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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막리지 막내아들-44화 (4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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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외교 (2)

갖은 술수와 정치를 하면서까지 나는 무사히 백제 사신들을 안내하며 사신 접견실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솔직히 안도의 기분이라기보단 범상치 않은 인물들과의 대면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물론 접견 상대가 상대인지라 나 혼자는 아니었고 선도해가 같이 딸려 와 있었다.

“백제 성충은 만만한 자가 아니옵니다. 그는 대막리지를 상대로 협상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옵소서.”

때마침 선도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성충(成忠) 하나만을 보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 옆에 흥수(興首)라는 자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게 이 자리에 없는 백제 마지막 영웅 계백(階伯)과 더불어 백제의 삼충사(三忠祠)였다.

“나는 고구려의 이익만을 따질 겁니다.”

마찬가지로 선도해의 귀에 대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 접견실 안에서 내 감독관이었다. 내가 허투루 접견을 하거나 고구려를 얕보이는 오판을 한다면 그는 언제든 나서서 나를 내보내고 권력자의 면모를 보이려 할 것이다.

선도해는 고구려 외교의 중추가 연개소문도, 태왕도 아닌 그 자신이라고 믿는 자이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사다. 그러니 김춘추를 상대로 협상을 하며 제 주머니에는 재물을 챙기고 고구려에는 적대하지 않도록 만드는 꾀를 부린 것이다.

“가급적 저와 백제 사신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말아 주십시오. 선 공이 나선다면 그들은 본심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백제 사신들이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에 들기 전 선도해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좋습니다. 하나 저들의 요구대로 흘러간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삼공자의 몫이 될 것입니다.”

고개를 빳빳이 든 선도해가 그렇게 경고했다. 어디 내 솜씨를 한번 보겠다 하는 표정이었다. 잘못 틀어지면 건방지게 나선 내가 온전히 뒤집어쓸 것이라는 속내는 확실히 하면서.

선도해는 여차하면 내 벼슬을 잃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동에서의 공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지도 모를 인사였다.

정치판이란 원래 오르기란 힘들어도 내려가는 건 순식간이니까.

그것을 염두에 두며 나는 곧 접견실에 들었고, 백제 관복을 입은 두 중년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제 어라하를 모시는 성충이라 하옵니다.”

“흥수라 하옵니다. 한데 아까 분명 대막리지의 삼남이신 남산 공자라 하였지요?”

긴 수염과 뚜렷한 이목구비에 총기가 가득한 중년의 두 사내가 재차 자신들을 소개하며 나를 알아보았다. 안내만 한다고 생각한 내가 접견실까지 들어오리라고는 미처 몰랐다는 눈치들이다.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웃음기 싹 빼고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대고구려국 대막리지의 삼남 연남산이라고 합니다.”

“남산 공자의 소문은 바다 건너 백제에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안시성에서 당의 황제와 대적해 대승을 거두셨다고요?”

기대 반 의심 반 같은 심정일까,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는 성충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는 과장된 이야기로 보았습니다. 하나 이곳 평양에 들러 고구려인들에게 물으니 하나같이 사실이라 합니다. 이리 당사자가 납셔서 저희를 접대하시니 직접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예리하게 쳐다보는 흥수 역시 관심을 보였다. 오히려 내가 직접 접견실에 나타나 반가운 모양이다.

나는 이들이 하는 몇 마디를 들으며 확신했다.

총기가 가득한 눈빛에 대단히 지적으로 보이는 이들은 백제의 두뇌를 담당하는 중신들이 분명하다는 것을.

“정말 공자께서 안시성에서 당나라 대군과 맞서 싸우신 겁니까?”

조금 전 흥수의 흥미를 이어받아 성충이 대놓고 물었다.

아마 내가 백제사람이고 바다 건너 그런 소릴 들었다면 제일 먼저 비웃었을 것이다. 만 10세도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작은 안시성에서 당의 황제와 그 휘하의 백만 대군과 맞서 승리를 쟁취하다니, 최소 과장되었다고 믿을 것이 뻔하다. 그러니 이 두 사람도 지금 그런 마음으로 묻고 있는 걸 거다.

“당의 주인 이세민이 요동성을 점령하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반면 우리 고구려는 위기를 느꼈지요. 백만대군이 일시에 평양으로 들이닥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테니까요.”

“하나 당의 황제는 요동성을 점령한 뒤 곧바로 안시성에 가질 않았습니까?”

