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막리지 막내아들-43화 (4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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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외교 (1)

연개소문은 넓어진 서쪽 영토의 천리장성 축조를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중원의 통일 왕조와 대항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광활한 요서 지역을 경영하는 일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요서 지역의 확보로 중원을 향한 시야는 한층 더 넓어졌으나 당의 만리장성인 임유관(臨渝關)에 인접해 있으며 그곳을 지키는 강하왕 이도종이 언제라도 군사를 일으킬 틈을 엿보고 있었다. 또 북쪽에는 정처 없이 떠도는 무법자인 부랑배 유목민족들이 기름진 땅을 차지하기 위해 남쪽을 호시탐탐 노리는 실정이다.

멀리 당나라의 장성을 바라보는 연개소문은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서쪽의 설연타와 재차 접촉을 시도해보려 했으나 이번에는 깜깜무소식이었다. 비단길에서 온 서역 상인들을 통해 듣자니, 설연타의 내부 사정이 심각해졌다는 소문이다.

‘만약 내분으로 설연타마저 무너진다면, 누가 우리와 힘을 모아 당나라와 대항한단 말인가.’

연개소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립이었다. 당과의 무역을 통해 수많은 나라가 문물을 수용하며 혜택을 받고 있었고, 제 발로 그들의 발밑에 들어가 신하라 처하며 책봉식을 내려달라 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대고구려 사람이다!”

길목에 꽂힌 당나라 깃발을 찢어버린 연개소문은 홧김에 그렇게 소리쳤다.

“작금에 백제와 신라를 포함한 해동 열여섯 개 국가가 모두 당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신하라 칭하나, 오로지 나의 고구려국만이 당 조정에 굴복하지 않는다!”

당나라 진영을 보며 외치는 연개소문. 그는 중원이, 당나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중심이 되어 재편되는 천하관을 꿈꾸었다.

“고구려인들은 모두 대막리지의 깊은 뜻을 알고 있사옵니다!”

“자네가 백암성에서 계필하력을 막아낸 처려근지 고돌발인가?”

연개소문이 고돌발을 보며 물었다. 이제 그는 더는 백암성 성주가 아니다. 연개소문은 성을 지켜낸 그의 공로를 인정해 요서 지역의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렇사옵니다! 대막리지. 소장은 남산 공자께서 당부하신 대로 백암성에서 성벽을 보수하고 수성기를 설치해 서토의 오랑캐들을 물리쳤사옵니다.”

요동으로 돌아온 연개소문은 건안성, 안시성과 요동성을 거쳐 요하를 건너면서 남산의 행보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피부로 느꼈다.

고돌발이 품에서 꺼내어 보인 서책 한 권. 손때 묻은 대수성책이 바로 그 증거였다.

“남산이가 별말 남기지 않았는가?”

이세민을 쫓은 연개소문이 다시 돌아가 안시성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도성에 보냈다는 양만춘의 말을 들었다.

연개소문의 물음에 일순 고개를 갸웃한 고돌발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남산 공자께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으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나라 놈들이 요동성으로 몰려올 때 말갈인 소년 하나를 보내 당부에 주신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혹여 소장이 대막리지를 뵙게 될 시 꼭 알려드리라 하였지요.”

고돌발은 걸걸중상과 만났을 때 받은 서찰을 떠올렸다.

“말하시게. 그게 무엇인가?”

깜빡 잊은 고돌발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내 꼬깃꼬깃해진 작은 서찰을 살짝 훔쳐보며 말했다.

“몇 가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하나는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말갈인들이 적지 않으니 그들을 결코 고구려 군사와 달리 대해서는 아니된다 하셨습니다. 공에 따라 마땅히 포상을 해야 한다 하셨고요.”

연개소문이 말갈 출신 장군 생해를 쳐다보고는 수긍했다.

“고거 참 간만에 듣는 바른 소리로구나. 그뿐인가?”

“또 천리장성을 확장하였듯 이것이 말갈인에 국한되서는 아니 된다고도 덧붙이셨습니다.”

“그건 무슨 소린가?”

“당의 이세민은 복속시킨 돌궐과 이 영주 지방의 거란족들뿐만 아니라 신라에서 귀환한 이들에게도 벼슬을 내려 대임을 맡긴다 하였습니다. 대막리지께서 고구려의 천하를 꿈꾸신다면 이것이 결코 당에 밀려서는 아니된다 하셨습니다.”

