을 대표하는 이들답게 산을 나올 때마다 무지막지한 사냥감을 자랑했다. 아마 사냥감의 점수를 따로 내봐야 정확히 판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야! 저길 봐!”
얼마 뒤 한 말갈인이 산 입구 쪽을 가리켰고 뒤이어 나타난 이들이 잡은 사냥감의 양에 모두가 떡 하니 입을 벌린 채 경악하며 일제히 시선이 돌아갔다.
무려 호랑이와 늑대로 보이는 야수들이 수레 안에 가득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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