고당 전쟁의 과정을 궁금해하는 흥수가 다시 물었고 내가 답했다.

“제가 유인하였습니다.”

“공자께서 유인하셨다고요?”

두 백제인은 일순 서로를 힐끗 보고는 내게 시선을 모았다.

“예. 을지문덕 장군께서 우중문을 찾아가 항복을 하고는 그를 유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수나라 30만 대군을 살수 앞바다에 모조리 수장시켜버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어리신 공자께서 이 접견실에 들어오신 이유가 다 있으셨사옵니다.”

감탄하는 흥수와 달리 말문이 막혔는지 성충이 일순 자신의 수염을 가다듬었다. 옆에 선도해도 자신의 끼어들 순간이 없다고 보는 눈치였다.

외교에 있어 국가의 우월성을 먼저 보이는 것은 실로 중요했다. 마치 첫인상에서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격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중원을 통일한 당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고구려의 자신감이었다.

“공자께서는 마치 안시성의 승리를 예측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성충이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당나라 대병을 직접 안시성에 유인하였단 말씀입니까?”

뒤이어 흥수가 물었다. 그들도 궁금한 것이다. 내가 요동성을 무너뜨린 황제를 그보다 작은 안시성에 유인하였고 승리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그나저나 조금 당황스러운 질문이긴 한다. 역사를 알았다고 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적당히 그럴듯하게 화제를 돌려야겠다.

“고구려는 큰 나라입니다. 요동의 천리장성은 남단에 비사성부터 최북단의 부여성까지 수천 리요, 그 사이에는 성들이 많습니다. 대병을 몰고 온 이세민의 군사를 분산시켜야 그들의 보급을 끊는데 용이하며 나아가 적을 섬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고구려는 제해권을 장악했고, 안시성에서 버틴 석 달이 우리가 정비할 수 있도록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마침내 반격하여 요동과 요서를 회복했습니다.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온 그들이 도리어 정벌당한 것입니다. 우리 고구려국은 서토의 오랑캐로부터 삼한을 지키는 방파제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내 말을 유심히 들은 성충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앞서 조정에 무리한 서찰을 보낸 것처럼 지난번 김유신이 고구려를 쳐들어왔을 때 백제가 도와준 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려고 고구려를 방문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하나 내가 먼저 고구려가 외세로부터 지킨다는 대의를 말했으니 섣불리 대가 얘기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쪽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입 밖으로 꺼내려나?

“하나 저희 백제는 고구려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군사를 일으켜...”

아니나 다를까, 그 얘기를 꺼내려는 모양이다. 나는 성충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끊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고구려는 서토의 오랑캐로부터 삼한을 지켜냈습니다. 당의 요구를 거절한 백제는 이제 고구려의 삼한입니다. 이미 당의 등을 돌린 백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무례합니다! 저희 백제를 낮추어 말하는 발언이라면 우린 언제라도..”

“그대들은 이제 와서 당나라에게 붙을 수 있다 보십니까? 이미 당의 파병 요청에 거부했으며 오히려 응한 신라를 공격한 백제를 말입니다! 신라의 김춘추는 딸자식과 사위의 목숨을 거둔 백제를 원수처럼 여깁니다. 우리 고구려가 역으로 등을 돌린다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보겠습니까?”

“저희는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돕기 위해 움직인 것입니다! 백제의 성의를 자꾸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발언을 하신다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김유신의 대병이 고구려의 국경 쪽으로 쏠려 있을 때 백제는 신라의 7성을 도로 취하질 않았습니까? 그것이 백제를 위한 것이지 어찌 고구려를 위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고구려를 위한 것이라면 그 7개의 성을 고구려에게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다음 저희 조정에 보낸 사례를 다시 논하시지요.”

흥수가 끼어들었다.

“아, 아니.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어찌...!”

“괜찮네.”

나와 성충의 설전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홍수가 발끈하며 나서려고 하자 성충이 손으로 막으며 허허허 하고 한참이나 웃어댔다.

“어린 공자께서 당의 황제와 맞섰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허언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사옵니다. 공자께서는 정말 당나라의 백만 대군과 맞서 대승을 거두신 것이 맞사옵니다. 고구려의 비범한 인물은 오직 대막리지 한 분뿐인 줄 알았는데 제가 틀렸습니다.”