고돌발은 마치 대막지리를 가르치려는 듯한 내용에 연개소문의 눈치를 보며 살짝 긴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한편 연개소문은 이에 실마리를 얻었는지 숙군성에서 항복한 장검과 영주 인근에 거주하는 거란족들을 떠올렸다. 북방 민족인 해족(奚族)과 옛 흉노족의 피를 물려받은 장검은 당나라 내 이민족들의 우두머리였고 거란족들은 한때 고구려를 괴롭힌 선비족의 파생 민족이었으나 지금은 당에 복속된 처지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세민이 퇴각하고 북쪽의 영향권을 상실한 지금 그들은 고구려의 처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란(契丹)의 추장 대하아복고(大賀阿卜固)의 후계자 이진충(李盡忠)이 대막리지를 뵙기를 청하옵니다!”

때마침 영주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온사문이 그렇게 알려왔다.

연개소문은 일단 그들을 만나 남산의 말대로 할 것인지 정하려 했다.

그러는 한편, 고구려의 새로운 우방국을 찾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을 작정이다.

* * *

“삼공자가 백제의 사신을 접대하겠다?”

“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태왕 폐하.”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보장왕의 시선이 슬그머니 좌우의 조정 신료들에게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고막을 울리는 성가신 음성이 들려온 것은 잠시 후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거라! 성충이 백잔의 사신이라고는 하나 어린아이와 담소를 나눌 만큼 한가한 자라 보느냐?”

예상대로 연정토가 가장 먼저 반대할 줄 알았다. 그는 대놓고 연남생을 지지하며 연수영에게 적대감을 지니고 있는 귀족 세력이다. 내가 연수영과 어울리는 거야 이제는 이 조정에서 모르는 이는 없을 거고 그는 자연스레 나와 멀어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

그나마 연남생은 지난번 한 상 보낸 걸로 잠잠한 듯하다.

나는 앞으로 여유가 될 때부터 서쪽 별장에 식혜를 넣은 한 상을 공급하려 한다. 그 선한 인상의 영희 부인을 구워삶는 것보다 당장 남생을 통제할 길은 없었다.

“삼공자께서 공을 세운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하나 이는 우리 고구려의 외교가 달린 일입니다.”

선도해가 연정토를 지지하듯 그렇게 발언했다. 나는 연개소문이 없는 이 조정에서의 대세가 연정토보다 선도해에 있다는 걸 한눈에 직시했다. 특히나 고구려의 외교를 좌우하는 것은 언변이며 귀족들로 둘러싸인 이 조정에서 선도해를 제외하곤 뾰족이 나설 사람도 없을 터였다.

내가 선도해와 연정토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백제와 신라는 당의 책봉서나 받으며 신하를 자처한 나랍니다. 저희 고구려가 그런 당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서토의 수괴를 저 멀리 서쪽으로 쫓아버렸습니다. 이를 아는 백제가 어찌 저희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직 어리나 이 조정에서 이세민이 도망치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사람이니 맡겨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선도해가 입을 열었다 닫았고 연정토가 입을 뻐금이며 재차 반박하려 했으나 태왕이 먼저 나서 주었다.

“삼공자의 말이 그럴듯하지 않소이까? 지난번 백제의 사신이 우릴 찾았을 때와 상황이 다릅니다. 요동에서 우리 고구려의 승리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삼공자가 나서 준다면야 이 같은 요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보장왕이 백제왕의 교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오나 태왕 폐하, 이는 자칫 백잔이 우리 고구려를 업신여기게 하는 빌미가 될지도 모르옵니다. 남산이의 나이를 생각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아무리 정치판이라지만 치사하게 나이 공격이라니, 연정토의 지적에 순간 불쾌함이 들었지만 나는 태연한 척 꾹 참으며 조용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슬슬 준비가 됐는지 고요묘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와 태왕을 향해 읍했다.

“삼공자께서는 대막리지의 전언을 행하고 계시옵니다!”

고요묘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나서자 식겁해진 연정토가 한 걸음 물러났고, 선도해를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저마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날 연수영과의 수련을 마친 나는 고요묘의 저택을 찾았다. 고요묘는 역사에 엮이고 싶지 않은 매국노 귀족으로 기록되었다지만 고구려가 흔들리지 않았다면 탐관오리 정도로 남았을 인사였다. 그리 내키지는 않았어도, 적당히 그의 여식과 어울려주며 집안 예기를 서로 오고 가는 수준만으로 이 조정에서 나를 지지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남산이 저 어린 녀석이 무슨 형님의 전언을 받았다고...”

의심 많은 연정토가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다시 끼어들어야 하나 싶을 때, 뒤에서 조용히 잠자코 있던 연수영이 나서 주었다.

“태학과 사찰을 중심으로 민생을 구휼하고 있는 일을 이 도성 내에서 모르는 귀족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남산이가 누구의 전언이 없었다면 이 같은 일을 벌일 수 있었겠습니까?”

연수영의 재치 있는 발언에 귀족들이 저마다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자녀들이 태학에서 배운 조리법을 전했을 거고 틀림없이 새로운 요리의 맛을 보았다는 방증이다. 그 아래 가솔들 역시 기력을 보충할 수 있는 음식들로 배를 채웠다면, 후일 고구려의 활력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오나 삼공자께서는 선인(先人)이십니다. 본디 선인이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신이 함께 삼공자와 다녀오겠사옵니다.”

다 되어가나 싶을 때, 이번에는 관직 때문에 똥파리 하나가 꼬였다. 내가 성충과 어찌할지 선도해가 직접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연개소문의 후계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선도해에게 제대로 인상을 새겨줄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 * *

“자네 들었는가? 지금 평양에 연개소문이 없다고 하네.”

“그게 참말인가? 연개소문이 없다? 분명 1달 안에는 도성 안으로 귀환하겠다 내 답신을 받았거늘.”

평양에 도착한 흥수와 성충은 연개소문이 없는 고구려를 방문하게 되었다. 일부러 연개소문의 개인 일정까지 살피며 온 것이 헛수고가 돼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넓어진 국토 순행에 일정이 길어졌나 보이. 한데 고구려 조정에는 이미 우리 백제국의 서신을 전했으니 어찌하겠는가?”

흥수의 말에 성충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한쪽 눈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연개소문이 없으니 오히려 우리의 의도대로 대가를 받는 것이 더 수월해졌으이. 자네가 연개소문을 보고 싶다고 하여 이리 같이 오게 되었으나 그것만이 안타깝게 되었네.”

내달 백제 좌평직 제수(除授)를 앞둔 흥수는 전날 연개소문을 만나고 돌아온 성충의 이야기를 듣고 고구려의 인물을 보기 위해 그와 함께 사신을 자원했다. 신라라는 공동의 적을 앞둔 지금, 고구려의 통치자를 만나보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연개소문을 보지 못하고 떠난다면야 아쉽겠지만 그보다는 백제국의 이윤이 더 중한 게 아닌가?”

그 말에 성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선도해라는 인물만 조심한다면 우리의 의도대로 고구려의 재물과 말들을 어렵지 않게 우리 백제국에 가져가는 것이 가능할 걸세.”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상륙한 그들은 그런 확신괌 하께 고구려 사절단에 안내를 받으며 안학궁으로 향했다. 궁 앞에는 선도해를 비롯한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소형(小兄) 이하 관료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는 붉은 옷을 입은 귀티 나는 소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기는 하나 광이 나는 풍채에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백제의 사신 성충이라 하옵니다.”

“소인은 흥수라 하옵니다.”

성충과 흥수는 각기 고구려의 왕자가 마중 나왔나 싶어 예를 다했고, 소년이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어서 오시지요. 저는 대막리지의 삼남 남산이라 합니다.”

* * *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밟은 걸걸중상과 그 아우들은 잠깐의 휴식 끝에 평양에서의 지령을 고구려에 속한 말갈 부족과 그 영향 하에 있는 부족들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당나라를 따른 말갈 부족에 대한 응징과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숙신 해적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말갈이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 도성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 이번에 우리 말갈 부족이 군사를 파병하여 고구려를 도운 것을 작은 막지리께서 기억하고 계십니다.”

걸걸중상은 남산의 의도대로 도성과 그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이 북방에도 전할 예정이다. 말갈인들을 교육하기 위한 사학 기관의 설립을 포함하여 새로운 식자재인 국수와 콩, 육포 등을 전하며 척박한 유목민족에 식량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중상이 형님, 그런 부탁이라면 굳이 이런 것까지 싸 오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너, 너는...?!”

백산말갈 족장에 오른 걸사비우가 소문을 듣고 걸걸중상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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