갑자기 달라진 성충의 태도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를 시험하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 공자만을 시험한 것이라 할 수는 없지요. 고구려 조정이 저희의 접대에 남산 공자를 맡긴 의중도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 지금은 그것마저 해결되었습니다.”

“나참 이거야 원, 고구려는 이처럼 어린 공자가 나서서 공을 세운단 말입니까? 백제가 참으로 작은 나라처럼 보입니다그려.”

성충의 인정과 흥수의 허탈함에 조용히 지켜만 보던 선도해는 은근슬쩍 부채를 거두었다.

나를 감시하는 또 하나의 시험에서 통과한 것이다.

이후 자연스레 술상이 들어왔고, 성충과 흥수는 흔쾌히 웃으며 요동에서 겪은 내 경험을 모두 들어주었다. 당과 신라의 관계가 돈독이 쌓여가는 국제 정세에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은 필수불가결한 조치였다. 백제는 바다 건너 왜국과도 친하니 그들을 외교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나올 수 있다.

나는 성충과 흥수와 대화를 나누며 남쪽의 상황을 파악했다.

대략적인 부분은 알아도 실제 그곳에서 살며 모든 정황을 보고받는 이들만 할 순 없다.

“저희 어라하께서는 계백과 윤충 장군을 앞세워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키셨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항산(恒産)을 나누어 백성들의 민생에도 힘쓰고 계시지요.”

백제의 국뽕 타임이었다. 집권 초기라 그런지 확실히 그들이 의자왕을 생각하는 마음은 남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의 의자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권에 위협이 될만한 왕족들을 섬으로 추방하며 숙청을 실시했고, 왕권을 공고히 하고 대내외로 영향력을 보여주기 위해 친정하며 신라와의 싸움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미후성 등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고, 윤충으로 하여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 일로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을 죽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백제와 신라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벌어졌다.

바로 그 목표가 달라진 것.

김춘추는 딸인 고타소를 잃게 되면서 백제 멸망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세운 반면, 백제는 어디까지나 군주의 위엄과 왕권을 세우기 위한 정복 전쟁이 목적이었기에 그저 신라의 영토를 빼앗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의자왕은 이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정사암 회의를 폐지하고 독재하며 사치에 향락한다. 나중에는 40명이나 되는 왕자들을 좌평으로 임명해 귀족들의 강한 적개심을 유발한다. 나당 연합군이 침공해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성으로 대피한 의자왕은 결국 불만을 품은 귀족의 손에 배신을 당하며 700년 사직의 문을 닫는다.

고구려와 같은 뿌리를 가진 삼국의 하나가 외세에 의존한 신라에게 멸망당한 것은 안타까웠으나, 내가 그리고자 하는 미래의 고구려를 생각했을 때 백제는 어쩌면 그쯤에서 무너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배계층의 부패와 여기 사신으로 온 두 사람 같은 충신을 죽이는 나라가 더 지탱한들 백제 땅의 인재들만 불쌍해지는 일이다.

물론 여기서 그들을 끝내는 대상은 신라도, 당나라도 아닐 것이지만 말이다.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성충은 조금 더 진지한 대화를 꺼냈다.

“저희 어라하께서는 신의를 지키시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신라는 과거 저희와의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을 하였습니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100년 나제 동맹이 깨진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즉각 동의해주었다.

“고구려가 언제 신의를 저버리는 것을 보았습니까? 저 매금의 나라가 왜구의 노략질에 어려울 때는 수만의 군사를 파견하여 도움을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보은은 도리어 군사를 일으켜 우리 고구려를 침탈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저희도 당했으니 이처럼 응징을 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술 취한 흥수가 끼어들었고 성충이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공자께서 혹여 저희 어라하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를 통하여 말씀하시면 되옵니다.”

내심 성충과 흥수 같은 인물이 고구려에 귀부한다면 좋겠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백제의 충신이었다. 큰 변화가 없다면 여기서도 의자왕에게 버림받아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실은, 어라하와 백제 조정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옵니까?”

“말씀하시옵소서.”

그러니 나는 의자왕의 정신이 멀쩡할 때까지 이들을 이용해야 했다.

“저희 고구려는 신라를 정벌할 것입니다.”

이세민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학습했으니 말이다.

* * *

“그 아이들이 보내왔습니다. 도련님.”

접견실을 나오자 한동안 연수영의 사가에서 휴가를 보낸 옥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북쪽의 말갈 부족과 접촉한 걸걸중상이 때마침 서찰을 보내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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